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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과 성장으로 전락한 창조경제
공정과 성장으로 전락한 창조경제
  • 유철규 성공회대 교수·경제학
  • 승인 2013.09.1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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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과 함께 경제민주화는 상생, 창조경제는 신성장동력으로 변질

<커버스토리①> 근혜노믹스 논쟁 - 창조경제1

새 정부가 출범하기 이전부터 ‘창조경제’는 야권은 물론이고 여당으로부터도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급기야 4월에 들어서는 대통령이 직접 개념잡기에 나서야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보다 뚜렷한 비판은 야권보다 여권으로부터 나왔다. 이렇게 된 데는 야권 내부의 정책혼선과 이념적 혼란도 중요한 이유였지만, 사실 대선 공약으로서 창조경제가 제시하고자 했던 내용에 대해 야권의 입장에서 이의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큰 원인이었다.

경제민주화와 창조경제에 대한 상반된 견해

새 정부 국정기조의 줄기는 대체로 ‘창조경제’와 ‘경제민주화’로 모아져 왔으며,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도 두 개념에 집중되었다. 두 개념 각각에 대한 논란도 컸지만, 이 둘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첨예한 대립적 이해방식이 등장한다. 창조경제를 이야기하면서 경제민주화를 따로 뗄 수 없는 이유는 경제민주화가 창조경제의 조건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창조경제가 꽃을 피우려면 경제민주화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박근혜대통령 취임사) 창조경제 하나만 떼어내어서는 그 의미와 내용,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실행과제와 순서를 잡고 평가하기가 아직은 어려운 실정이다. 여권내부의 많은 비판도 여전히 창조경제라는 ‘이름’만 있을 뿐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창조경제가 신정부의 정책기조를 대표하는 브랜드라면 이전 보수정부의 성장정책과 차별적인 부분이 무엇일까를 보여야 할텐데, 그 차별의 핵심요소가 경제민주화이다. 보수정당의 후보가 경제민주화를 수용한 것이 이전 보수후보와의 가장 중요한 차별점이기 때문이다. 이제 창조경제의 개념 자체의 모호성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정권 초반 몇달 간의 논란이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국책연구소나 민간연구소들에서 관련된 연구 성과도 조금씩이나마 나오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합리적으로 창조경제를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시도는 경제민주화를 창조경제의 ‘제도적 인프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 8월 21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현오석 경제부총리가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대통령의 방미를 계기로 재벌을 필두로 재계 쪽에서 나름대로 정책에 대한 해석과 호응을 내놓고 있는데, 가장 큰 쟁점은 경제민주화와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가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대통령의 신년사처럼 경제민주화를 창조경제의 조건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이 둘을 모순적인 관계로 볼 것이냐이다.

모순적으로 보는 견해는 창조경제란 ‘창조적 파괴’와 그에 따라 불가피한 ‘실업’, ‘도산’, 그리고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을 감내할 수 밖에 없는 성장정책이라고 본다. 기존의 업종을 새로운 업종으로 바꾸는 ‘고통의 과정’은 불가피하다. 그렇게 보면 경제민주화는 이 고통을 피할 수 있다는 눈속임이고 미사여구에 불과하며 경제민주화를 강조하는 한 창조경제는 불가능하다. 반면 다르게 보는 견해는 간단히 ‘경제민주화없이 창조도 없다’라고 하겠다. 현재의 사회 양극화, 대-중소기업간 불공정거래, 가계소득과 기업소득의 불균형,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에 대한 차별대우, 장시간 노동, 청년실업 및 노인빈곤 등을 그대로 두고는 성장이고 뭐고 불가능하다. 하루 하루 버텨가는 경쟁이라는 아귀다툼 속에서 창조나 창의는 아무 의미가 없다.

앞으로 창조경제가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 갈지 아직은 열려있고 평가도 시기상조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부동산 종합대책, 추경예산 편성, 투자 활성화 대책, 그리고 금리인하까지 초기 경기부양 정책이 마무리되었고, 관련부처들의 업무보고도 이루어졌기 때문에 시론삼아 향후의 방향을 진단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성장 모델에 대한 ‘대안적 아이디어의 종합판?

대통령 취임사에서 보듯이 창조경제는 “과학기술과 산업이 융합하고, 문화와 산업이 융합하고, 산업 간의 벽을 허문 경계선에 창조의 꽃을 피우는 것… 융합의 터전 위에 새로운 시장,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는 것… 창조경제는 사람이 핵심…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소상공인과 중소기업들을 좌절하게 하는 각종 불공정행위를 근절하고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고치는 것”이다.

