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16:14 (목)
한국 사회적경제·기업과 협동조합의 출발점
한국 사회적경제·기업과 협동조합의 출발점
  • 이문국 신안산대 교수
  • 승인 2014.02.13 10: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회적경제 특집6-자활사업과 사업적경제> 재활용, 집수리 청소 분야 중심으로 대안경제틀 조직화 추구…지역자활센터들 ‘사회적경제개발센터’로 새로운 전환 모색

최근 몇 년 우리 사회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생소한 기업조직체 용어들이 혼란스럽게 넘쳐나고 있다. 사회적기업, 예비 사회적기업, 부서형 사회적기업, 마을기업, 커뮤니티 비즈니스, 사회적협동조합, 농어촌공동체회사, 자활기업 등 유사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것 같기도 한 소위 사회적경제 지향 단위조직체들이 크게 차별성 없이 유령처럼 거리와 언론을 뒤덮고 있다. 그것도 민간단체가 아닌 중앙정부나 지자체가 앞장서서 경쟁적으로 이러한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이제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새로운 고용-복지 담론으로 사회적경제라는 존재가 명백히 자리 잡아가는 추세이다.

여기에는 분명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의 공존이라는 이중성이 존재한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사회적경제의 만연에 관한 이중적 성격 논쟁과 규명이 본래 목적이 아니다. 다만 적어도 긍정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현상을 검토한다면 우리 사회에 경제공동체 지향 사회적경제 조직체들이 분수처럼 사회전반에 뿌려져 여기저기 회자되게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실체는 명백히 자활사업과 그 수행 인력들이었다고 단언해본다.

이러한 주장에 관한 논거로서 자활사업의 형성 이전과 이후 그리고 제반 사업전개라는 역사적 고찰을 통해 자활사업이 사회적경제라는 담론을 우리 사회에 어떻게 심도 있게 형성하고 설파하는데 영향을 미쳤는지 본격적으로 조명하여 밝히고자 한다.

1. 자활사업과 사회적경제와의 관계에 관한 사적 고찰

1) 시범 자활사업 이전 단계 : 1995년 이전 생산공동체운동시기

1996년부터 시범 자활사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작은 가시적인 계기일 뿐 국가 시범사업의 형태로 체제내로 제도화되기 이전부터 자활사업은 긴 호흡을 가지며 존재해 왔었다. 1990년대 초 제도화 이전 자활사업은 70-80년대 민주화운동을 수행했던 도시재개발 지역의 민중교회가 거점이 되어 빈민지역운동의 연장선에서 진행되었다.

당시에는 자활사업이라고 불리지 않고 여러 다양한 빈민지역운동 중에서 ‘생산공동체운동’이라고 불렸다. 빈곤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거주했던 주민활동가들은 지역주민들이 겪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불합리한 하청구조에서 오는 경제적 불이익을 극복하고자 고민했다. 동시에 민주적인 의식과 공동체적 품성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대안적 틀로서 서구에서 노동자협동조합으로 소개된 생산공동체 모델에 적극 주목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도시재개발을 위한 철거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던 빈곤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사회참여에 관심 있는 목회자가 육체노동을 더불어 수행하였고 이를 본격적으로 생산공동체운동이라고 지칭하였다. 생산공동체운동은 단순하게 가난한 사람들의 먹거리를 해결하는데 그치지 않고 물질만능으로 우상화된 병든 사회를 치유하고자 하는 변혁적 사고를 지향하고 있었다. 즉 빈민지역운동의 궁극적 관심인 주민 의식화와 조직화를 도모하여 주민정치력을 가일층 고양하고자 했다. 이러한 주민들의 힘과 의지를 바탕으로 야수의 얼굴을 가진 천민자본주의를 인간 친화적 제도로 바꾸고자 희구하였다.

