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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공무원연금, 산재보험이 사회보험 시작
60년대 공무원연금, 산재보험이 사회보험 시작
  • 배준호 한신대 대학원장·경제학
  • 승인 2013.11.08 13: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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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보험은 일정 수준 이상 의료서비스로 국제적 평가 양호…저부담-고부담 구조로 출발, 지속가능성 보완 시급한 국민연금

인류의 삶은 빈곤과의 투쟁이었다. 대항해 시대 이후 나라간 무역이 활발해지기까지 2천여년 동안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국민들의 1인당 연소득이 400달러에서 600달러 수준이었다. 경제발전이 정체된 가운데 많은 이들이 절대 빈곤에 직면해 있었다. 18세기 중반 이후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기운이 서구권 국가와 동아시아 국가 일부에 전파되면서 이들 지역 국민들의 소득이 빠르게 증가하였고(참조글1) 빈곤층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회보험 도입 이전, 다수가 절대 빈곤

오늘날 우리를 포함하여 OECD 가입국(34개국)의 경우 그간의 경제성장으로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사회보험 등 사회보장제도가 충실하여 최저한의 생활유지가 힘든 절대 빈곤에 놓여 있는 이들은 극소수이다. 하지만 상대적 빈곤에 놓여 있는 이들은 적지 않아 나라와 연령대에 따라 30~40%에 달하기도 한다. 따라서 빈곤층과 빈곤율을 논의할 때는 그 대상이 ‘절대 빈곤’인지 ‘상대 빈곤’인지를 명확히 구별하여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절대빈곤은 최저생계비 등(참조글2), 상대빈곤은 중앙소득(median income)의 절반 이하 등 필요에 따라 다양한 기준을 사용하여 측정한다. 주요국에서는 어떻게 하여 상대빈곤층을 줄여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빈곤대책과 복지정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서구 주요국에 비해 식민지 시기를 거치는 등 경제발전이 늦게 시작되어 1960년대 이전까지 국민 다수가 절대 빈곤 상태에 있었다. 조선조 후반까지 국민소득은 연 600 달러 이하에 머물다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시절에 2배 이상으로 커졌다가 해방의 혼란과 한국전쟁으로 2백 달러 수준까지 떨어져 사상 최악의 빈곤 상태에 빠진다. 이후 1960년대 이후 고도성장기를 거치며 소득이 늘고 사회보험도 단계적으로 정비되었지만 주요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뒤진 영역이 훨씬 더 많다.

사회보험 이전의 복지정책 : 16세기의 영국 구빈법 등

‘빈곤’이 일상화한 시대에 동서양의 왕과 귀족 등의 지배층은 가난과 빈곤을 어찌할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홍수, 태풍, 전염병 창궐 등의 재난시 일시적으로 늘어난 피난민과 극빈층을 구제하고 환자를 격리, 치료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했다. 일부는 식료나 음료수 등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제 때 입수하지 못해 아사(餓死)의 위험에 빠지기도 했다. 당시는 의료기술도 발달하지 않았지만 그나마 그 정도의 의료서비스 혜택도 상위 10% 정도가 받을 수 있었을 뿐이다. 그 때문에 당시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35살 정도로 오늘날 선진국 사람들 평균수명의 절반 이하에 불과했다. 가장 발달했다고 하는 지역사회에도 가뭄과 홍수 등의 재난이 빈번하여 사람들은 기근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는 근대 문명 시대 이전의 주요국 사례에 대한 삭스(J. Sachs) 교수(미 컬럼비아대)의 말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얘기였다.

최초의 복지정책은 16세기 후반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체계화된 구빈법(poor laws)과 잉글랜드 지역의 구빈법(1601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법은 2차 대전 후 베버리지 모형에 의한 현대적 복지제도가 도입될 때까지 영국, 미국, 캐나다 등 영미권 복지제도 원형이 되었다. 이 법에 따라 정부는 구빈감독관을 임명하고 지방세 부과를 통해 재원을 확보, 빈곤문제에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사실 빈곤보다 먼저 복지정책의 대상이 된 것은 군인의 부상과 장애였다. 로마시대의 군인연금에 이어 영국 해군의 채덤금고(1590년)와 미 군인연금(1862년) 등이 있다. 국가 주도의 복지정책이 제한적이다 보니 종교기관과 민간조직이 부조 프로그램 운영에 나섰다. 중세 시대 영국 교회 등에서 사용된 퇴직연금 성격의 코로디(corrody), 장인(匠人)조직인 길드, 18세기 이후의 직업· 종교 무관 조직인 우애조합(friendly societies) 등의 프로그램이 있다.