이 말들은 이전의 수차례 정권교체 속에서 제시되었던 한국경제의 결함과 전환의 필요성에 대한 주요한 정치적 논의들을 상당 부분 담고 있다. 국민의 정부에서 제시된 ‘지식기반경제’, 참여정부의 ‘혁신주도형 경제’나 ‘동반성장’,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추종자에서 선도자로의 전환’ 구호까지 얼마든지 연상시킨다. 당연히 그 속에는 18대 대선에서 야권이 움켜쥐었어야 했을 대안적 정책들이 포괄적으로 담겼다. 예를 들어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신년사에서 “…우리경제를 어렵게 하는 원인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드러나…대기업과 중소기업, 첨단산업과 전통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수도권과 지방, 그리고 상하위 계층간의 심화된 격차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시급한 과제… 대한민국 공동체의 공존과 번영을 위한 협력이 필요… 바로 동반성장”이라고 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기간 중 대표 재벌 총수들이 이구동성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을 외치고 재벌의 ‘사회적 책임’ 수행을 약속하고 나섰다. 그것이 실제로 어떤 의미와 내용을 가질지는 나중에 밝혀질 일이라 해도 당장 야당으로서는 허탈할 노릇이다. 또 17대 대선 당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던 야권의 한 후보자 진영은 이명박 후보를 겨냥해서 "새로운 시대를 맞아 세계 각국이 인적 자본의 육성을 통한 혁신 주도형 발전 전략 수립에 몰두하고 있는데,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과거 개발주의 성장을 고집하고 있는 현실에 우리는 위기감을 느낀다"고 비판했다. 창조경제는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이러한 방향의 비판도 무력화시킨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2월에 펴낸 『박근혜정부 국정과제』에 ‘협동조합 및 사회적 기업의 활성화’까지 창조경제의 핵심 국정과제로 포함시켰으니 웬만한 재야의 의견까지 쓸어 담은 모습이다. 따라서 창조경제를 긍정적으로 적극 해석한다면 한국경제성장 모델의 전환에 관해 지난 10여년 이상 모색해 온 대안적 아이디어들의 종합판이다. 형식적으로만 본다면 야당이 ‘일자리’, ‘소상공인’, ‘중소기업’, ‘불공정 행위’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지적하지 않고 정권을 비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야권이 ‘사람이 핵심’이라는 취임사의 주장을 비판하기는 더 어렵다. 현재까지 새 정부의 국정기조에 대해 대응하는데 야권이 겪는 곤란은 여기까지이다. 창조경제의 개념이 갖는 모호성이 문제가 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들이 난무하게 된 것은 대선공약으로서 야권을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한 결과이고, 그 반대급부이다. 그 말의 서구적 출처가 뭐고, 그 출처들에서 본래 쓰인 뜻이 뭐냐를 따지는 것은 지엽적인 문제들이다.

반복되는 기업상생과 공정질서, 그리고 규제완화의 요구

그런데 창조경제는 한편에서는 종합판이지만, 또 다르게 보면 이질적이어서 서로 섞이기 어려운 것들의 잡탕이다. 인수위원회는 창조경제를 위한 국정전략으로 ‘중소기업의 창조경제 주역화’를 내세웠다. 중소기업이 주역이 된다는 것은 이전의 주역이 바뀐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한국경제를 사실상 장악하고 있는 재벌구조가 파괴되어 새로운 경제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경제의 세계적 특징인 수출의존이 약화되고 내수가 획기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내수가 확대되려면 수출과 대기업에 직접 의존하지 않는 내수형 중소기업이 성장해야 하고, 수출대기업의 주요 경쟁력 원천인 노동비용절감전략이 폐기되어야 한다. 임금과 서민의 가계소득은 비용이라기보다는 내수 구매력의 기반으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를 거치며 창조경제 뒷받침 투자, 동반성장을 재벌 총수들이 외치고 나서는 모양새다. 그동안 혁신이니 구조조정이니, 신성장동력 창출이니 내세우며 세워놓았던 기존 계획을 창조경제로 이름을 바꾸어 내놓기 시작했다. ‘심형래’는 ‘싸이’가 되었다. ‘1명이 10만명을 먹여살린다’는 옛 모토는 노벨상 육성 프로젝트가 되었다. 지난 3월 설치가 결정된 전경련의 ‘창조경제특별위원회(가칭)’가 모으는 창조경제사례는 지속가능경영, 준법·윤리경영, ‘기획경영’, ‘예술경영’들이다. 어느 것 하나 그동안 재계에서 추구한다고 내놓지 않았던 것이 있을까. 그리고는 결국 규제완화를 요구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이런 종류의 과정이 왜 새롭지 않은지 몇 년만 시간을 돌려보자. 2010년 하반기 들어 갑자기 ‘공정’이란 말이 거의 모든 정치적, 정책적 사안에 적용된 적이 있었다. 개각 청문회와 외교부장관의 딸 특혜채용 문제 등을 거치면서 등장했다. 야당까지 덩달아 정부를 비판할 때조차 거듭해서 이 말을 복제해서 유포했으며, 재벌 대기업들도 사회적 역할 또는 사회적 책임이나 협력업체와의 상생에 관한 프로그램들을 연일 만들어 쏟아내기 바빴다. 공정은 ‘경제적 갑과 을의 불공정한 관계’란 표현에서 사용되듯이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경제적 거래의 공정성 문제에 초점을 두고 제기된 표현이었다.

