"은행 창구 앞에서 나의 경제적 가치를 대출가능액으로 환산하는 순간……멘붕이다."
(박사졸업한 지 10년 이하인 40대 남성 연구자)
"애초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용한 인문학을 선택해 무전유죄를 실천하고 있는 스스로를 위로할 밖에요."(박사졸업한 지 5년 이하인 30대 비혼<非婚> 여성 연구자)
"교환가치가 없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데에서 비롯된 경제적 곤란, 안정적이지 못한 직장으로 인한 실직의 불안."(박사졸업한 지 10년 이하인 40대 기혼 남성 연구자)
우리나라 인문학 연구자들이 털어놓은 고충들이다.
상허학회는 창립 20주년을 기념해 펴낸 '쉬플래망 상허(케포이 북스)' 특집으로 대학 등에 출강하는 30~40대 인문학(국문학 전공)연구자 2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하였다.
질문은 크게 5가지로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언제 슬럼프에 빠지고 어떻게 극복하는가' '연구자일 뿐만 아니라 생활인으로서 어떤 고충을 느끼는가' '내가 학술대회를 기획한다면' '선후배 연구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등 이다.
연구자들은 '연구자일 뿐만 아니라 생활인으로서 느끼는 고충'으로 경제적인 문제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주로 꼽았다.
수많은 명사들이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하는 것과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다.
박사과정을 수료한 30대 한 남성 연구자는 "생활유지가 힘들 것이란 사실을 모르고 이 길을 선택한 것도 아니지 않는가"라면서 "그럼에도 가장 힘든 점은 가족을 비롯한 친인척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접할 때"라고 대답했다.
그는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게 아니라 이 나이 먹어서까지 가족에게 작은 도움조차 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미안함이 반영된 자조적 비애"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박사졸업한 지 10년이 넘었다는 40대 남성 연구자도 "모두 비슷하겠지만 역시 가장 큰 고충은 경제적인 것에서 온다"면서 "돈벌이도 변변치 못하면서 아끼고 절약하는 법도 잘 모르고, 자존심은 강하면서 자기를 차별적으로 어필하는 방법도 잘 모른다"고 털어놓았다.
연구자들은 연구자로 살아가면서 맞닥뜨린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을 "소명" "연구의 기쁨" "공부하는 재미" "늘 새롭게 깨닫게 되는 진리" "문학이 인간다운 세상을 만든다는 생각" "인간 삶에 대한 관심" "울분" "질투의 힘" 등으로 극복한다고 답했다.
박사졸업한 지 10년이 안 됐다는 40대 비혼 여성 연구자는 "견고한 벽, 철옹성처럼 느껴지는 현실의 울타리와 여러 장애 조건들 속에서 느끼는 무력함은 때로는 요원하지만 현실에 초연하게 할 때도 있는 듯하다"면서 "비루한 현실을 상상의 힘으로 이겨낸다기보다 망각하면서 연구가 주었던 기쁨들만을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상허학회는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단편소설의 완성자'라는 평가를 받는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1904-?)의 문학 세계를 재조명하기 위해 문학 연구자들이 1992년 결성한 학술모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