사회보험 도입(1884년) 이후 : 독일

이처럼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도 주요국은 산업생산의 지원에 몰두하면서도 정작 산업의 역꾼인 근로자들의 의료보장, 재해보장, 소득보장 등의 프로그램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식산흥업과 군비증강에 몰두한 나머지 근로자 복지의 정비와 강화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때 서구 주요국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중노동에 노출된 노동자 사회에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때 독일을 통일한 후, 커진 국력을 바탕으로 발언권을 키우고 있던 독일의 수상 비스마르크는 사태의 심각성을 일찍이 깨닫고 선제적 조치에 나섰다. 당시 광부조합, 선원조합, 우애조합 등이 시행하고 있던 ‘공제(共濟)’ 프로그램을 확장하여 국가 전체의 근로자에게 적용키로 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힘을 믿는 우파 정치인이었던 그는 20년 이상의 수상 경력을 십분 활용한 힘있는 연설과 정치력으로 황제와 의원들의 동조를 얻어내 좌파 성격이 강한 제도인 건강보험(1884년)과 산재보험(1885년) 등의 사회보험을 세계 최초로 도입한다. 물론 도입 당시에는 적용대상이 일부로 제한되었으며 이후 시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확대되었다.

독일에서 시작된 사회보험은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대륙 국가는 물론 영국, 캐나다, 호주 등지로 확대되었고 다소 늦지만 미국, 일본 등지로도 전파되었다. 물론 전파 과정에서 나라별로 또 제도별로 사회보험 방식이 아닌 조세방식 등으로 도입된 곳도 적지 않다. 서구에서 사회보험이 확산되고 있을 무렵은 우리에게는 구한말과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강점기 시절이다. 나라 전체가 외세의 각축장이 되어 혼란스럽고 나아가 식민지로까지 전락한 상황이라 근로자와 국민 전반을 위한 사회보험 등의 제도 도입은 꿈꾸기 힘든 상황이었다. 사실 이때까지 우리의 복지정책은 왕실과 그 주변 인사의 질병 치료, 극빈자와 전염병 감염자 등 긴급한 요구호 대상자에 대한 제한적 지원이 거의 전부였다.

이렇게 보면 “가난은 나랏님도 어찌할 수 없다”는 우리의 속담(참조글3)은 가난을 나라의 잘못이 아닌 자신과 가족의 탓과 운명으로 돌려 책임을 면하고 싶은 구 지배층의 생각이 반영된 말일 수 있지만 “빈부격차는 모든 나라가 고민하는 뿌리가 깊고 가장 치명적인 질병이다”는 로마의 역사가 플르타크(Plutarch)의 지적대로 빈곤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국가적 난제였음이 분명하다.

초보적 사회보험의 적용 : 일제강점기

빈곤에 대한 생각은 19세기에 들어오면 확 바뀐다.

“가난한 이들의 불행은 자연 법칙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법제도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우리의 죄가 크다”는 다윈(C. Darwin)의 말이나 “한 사회의 진보 여부는 많이 가진 자의 부를 얼마나 더 늘렸는지로 보지 말고 가장 적게 가진 이에게 얼마나 많이 제공하고 있는지로 판단해야 한다”는 루스벨트(F. D. Roosevelt) 의 인식이 상징적이다.

문명 개화기의 일본 지도자들도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조선총독부는. 강점기 초반 전국에 설치한 자혜의원(훗날의 도립병원)에서 십 수년간 대부분의 환자를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근대식 의료기관에서 서양의술을 배운 일본인 의사들이 수준급의 의료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였으니 사람들의 환심을 샀을지 모른다. 1925년부터 진료가 유료화되면서 환자 수는 크게 준다. 하지만 일본은 자국에는 건강보험을 1927년에 시행하였지만(참조글4) 조선에는 시행하지 않았다. 이유는 기업이나 조합의 보험료 부담과 총독부의 보조금 지원 재원이 여의치 않다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은 기업수가 적고 주민소득도 일본의 1/5~1/7 수준이었다.