이러한 소망을 담은 변혁의 도구이자 모델로 선택된 것이 스페인 몬드라곤의 협동조합복합체였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하는 사람이 노동 자체와 노동과정에서 소외되지 않으면서도 생산적 효율성을 극적으로 높일 수 있다는 서구사회의 성과가 80년 말부터 90년 초에 걸쳐 우리 사회에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2년 번역된 몬드라곤 복합체의 사례는 빈민운동 진영에 대단히 고무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다양한 네트워크로 연결된 민중교회 지도자들은 함께 모여 공동 학습하였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내부적으로 결의하였다.

이러한 결의를 토대로 각자의 교회가 위치한 도시재개발 지역사회에서 생산공동체운동을 전개하였다. 주로 도시재개발사업이 진행 중이던 철거지역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제도화 이전 단계의 자활사업이 도시 지역공동체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상호 소원한 채로 무관심하게 원자화되어 파편적으로 살아가는 거대도시에서 생산 활동을 매개로 주민 상호간에 깊은 유대감을 교류하고, 보다 긴밀한 관계를 나누는 생활공동체 형성을 추구했다. 흔히 대안경제 혹은 사회적경제라고 지칭되는 새로운 인간 중심의 경제공동체를 우리 사회에 접목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의 운동이었다고 21세기 현재적 관점에서 평가된다.

▲ (협)한국협동조합창업경영지원센터가 2013년 7월 3일(재)중앙자활센터, (사)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와 MOU를 맺고 협동조합창업·자활기업의 협동조합전환 사업을 돕기로 했다. 업무제휴 첫사업으로 이날부터 3일간 자활-협동조합 창업스쿨을 개최해 전국에서 참여한 자활공동체 참여자와 지역자활센터 직원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며 하반기부터는 지원센터가 전국의 지역자활센터를 순회하며 협동조합으로 창업하거나,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는 자활인에게 협동조합교육과 상담,컨설팅 기회를 제공했다. 사진=한국협동조합 창업경영지원센터/뉴시스
이러한 정신과 철학이 전제된 상태에서 비정부단체(NGO)로 지칭되던 민중교회나 사회운동단체가 생산활동과 사업을 매개로 과거 적대시하던 정부와 결합하는 새로운 민관협력모델의 결실이 90년대 중반 이후의 시범 자활사업이었다. 이러한 정부기관과의 상호 관계를 이들은 스스로 '창조적 긴장관계'라고 명백히 정립했다. 새로운 세상을 열기위해 관변조직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되 결코 관에 대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겠다던 이중적 입장을 절충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 건설일꾼 두레의 조직화

도시 생산공동체 운동의 시원적 형태로 평가받는 지역사회 주민조직체는 1990년에 출범한 '건설일꾼 두레'였다. 건설일꾼 두레는 1974년부터 강북 산동네인 하월곡동에 민중교회를 세우고 빈민운동을 전개한 H목사가 해당 지역 건설일용직 노동자들을 모아서 만든 건설 생산공동체였다. 출범 전 해인 1989년 H목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과 자신의 교육받은 중산층 성직자의 삶 사이에 큰 괴리감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서슴없이 목사직을 교단에 반납하고 건설노동자의 삶을 시작하였다 -당시 모 월간지에서는 H목사를 달동네 망치 든 예수라고 인물평을 했다. 그는 생산의 주체인 민중에 대한 경외심과 기득권자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막무가내로 생산 활동에 몸을 던졌다고 훗날 진술했다. 처음에는 무척 외롭고 고통스러우며 생존의 위협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전체가 모두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공동체를 형성하여 더불어 사는 것만이 우리 사회의 총체적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그는 생활 기반 활동 속에서 체득했다.

그는 건축현장의 모순과 극단적인 노동강도에 비해 형편없이 부족한 임금수준은 개인적 분노의 감정을 넘어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느끼게 되었다. 그 불합리성의 원인을 건설시장의 복잡한 다단계 하청구조에 있다고 스스로 진단하였다. 이러한 왜곡된 하청 고리를 최소화하여 발생한 잉여이익을 건설노동자들이 공유한다면 소득이 훨씬 향상되리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제대로 된 건설 자재를 사용하면 올곧은 건축이 가능하리라고 판단했다. 건축주인 중산층 건축소비자에게도 이익이 되는 모범을 우리 사회에 가시화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이에 따라 H목사는 함께 일하던 건설노동자들과 함께 '건설일꾼 두레'를 조직하였다.