대중소기업 상생은 애초에 대기업의 책임문제로 등장해서 친서민, 친중소기업으로의 정책전환을 강조했다. 그러다가 금방 ‘공정사회 만들기’로 흐름이 정리되고 모아졌다. 당시에는 이를 두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려는 입장도 있었고, 이명박 정부 집권후반기의 국면돌파용 임시 아젠다로 평가절하하는 입장도 있었지만, 돌이켜 보면 후자가 옳았던 것 같다.

그 당시 ‘공정소동’에 대해 냉소적이었던 이유는 이미 그 이전 오래 전부터 기업상생이나 공정 같은 말들을 담고 있는 법률이 많이 있었고, 대기업이 적극 찬성한 사례도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05년 5월에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대책회의가 대통령 주재로 열렸고, 같은 해 8월에는 이에 호응하여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대·중소기업 협력강화를 위한 정책개선에 관한 의견>이라는 건의서까지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배포했다. 2006년 3월에 기존 <중소기업의 사업영역보호 및 기업간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을 대체하여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 이 제정되었다. 법률의 4장에는 해서는 안되는 행위로 납품대금 지급문제나 기술뺏기 문제, 그리고 온갖 종류의 대·중소기업간 불공정거래 행위들이 죽 나열되어 있다. 따라서 대통령이 나서 새로운 비전이라고 내세운 ‘공정사회’는 ‘법 좀 지키자’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것도 민간자율이라는 이름으로 대기업이 자율적으로 책임의식을 갖고 알아서 할 일이라고 했다.

2013년에 포스코 임원사건, 제빵회사 회장 사건에 이어 남양유업 사태가 터졌다. 제2, 제3의 남양유업도 대기하고 있다. 남양유업사태는 매출목표 강제 부과, 명절 떡값, 휴가비 뜯어가기, 적반하장식 고소, 밀어내기 등등 나올 수 있는 대기업의 횡포가 모조리 담겨 있다. ‘재벌·대기업 불공정·횡포 피해사례 발표회’에서 나온 이야기를 보면 그 대부분이 현행법에서 금지하고 있으며 처벌도 가능한 내용들이다. 조금 멀리 <중소기업의 사업영역보호 및 기업간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부터 보자면 20여년 가까이 관련 법률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정치권의 문제해결 다짐이 있고, 범정부 차원의 납품 단가 후려치기 실태조사가 74개 대기업과 59개 공기업을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곧 전국경제인연합회의 공정거래확립에 대한 적극 참여 선언도 나올 것으로 본다.

새 정부에서 창조경제가 진행되는 과정은 어떤가. 창조경제를 이전의 보수정부 정책과 차별할 수 있게 만드는 경제민주화는 인수위원회 보고서에서 ‘원칙이 바로선 시장경제질서 확립’이라는 말로 제시되었고, 이후 논란을 거치며 결국 ‘기업상생과 공정거래질서 확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 앞으로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제2, 제3의 남양유업이 몇 번 등장하면서 이렇게 굳어질 것이다. 다시 한 번 ‘상생’이고 ‘공정’거래다. 대통령은 엄격한 법집행을 강조한다. 다시 한 번 ‘법 좀 지키자’이다. 그리고 민간의 자발적 자율적 노력이 강조된다. 재계는 그동안 미루어 놓았던 투자계획을 슬그머니 내놓는다. 언론과 홍보기관들은 이것을 창조경제 투자라고 확대 해석한다. 법을 집행한다는 정부가 법을 지키자고 말하면서 각자 알아서 해야 한다고 하면 그 진의를 의심하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

경제민주화가 ‘공정’으로 격하되어 고착화되는 순간 우리의 창조경제는 ‘공정’을 강조했던 이전 정부와 차별성을 잃게 될 것이며, 경제질서의 주역을 바꿀 수도 없으며, 고대하는 창조의 꽃을 기대하기는 정말 어렵다.

평범한 다수의 노동과 창의교육이 배제된 창조경제

인수위원회 제안과 대통령취임사를 두고 창조경제론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창조경제의 기본은 개인의 창의력이다. “이제 한 사람의 개인이 국가의 가치를 높이고, 경제를 살려낼 수 있는 시대입니다.”(대통령 취임사).