공적연금을 통한 소득보장도 초보적인 모습을 선보였다. 총독부의 일정 등급 이상의 공무원에게 지급된 은급(恩給)이 그것이다. 지급대상은 ‘관’ 이상의 상위직 공무원(교원 포함)과 군인, 군속이고 수급을 위한 최단 근속기간이 17년(경찰과 교정직은 12년)이어서 수급자격을 갖춘 이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참조글5)

산재보험도 제한적으로 선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장법(1916년) 시행으로 재해보상제도가 광업(참조글6) 외 다른 산업으로 확대된다. 일본에서도 잘 시행되지 않아 행정당국이 공권력을 동원하는 사례가 많았으므로 한국인에게는 매우 제한적으로 적용되었을 것이다. 체계화된 재해보상이 건강보험법(1927년)에 규정되지만 이 법은 조선에 적용되지 않았다.

1960년 이후 도입된 사회보험의 수준

2013년의 지금, 우리는 외형상 서구국가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는 복지제도와 복지 행정을 전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 하나 꼼꼼히 따지고 들어가면 우리의 복지 수준이 크게 뒤져 있는 곳이 적지 않다. 다소간의 주관적 평가를 덧붙여 복지를 분야별로 주요국의 그것과 비교해 보자.

▲ 1961년 공무원연금이 사회보험의 효시지만,일반 국민 대상으로 한 사회보험의 출발은 1963년 광업 분야의 산업재해근로자 보상을 위한 산재보험이었다. 사진은 1960년대 광부들의 생생한 삶을 엿볼 수 있는 강원 영월군 마차리 탄광문화촌. 제공=뉴시스
주요국 평균 수준에 근접해 있거나 약간 뒤진 분야로 장애인, 의료체계와 건강보험(의료급여 포함), 재해보상과 산재보험, 고용보험, 국민기초생활보장 등을 꼽는다면 꽤 뒤져 분발해야 할 분야로 국민연금-기초노령연금의 노후소득보장, 건강증진과 정신보건, 노인장기요양보험과 노인복지, 출산과 보육·아동복지, 긴급복지지원과 부랑인·노숙인 보호, 식품·의약품 안전과 유통 등이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5대 사회보험 중 제도의 정비와 관련 행정의 개선에 매진해야 할 분야로 국민연금-기초노령연금, 노인장기요양보험이 거론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1년 단위로 예산을 편성하여 운영하는 기초노령연금 및 노인장기요양보험과 달리 국민연금은 100년 이상의 장기에 걸쳐 제도를 설계, 운영해야 하는 보험이어서 가입자와 수급자, 공익대표 등 이해관계자간의 대화와 타협을 통해 제도를 개선해야 하므로 많은 시간과 품이 소요된다.

복지정책과 우리 헌법

복지정책의 큰 그림을 헌법에서 찾아보자. 제헌헌법(1948년)을 위시한 네 차례의 개정헌법에는 ‘복지’라는 용어가 없다가 1963년 12월의 5차 개정 헌법(제30조 제2항)에 “국가는 사회보장의 증진에 노력하여야 한다” 라는 표현으로 ‘사회보장’이 규정된다.(참조글7) 1980년 10월의 개정 헌법(제32조 제2항)은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 사회복지가 사회보장과 병렬적인 개념으로 도입되어 제헌헌법 이후 32년 만에 일본 헌법과 비슷한 내용을 규정하게 된다. 1988년 2월의 개정 헌법에는 복지 관련 조항이 세분화되어 제 34조에 여자, 노인, 청소년, 신체장애자, 질병노령 등 생활무능력자 등에 대한 국가의 보호 노력과 의무가 새롭게 추가된다.