H목사는 스스로 이러한 활동에 대해 사회운동의 새 지평을 여는 활동이라고 의미 부여했다. 그는 이 신사회 운동(neosocial movement)의 과제와 전망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째, 나태와 무능으로 낙인이 찍힌 가난한 사람들의 참 명예를 회복하고자 했다. 둘째, 만성적 불안정 고용으로 인한 빈곤의 악순환을 스스로 극복케 하는 빈민의 주체적 해결을 도모하였다. 셋째, 신뢰와 성실을 바탕으로 건설업에 임하여 중산층에 봉사하고 그들과 함께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였다.

넷째, 이 모범을 확대하면 한국의 산업구조를 혁신적으로 변모시킬 것으로 전망하였다. 현실은 이러한 장밋빛 전망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건설일꾼 두레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심각한 경영상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변화를 통해 중산층을 시민사회운동의 동인에 끌어들여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삶의 질을 고양하려던 원대한 꿈과 사회계획은 이러한 현실적 어려움으로 주춤하게 되었다.

- 몬드라곤 사례의 전파와 노동자협동조합 운동의 전개

두레라는 단순한 하층노동자 지역모임 수준의 생산공동체 방식에서 법인격이 부여된 본격적인 생산조직체(productive organization)로의 틀을 갖추게 되는 계기는 스페인 몬드라곤의 협동조합복합체가 알려지면서 부터다. 1992년 이후 빈민운동 진영에 생산자협동조합의 변혁적 가능성이라는 일치된 강력한 담론이 형성되면서 생산공동체운동은 빈곤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실험적 확산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우리 사회에 두레공동체의 단순 주민모임 차원과 노동자협동조합이라는 공식 경제조직체의 형성에 중간 가교 역할을 수행한 것은 1991년 ‘월곡여성생산공동체’였다. 이후 본격적인 노동자협동조합의 결성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1992년 대한성공회 나눔의집(Sharing House)의 진보적 젊은 사제들이 중심이 되어 봉제노동자협동조합인 ‘실과 바늘’, 건설노동자협동조합인 ‘나섬건설’을 조직하였다. 1992년에는 도시 건설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한 ‘마포건설’이 발족했다.

1994년에는 각기 따로 설립했던 건설일꾼 두레와 ‘나섬건설’이 발전적 해체를 거쳐 하나의 건설노동자협동조합인 ‘나레건설’을 설립했다 -나섬건설의 ‘나’와 건설일꾼 두레의 ‘레’를 각각 따서 ‘나레’라고 명명하였다.1995년 여성노동자회의 출자로 설립된 인천 봉제노동자협동조합인 ‘옷누리’와 구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수행했던 여성봉제노동자들이 봉제노동자협동조합인 ‘한백’이 구로공단지역에서 출범했다. 재개발 지역에서 주민 주체적 역량으로 탄생한 새로운 도시재개발 모델인 행당동 가이주 단지인 철거주민 마을공동체 내에 ‘논골의류협동조합’이 생겨났다. 이처럼 90년대 초에 나타난 진보적 사제 중심의 노동자공동체나 노동자협동조합이 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다양한 인적자원과 지역사회로 급속히 전파되어갔다.

이상과 같은 대안 경제 질서의 구축과 같은 거대담론이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실현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사회를 건강하게 변화시키려는 생산공동체운동 참여자들의 진정성과 강력한 도전 의지에 비해 현실적 여건은 매우 취약하였다. 첫째, 노동자협동조합에 참여 중인 지도자를 포함한 전체 조합원의 기술력, 경영능력, 지도력이 공통적으로 부족했다. 둘째, 산동네 하층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조합원을 구성하다보니 선택 가능 업종이 집수리, 봉제, 단순가공업 등으로 제한되었다. 셋째, 산동네주민과 민중교회 목회자가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기 때문에 인적·물적 자원동원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자본주의 대안 운동이라고 내세웠지만 역설적으로 숙달된 전문 기술자, 조직 전체를 관리하는 유능한 경영자, 재정동원능력을 갖춘 자본가가 필요하다는 다소 모순적인 벽에 부딪혔다.