과거 산업화시기의 성장패러다임이 국가와 기업과 개인을 동일시(국민교육헌장을 상기해 보자)하고, 국가의 발전을 통해 개인적 삶의 개선을 추구하는 방식이었다면, 박근혜 대통령이 개인에 대해 강조한 것은 분명 이와 차이가 있다. 거칠게 말하면 개인의 행복과 발전을 통해 국가의 발전과 경제의 성장을 도모하겠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개인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김대중 정부의 신지식인으로 등장했던 영화감독일까. 지금 일순간에 세계적 스타가 된 가수일까. 아니라면 우리 사회의 다수를 구성하는 평범한 사람들일까. 만약 전자라면 창조경제는 대다수 국민의 삶을 변화시키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될 수 없다. 몇 명이 다수를 먹여 살리는 방식이 될 테니까. 몇몇 대기업집단의 성장에 국민경제의 성장을 목매고, 일반 국민의 삶은 이들 대기업의 성과로부터 나오는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로 개선된다는 과거의 성장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현 정부에서 창조경제의 전도사역할을 한다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지금까지의 축약형 전략과 양적성장론으로는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경제구조를 과거의 요소 투입형 성장모델에서 창조경제라는 패러다임으로 바꾸어야’한다는 식이다. 이 말은 지금까지처럼 소수 대기업집단 중심의 성장으로는 안된다라는 것을 의미하므로, 일관성이 있으려면 창조경제의 기본을 이루는 개인은 특출나거나 성공을 운에 맡겨야 하는 몇몇이 아닐 것이다. 바로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며 국민의 대다수가 다양하게 생각하며 다양하게 시도하고 다양하게 실패하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것이 등장하는 사회일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 보통사람들은 노동자이다. 한국에는 자영업자가 많다하지만, 서구의 기준에서 보면 이들 자영업자들은 사회서비스업으로 흡수되었어야 했을 노동자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앞으로 창조경제가 어떻게 해석되고 전개되든지 간에 항상 그 일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지식(기반)경제론이다. 지식기반경제라고 불릴 정도로 오늘날의 선진 경제는 노동자의 지식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은 수준에 와 있다. 한국도 이제 그 초입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노동자의 창의력과 지식이 생산과정에서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생산과정에 대한 노동자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무슨 일이든 몰두해야 나오게 마련인 좋은 아이디어는 그 일에 대한 헌신에 달려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시된 창조경제에는 노동이 없다! 노동과 자본의 대등하고 공정한 파트너쉽과 상호인정없이 어떻게 격화되는 사회적 갈등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며, 이미 한국경제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재벌의 경제력을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어떻게 관리할 것이며, 사회적 갈등과 경제력 집중의 관리없이 어떻게 안정적인 경제운영을 달성할 수 있을까(인수위에 따르면 안정적 경제운영은 경제민주화와 함께 창조경제의 또 하나의 핵심 조건이다).

평범한 다수 국민의 삶에 창조적 열의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정신, 실패를 통해 배우는 의지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 교육은 신분상승 기회로서도 이미 기능을 못하고, 부의 대물림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학창시절 민주주의를 배워 갈등을 해결하고, 동료를 밟고 가야 할 대상이 아니라 문제를 함께 풀기 위해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 그런데 창조경제에는 이를 풀기 위한 교육이 없다. 창조경제의 성공을 원하는 마음에서 안타깝다. 그래서 믿기 어렵다.

기업생태계의 세대교체가 필요한 시점

앞에서 창조경제가 모호해 진 큰 이유로 공약으로서의 그것이 성공적으로 야권의 공약들을 무력화시킨 결과라고 해석했다. 또 정책으로서의 창조경제에는 기업생태계의 세대교체가 한국경제의 절박한 과제라는 인식이 없다는 점을 문제로 제기했다. 몇몇 늙은 장군들만 분전하고 상도 다 몰아받고 있는 모습이다. 기업상생의 문제를 단순히 거래관계의 공정성 문제로만 보지 말고 새로운 산업, 기업 구조의 비전과 연결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려면 거의 해체에 가까운 재벌구조의 개혁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주역이 바뀐다. 주역이 바뀌는 동안의 혼란을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다면 거꾸로 지금 이대로 가면 살길이 있느냐고 되묻고 싶다. 그 혼란을 줄이기 위해 자본과 노동의 전 사회적 협조와 파트너쉽이 필수적이다. 창조경제의 본래 이름이 ‘스마트 뉴딜’이라고 했다. 미국의 뉴딜을 ‘당시의 대규모 기업집단을 해체에 가까울 정도로 개혁하고 노동권을 획기적으로 강화하여 대신에 노동생산성을 높인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E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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