이처럼 우리는 ‘사회보장’의 개념을 먼저 받아들이고 이후에 ‘사회복지’ 개념을 규정하였다. 사회보장의 경우 정부가 법제를 정비하고 공권력으로 집행을 강제하면 예산 투입을 최소화하면서 다양한 ‘보장제도’를 운영할 수 있는데 비해, 사회복지는 많은 경우에 정부가 예산을 편성, 주도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제공 급여의 많은 부분이 인적서비스이거나 이와 연관된 내용이어서 예산 마련과 인프라 정비에 시간이 소요되어 늦게 주목하였는지 모른다. 실제로 그간의 복지정책은 돌이켜 보면 크게 보아 사회보험과 기초보장으로 대표되는 사회보장 관련 정책이 먼저 시행되고 이후 아동, 여성, 노인, 장애인 대상의 각종 사회복지(서비스) 정책이 시행되었다.

5대 사회보험의 도입배경과 현황

5대 사회보험의 국내 도입배경과 경과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 국내 복지정책의 효시인 공무원연금(1961년)은 1963년 개정헌법보다 먼저 도입된다. 국가공무원법(1949년)에 관련 내용이 일찍부터 규정되어 있었는데 한국전쟁 등의 혼란으로 인해 법제화가 늦어진 것이다. 다만 공무원연금은 도입시에는 사회보험 형태로 인식되었는데 이후 법개정 과정에서 변질되면서 최초의 사회보험이라고 말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보기에 따라선 산재보험(1964년)이 사회보험 형태의 최초 복지정책이라고 할 수도 있다.

공무원연금의 도입과 관련 실무를 주도한 이들은 국무원 사무국 인사과의 해외 연수파 공무원들이었다. 이들은 공무원연금을 사회보험으로 규정하고 수급자격을 엄격히 규정하여 연금재정의 방만한 운영을 사전에 예방, 제도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평균수명이 40대 초반이던 시절에 연금수급개시연령을 60세 설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서구 국가와 일본 등의 제도를 참고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도외시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법 제정후 2년이 되지 않은 1962년 1월, 수급개시연령은 퇴직후 즉시 수령으로 개정되었다. 이후 30여년간 수급요건 완화와 급여 충실화 등 지속가능한 사회보험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공무원연금과 정반대로 설계된 것이 국민연금(1988년)이다. 도입 당시 국민과 정치권의 수용성만을 염두에 두고 ‘저부담-고급여’ 구조로 발족시켰다. 제도 설계를 주도한 이들은 한국개발연구원(KDI) 전문가와 보건복지부 관료였지만 정치권의 주문에 밀려 이같은 형태가 되었다. 1998년과 2007년의 개혁으로 급여수준을 대폭 인하, 가입자의 신뢰를 잃었지만 여전히 제도의 지속가능성이 약해 지속적 보완이 필요하다. 장기보험의 특성을 무시하고 제도를 설계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산재보험(1964년)은 단기보험으로 일찍 도입되어 재해근로자와 그 유족의 생계를 지원해주고 있다. 물론 재해율이 주요국의 3,4배 수준으로 높은데 급여수준이 높아 보험료가 사업주에게 부담이 되고, 재해발생율이 높은 사업장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낮은 점 등은 개선이 필요하다. 산재보험 도입에 공이 큰 인물로 홍종철 전 교육부장관(참조글8)이 있다. 그는 30대 후반의 나이에 국가재건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산재보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실무 작업을 진두 지휘했다. 그 역시 미국 유학경험이 있는 해외연수파였다.

건강보험(1977년)은 단기보험으로 도입 후 10년만에 전국민을 적용대상으로 포괄하였고, 가입자 부담을 낮게 유지하면서 일정 수준 이상의 의료서비스를 제공, 국제적으로 평가가 양호하다. 전국민이 동일한 건강보험을 적용받으며 단일보험자인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관리하고 있다. 의료전달체계 미확립으로 의료자원이 낭비되고 보장성이 낮아 본인 부담이 크지만 이는 준법정신 및 도덕적 해이와 연관이 깊어 시간을 두고 개선해야 할 문제다. 다만 의료급여의 경우 도덕적 해이와 희귀난치병 치료의 무절제한 허용에 따른 의료자원 낭비가 심각하다.

의료보험 조합의 통합에 기여한 이로 천명기 전 보건사회부 장관이 있다. 그는 관료와 기업인 경험을 지닌 야당 국회의원 출신으로 당의 사회복지분과위원장을 맡은 바 있다. 1980년 9월 최규화 정부에서 장관이 된 후 보건사회부 주요 공무원과 달리 조합의 통합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이는 20년 후의 통합으로 이어지는 첫걸음이 되었다.