2) 시범 자활사업 단계 : 1996-1999년

1996년 자활사업은 마침내 시범사업으로 출범한다. 불과 5개의 지역자활센터가 법적 근거도 갖지 않은 채 시범적으로 운영되는 것이었지만,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후 자활사업의 역사는 근로연계복지의 역사가 되었고, 사회적경제의 물적 토대를 닦은 역사가 되었다. 특히 동아시아 복지국가가 갖는 특수한 사례로서 해외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게다가 자활사업은 적대적 관계였던 정부와 민간 NGO 부문이 국가 정책의 영역에서 조직적으로 파트너십을 형성한 최초 사례이기도 했다. 자활사업은 1996년에서 1999년까지는 시범사업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 지역자활센터의 실무자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자활운동’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스스로에게 ‘자활활동가’라는 정체성을 부여했으며, 단순한 탈빈곤 활동이 아니라 주민 중심 협동조합을 조직하는 활동으로 자신들을 규정했다.

시범사업 실시에 관한 사회정책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93~4년을 전후로 전술했던 생산공동체를 통한 탈빈곤 노력들이 언론에 다소간 소개되면서 우리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학계에서도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개발독재시기에 미흡했던 국가복지의 개선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던 당시 김영삼 정부는 생산공동체운동에서 새로운 빈곤복지정책 아이디어를 얻고자 했다. 생산공동체운동 진영 역시 생산공동체의 자생적인 조직화를 통한 탈빈곤 활동에 물적 인적 자원의 동원에 일정한 한계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학계 및 정부의 관심에 일정 부분 호응하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부는 사회복지정책의 이념과 목표를 ‘삶의 질 세계화’로 설정했다.

이를 위한 추진동력으로서 국민복지기획단을 창설하였다. 국민복지기획단의 회의에 건설노동자협동조합 나레건설을 창업했던 S신부 등이 NGO 대표로 참석해 빈민지역에 생산공동체운동의 필요성에 관한 의제를 발표했다. 이는 제도정치권의 공식회의에 빈민운동 지도자가 참여한 최초의 사례였다. 당시 발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혜가 아닌 참여를 제공하는 복지로 복지의 개념을 변화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내야 한다. 둘째, 빈민지역 활동가와 단체들의 잠재력과 헌신성을 인정하고 민관협력체계를 갖춰야 한다. 셋째, 고용과 교육활동을 함께 펼쳐나갈 지역공동체 시스템을 개발해야 한다. 넷째, 지역자활센터는 협동조합운동을 지원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자활사업은 1996년 2월에 자활지원시범사업으로 출발을 하게 된다. 당시 자활사업은 생활보호법에 따른 자활보호제도와는 독립된 차별적 지위를 가졌다. 자산조사를 하지 않았고 지금으로 해석하면 차상위 이상의 빈곤층 밀집지역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일자리나 훈련기회를 제공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 일본노동자협동조합연합회와 교류

1990년대 생산공동체운동을 전개하던 빈민운동단체들은 자활사업 이전 시기부터 일본노동자협동조합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시범 지역자활센터 실무자들은 1997년 일본노동자협동조합연합회를 방문하여 이들의 사업방식과 경험들을 배우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노동자협동조합들은 특별한 기술이 없고 고령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업을 주력으로 추진하고 있었으며 각 사업단들이 상당한 규모로 안정된 운영을 하고 있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시범 지역자활센터에게 일본의 사례는 간접경험을 할 수 있는 좋은 본보기였다.

- 특별취로사업의 도입

열악한 사업 환경과 경험부족으로 인해 당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초기 시범 지역자활센터들은 특별취로사업의 도입으로 자활사업이 보다 활성화 되는 일대 전기를 맞았다.

특별취로사업을 활용하여 생산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었으며, 시장영역(제1섹터) 뿐만 아니라 새로운 영역(제3섹터)에서 유용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계기와 다양한 사업 아이템 들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자활프로그램 측면에서 볼 때 특별취로사업은 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자활근로사업과 자활공동체로 발전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영리형 사업들이 시장형자활근로 ·자활공동체·노동통합 사회적기업의 모델이 되었으며, 비영리 공익추구형 사업들은 사회서비스일자리 자활근로·사회서비스 사회적기업의 형태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3) 자활사업 제도화 이후 단계: 2000-2013년 현재

근로능력 있는 조건부 수급자 문제를 해소하고자 2000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입과 함께 시범사업의 꼬리표를 떼고 자활사업은 공공부조제도의 전면에 나선다. 제도화 단계의 자활사업은 근로연계복지의 성장과 관련해서 우리 사회에 중요한 함의를 갖게 된다. 그것은 독특한 한국판 근로연계복지제도를 특징짓는 계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즉 미국처럼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 중 근로능력자에게 근로의무를 조건으로 부과하였지만, 동시에 유럽과 같은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보다 강화하고 제도 내면에 사회적경제의 요소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활사업이 처음부터 근로연계복지제도의 성격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노동자협동조합 또는 생산공동체 이념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활사업의 제도화는 분명 근로연계복지제도를 강하게 지향하고 있었으며, 기존 자활사업의 수행방식을 변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전의 지역자활센터가 도시의 저소득층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미취업 도시빈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인하고 생산공동체를 설립하는데 초점을 두는 방식이었다면, 제도화 이후의 자활사업은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 중 미취업 근로능력자를 대상으로 취·창업을 촉진하는 방식을 의미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점은 참여의 자율성과 프로그램의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제도화 이전의 자활사업은 자율성과 사회적경제로의 지향성이 강했지만, 제도화 이후의 자활사업은 타율성과 근로연계복지로의 지향성이 보다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또 다른 특징은 제도화 이전에 잠재되어 있던 사회적경제에 대한 지향성 차원이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이한 해석이 가능하다. 한편으로 자활사업은 제도화 초기단계에서 이미 사회적경제로의 지향을 상당부분 상실했다는 비판이 가능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활사업의 양적 확대과정에서 사회적경제로의 도약에 필요한 기본 토대를 구축했다는 평가 또한 가능했다. 여기서는 일단 후자의 입장에 중심을 두고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자활사업의 제도화는 사회적경제의 맹아적 발전에 다음과 같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 자활사업 제도화는 자활사업의 양적 확장을 통해 많은 비영리민간단체를 사회적경제로 인도하는데 결정적인 매개자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2000년 이전 자활사업을 수행했던 비영리민간단체(지역자활센터)는 20개소에 불과했지만, 2003년에는 242개소로 확장되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실무자도 약 2천 명으로 증가하였고, 사업참여자 또한 약 1만 명을 초과하게 되었다. 이는 자활사업이 우리 사회에 사회적경제로의 이행에 필요한 다양한 토대를 구축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적 토대를 제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실제로 자활공동체 사업은 그 공과에 대한 다양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마이크로크레디트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사회적 일자리나 사회적기업의 성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둘째, 자활사업의 제도화는 근로연계복지에 대한 비판적 경험을 통해 사회적경제의 필요성을 보다 절실히 확인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자활사업은 사회적경제를 본격화하고 제도화하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그것은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자활공동체는 사회적기업이나 마을기업 혹은 사회적 협동조합과 동체이형이다. 실제 2004년경 자활공동체를 사회적기업으로 개명하려던 시도가 있었다. 둘째, 자활사업은 지역 기반형 일자리 창출사업이라는 점이다. 이는 자활사업이 미취업빈곤층에게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지역사회 취약계층에게는 다양한 사회서비스를 공급하는 형태로 이미 사회적경제에 기반한 사업방식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활사업에 대한 성과평가지표 중에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가 포함되어 있었던 점과 무관하지 않다. 셋째, 자활사업은 초기 취약 마이크로크레디트 혹은 신용협동조합의 설립을 고려하고 있었다. 최근 자활협회가 중심이 되어 각 개별 지역자활센터가 주도적으로 지역 단위에서 창업했던 주민금고들의 연합체 성격을 띤 자활공제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 자활사업과 사회적기업