고용보험(1995년)은 단기보험으로 무난히 운영해 오고 있는데 실업급여 보험료가 발족 후 2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은 설계시 보험료가 잘못 책정되었음을 시사한다. 실업급여의 지급기간과 지급액은 주요국에 비해 여전히 약해 개선할 필요가 있다. 고용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 이원화된 관리도 재검토가 필요하다.

노인장기요양보험(2008년)은 단기보험으로 발족 후 일천하지만 서비스 수혜자가 전체 노인의 6% 정도에 불과하고 장기요양기관이 난립하여 서비스 수준이 떨어지며 재원이 비효율적으로 지출되는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노인인구의 빠른 증가에 대비하여 장기요양기관을 재정비하고 서비스 전달체계를 재확립해 재원지출의 효율성을 높여야 할 것이다.

약자 지원하는 사회보험과 복지정책이어야

공무원연금을 필두로 한 사회보험과 복지정책의 시행 이후 52년이 경과하고 있다. ‘빈곤은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법제도 때문’이며 ‘사회의 발전은 적게 가진 이에게 얼마나 제공했는가로 판단해야 한다’는 다윈과 루스벨트의 지적에 비추어 볼 때 그간의 법제 정비와 복지 행정에 문제가 없는지 점검할 필요성이 크다. 공무원과 교원 등 기득권층 지원에 쓰이는 연금이 복지정책과 복지예산으로 잡히고 의료인과 약업인의 소득을 늘려 빈부격차를 확대하는 의료정책과 건강보험 정책이 적지 않다. 사회보험 등의 복지정책과 복지예산이 약자 지원에 집중되어 ‘허울이 아니고 명실상부’한 정책과 예산이 되도록 바로잡고, 엉뚱한 곳으로 지출되는 복지재원의 낭비를 최소화해야 한다. E21

참조글 모음

1) 네덜란드 그로닝겐대 명예교수인 매디슨(A.Maddison)이 1999년에 발표한 논문(Poor until 1820)에 제시된 내용임.

2) 국제연합(UN)은 하루 1.25달러(연 456 달러) 이하 생활자를 빈곤인구로 정의. 국제연합개발계획(UNDP)등은 수입기준 외에 사망률, 식자율 등을 추가로 고려하여 빈곤층을 정의.

3) 독일에는 “부자 영주밑에 있으면 떨어지는게 많다”는 속담이 있음. “Grosse Herren lassen sich nützen unter reichen Fürsten ist gut sitzen”.영주가 관내 주민의 생활에 신경을 써 여유있는 영주밑에 사는 주민들의 삶이 풍요로워 질 수 있다는 것으로, 우리말 속담이 시사하는 ‘나랏님 따로 주민 따로’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음.

4) 초기에는 상시근로자 10인 이상 사업장이 대상이고 1934년에 5인 이상으로 확대.1938년에 지역가입자와 자영업자 대상의 건강보험(임의조합) 도입. 1943년경 전 일본인의 70%가 건강보험 적용.

5) 상세한 서술은 보험미래포럼(2010) 『연금의 진화와 미래』 논형, pp.75~78 참조.

6) 일본에서는1890년에 민간부문에서 광업조례가 제정되어 사용주가 재해근로자에게 소정의 의료비와 휴업중의 일당, 유족수당, 장애보조금 등 지급. 이 조례가 광업법(1905년)에서 법제화된 부조제도로 발전함.

7) 1946년 11월에 공포된 일본국헌법(1947.5.3 시행)제 25조 제2항은 “국가는 모든 생활측면에서 사회복지, 사회보장 및 공중위생의 향상과 증진에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 이 때부터 일본에서는 ‘사회복지’와 ‘사회보장’을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음.

8) 서울대 상대 수료(1948년) 후 육사 졸업(1950년, 8기). 미국 유학(1953년, 육군포병학교 고등군사반)후 제6군단 포병대 지휘관(대령)으로 5.16 쿠데타에 참가하였으며 육군준장으로 예편. 국가재건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장(1961년), 대통령 초대 경호실장(1963년), 문교부장관·문화공보부장관(1964년)을 지냄. 

본 기사는 월간지 <이코노미21> 9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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