한국에서 제도화된 인증 사회적기업의 등장은 2007년부터 시행된 ‘사회적기업육성법’에 기반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사회적기업의 역사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자활사업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자활사업을 기반으로 한 조직인 자활공동체는 종종 학술 논문이나 정부 및 시민사회의 정책 속에서 사회적기업으로 표현되어 왔었다. 2005년 정선희가 펴낸 『한국의 사회적기업』에는 모두 12개의 사회적기업이 소개되었는데, 이 중 10개가 자활공동체였으며 나머지 2개도 지역자활센터 또는 지역자활센터를 운영하는 모법인에서 조직한 사회적기업이었다. 역시 2005년 한상진의 『시장과 국가를 넘어서-사회적기업을 통한 자활의 전망』도 자활공동체를 사회적기업 모델에 근거해 운영 상황을 살펴보고 전망을 제시했었다.

지역자활센터와 자활협회의 사회적기업에 관한 노력은 보다 직접적이었다. 지역자활센터들은 자활근로사업단이나 자활공동체의 운영 속에서 사회적기업의 내용을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각 지역에서 사회적기업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려 토론회나 세미나를 조직하기도 했다. 자활협회 부설조직이었던 ‘자활정보센터’는 기관 영문 이름을 아예 ‘social enterprise development agency(약칭 SEDA)’로 정하는 등 출발부터 사회적기업을 조직하고 지원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표명했다. 자활정보센터는 지속적으로 사회적기업을 소개하고 그 의미를 황무지였던 우리 사회에 설파했다. 특히 2005년부터 착수된 정부의 사회적기업의 제도화를 위한 시도에 적극 개입해 문제 제기를 했으며, 각종 워크북이나 사례보고서를 펴냈다. 2008년에는 유럽의 사회적경제를 분석한 『The Third Sector In Europe』을 『세계화 시대의 새로운 복지』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하기도 했다.

자활사업과 사회적경제와의 긴밀한 관계를 명확히 하고자 자활정보센터의 후신인 자활협회 부설 자활정책연구소에서는 2010년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 2011년 자활소개 영문판『Social Economy Movement In Korea: Focused on Self-Sufficiency Project』, 2012년『사회적경제와 자활기업』을 연이어 출간하였다. 자활정보센터나 자활정책연구소 뿐만 아니라 순수 자활협회 차원에서도 사회적기업 제도화와 확산에 보다 노력했다. 2005년부터 시작된 사회적기업과 관련한 시민사회진영의 조직적 대처에 적극 참여했다.

2006년에는 복지부에 사회적기업과 관련한 법을 만들 것을 선도적으로 제안했었다. 당시 지역자활센터들은 자활공동체를 좀 더 규모화하고 기업에 준하는 형식을 갖춰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을 사회적기업으로 구상했었다. 사회적기업육성법의 시행을 앞두고는 자활협회 차원에서 사회적기업 모델에 대한 현장 교육 작업을 실행하기도 했다.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격적으로 사회적기업이라는 조직적 실체를 만들어내기 위한 지역자활센터와 자활협회의 노력이다. 가령, 대표적인 사회적기업 중 하나로서 자활근로사업단을 모태로 하는 ‘(주)컴윈’은 컴퓨터를 재활용하는 사회적기업이다. 시흥과 안산의 지역자활센터가 컨소시엄으로 구성한 (주)컴윈은 자활협회의 주도적인 노력 속에 전국의 각 지역자활센터와 협력 시스템을 구축해 폐컴퓨터를 확보했다. 이와 더불어 자활협회는 삼성전자와 ‘소형폐가전재활용협약’을 맺어 컴윈을 지원했다. 또한 협회의 부설기관인 경기광역자활센터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지역자활센터 간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경기광역자활센터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탄생한 또 다른 사회적기업으로는 폐자원재활용 사회적기업인 ‘(주)에코그린’과 청소분야의 사회적기업인 ‘(주)함께일하는세상’이 있다. 사회적기업인 한국자활중앙물류는 집수리 분야의 자활공동체들이 연계해서 집수리 분야의 물류 사업을 조직하는 활동이 기반이 되어 사회적기업으로 전환했다. (사)부산돌봄사회서비스센터는 부산의 지역자활센터들이 연계해 조직한 광역자활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기업이었다. 청주의 사회적기업인 ‘삶과 환경’과 ‘미래 ENT’는 지역 내 각급 시민조직과 연계해 탄생했다. 일부 사회적기업들은 지역지역자활센터-지자체-기업의 3자 협력모델을 기반으로 하기도 한다. (유)나눔푸드, 행복나눔푸드와 같이 SK의 ‘행복을 나누는 도시락’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기업들이 그 사례이다.

사회적기업은 단순히 가치 있는 활동을 하는 기업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사회적 가치를 갖는 활동을 당연히 해야 하지만, 조직 과정도 철저히 사회적이어야 했다. 더 나아가 운영 과정도 일관되게 사회적이어야 했다. 지역자활센터와 자활협회는 한국에서 사회적기업을 제기했고, 직접적인 조직화를 위한 실천을 선도했으며, 모델이 되는 사례들을 조직해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자활사업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적기업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법 제정 후 3년이 지난 2009년까지 정부로부터 인증을 받은 사회적기업 251개 중 자활 공동체나 자활근로사업단에서 사회적기업으로 전환한 사례는 모두 61개로 전체 사회적기업의 1/4인 24.3%를 차지했다. 지역자활센터를 운영하는 모법인에서 사회적기업으로 인증 받은 사례를 포함하면 그 수는 보다 많아질 것이다.

-자활사업과 대안경제기업의 조직화

일부 업종에서는 사업단의 직접적인 조직화를 통한 대안경제의 추구가 꾸준히 모색되었다.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사)재활용대안기업연합회’이다. 폐자원을 재활용하는 자활사업단들 간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본 연합회는 초기부터 전략적으로 추동이 된 조직이다. 지역자활센터들 중에서도 실업운동조직을 모법인으로 하는 기관들이 주가 되었으며, 상호 활발한 교류가 조직이 태동되는 근원적 자산으로 작용했다. 자활협회 차원에서도 활발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은 2005년에 재활용사회적기업연합회를 구성했으며, 2006년에는 (사)재활용사회적기업연합회로 전환하고 2008년에 (사)재활용대안기업연합회로 전환했다.

2004년에 주거복지센터협의회 준비회가 설립되면서 모습을 드러낸 집수리 영역의 (사)주거복지협회도 대표적인 대안경제 표방 조직이었다. 집수리 영역은 현물 주거급여로 인해 사업적 기반이 다소 안정되어 있었다. 여기에 기업 사회공헌활동과의 연계도 활발했었다. 자활사업단의 숫자도 많았고 사업단들 간의 네트워크도 활발했었다. 자활공동체 중 가장 많은 업종이 집수리 영역이기도 했다. 지역자활센터의 활동가들은 이런 점을 활용해서 집수리 영역을 통해서 빈곤층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적인 모색을 도모했었다. 그 결과 탄생한 개념이 ‘주거복지’나 ‘에너지복지’라는 개념이었다.

정책적인 모색 뿐 아니라 조직적인 결사의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 그 결과가 2004년에 설립된 주거복지센터협의회 준비회이다. 주거복지센터협의회 준비위원회는 이후 집수리자활공동체협회와 집수리자활공동체연대를 거쳐 2009년 이후 인증 사회적기업인 (사)주거복지협회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2009년 3월에는 청소 영역에서 ‘청소대안기업연합회’가 발족했다. 18개 업체가 가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청소대안기업연합회도 그 시작은 청소 영역 자활사업단들 간의 네트워크였다. 그러나 청소 영역 자활사업단들 간의 네트워크의 활동이 부진해지고, 자활협회와의 협력이 잘 이뤄지지 않으면서 자활공동체이자 사회적기업인 ‘(주)함께일하는세상(약칭 함세상)’이 주도하여 결성되었다.

이처럼 대안경제 조직들이 각 영역에서 조직되고 있는 것은 사업단 네트워크가 새로운 방식으로 조직됨을 의미한다. 이 조직들에 가입한 업체들은 대개 자활공동체들이며, 상당수는 인증 사회적기업이기도 했다. 아직 한국에는 본격적으로 대안경제를 지향하거나 운영의 기본 내용으로 설정하는 기업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런 가운데 자활사업을 기반으로 하는 이 조직들의 탄생은 대안경제의 조직화에서 사회적경제를 지향한 유의미한 시도로 평가된다.

-자활사업과 협동조합기본법 제정

우리나라 협동조합 관련법은 농업협동조합법 등 모두 개별법의 형태였었다. 2011년 12월 협동조합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협동조합기본법’이 마침내 통과되었고 2013년 1월부터 본격 시행되기 시작했다.

본 기본법의 시행과 함께 자활사업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노동자협동조합을 표방했던 생산공동체운동이라는 자활사업 제도화 이전 시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협동조합과 자활사업은 서로 분리하여 사고할 수 없는 절대적 관계에 있음을 이미 살펴보았다. 나아가 본 기본법의 공동발의자 중에는 당시의 자활협회장 이름도 국회공식문서에 올려져있을 정도로 자활사업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이 명확히 드러난다.

그리고 자활근로사업단이나 자활공동체 중에서 아예 사회적협동조합을 설립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경기광역자활센터가 주도하여 설립된 취업지원 자활전문기업인 (주)내일로와 같이 광역자활공동체에서 사회적기업을 경유하여 사회적협동 조합으로 변신하려는 등 다양한 움직임과 노력들이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향후 다양한 사회적협동조합들이 자활근로사업단을 거쳐 출범할 것으로 예측된다.

2. 자활사업의 사회적경제개발센터로 변신 필요

지금까지 논의된 바와 같이 자활사업은 사회적경제의 철학과 원칙을 모태로 출발하여, 다양한 사회적경제 활동방식 및 조직체들이 우리 토양 속에 깊이 뿌리내리도록 밑거름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 이러한 역할은 결코 전설과 역사로만 묻히지 않았고 계속 현재진행 중이며 업그레이드되는 추세이다. 아니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최근 지역자활센터는 그들의 업무 정체성에 관해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비판에 직면하여 비틀거리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사회취약계층을 일부 끌어들여 개별적으로 사회적경제조직체를 만들어오면 사후적으로 도와주겠다는 무수히 많은 사회적경제 관련 정부조직과 중간지원조직이 기현상적으로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 속으로 투신하여 창의적이고 혁신적이며 건강한 사회적기업가를 양성 배출하고, 이들을 촘촘히 조직하여 다양한 사회적경제조직체를 마을 단위나 보다 큰 지역사회 수준에서 만들어내는 본질적 역할을 수행하는 기구는 완전 진공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지역자활센터는 적지 않는 시기동안 이런 역할에 대한 훈련과 경험을 알게 모르게 풍부히 쌓아왔다.

이젠 본격적으로 “(가칭)사회적경제개발센터”로서의 역할과 기능으로의 새로운 전환을 모색할 시기라고 판단된다. 물론 많이 토론하고 준비해왔다. 하지만 생각과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본격적인 변신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이를 통해 오로지 국가지원이라는 떡고물에만 관심을 두고 우후죽순 격으로 벽돌 찍듯이 마구 생산되었다가 돌연 사라져 버리는 사이비(quasi) 사회적경제 업자들을 솎아내고 올곧은 사회적경제조직체들이 성장을 지속하도록 작동하는, 즉 양질의 사회적경제 생태계 구축 활동을 수행하는 (가칭)사회적경제개발센터로의 변신을 지역자활센터와 정부관계기관에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촉구해본다. E21

본 기사는 월간지 <이코노미21> 12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