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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자본이 전제 군주 통치의 기초
토지 자본이 전제 군주 통치의 기초
  • 박이택 본지 편집기획위원 / 고려대 연구교수
  • 승인 2014.05.06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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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군서>2 토지소유는 허용, 시장은 억압해 농업생산력과 군사력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던 정책체계

전제 군주적 질서라고 하면 군주의 무제한적 소유와 백성의 절대적 무소유를 상상한다. 이 세계에서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할 유인이 없고, 군주의 강제와 강압에 의해 혹사당할 뿐이다. 이른바 총체적 노예제 사회이다. 전제 군주제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상앙의 진나라에서는 어떠했을까?

사적 토지 소유로 땅에 대한 욕망을 만들다.

욕망은 삶의 원초적 에너지인데, 아직 분출의 양식이 규정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무정형의 에너지이다. 무정형의 에너지인 욕망에 일정한 분출의 양식을 부여하는 것이 사회의 제도나 규범이다. 전제 군주제도 백성의 욕망의 분출이 전제 군주제에 기여할 수 있도록 백성의 욕망에 일정한 양식을 부여한다. 전제 군주의 나라였던 진나라는 어떠한 욕망의 체계를 만들었을까? <한서(漢書)>의 ‘식화지(食貨志)‘를 보자.

“진나라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으니, 상앙의 법을 사용하여 선대 제왕의 제도를 바꾸었고 정전제를 없앴으며, 백성들이 매매를 할 수 있어서 부자는 논밭이 끊임없이 이어졌으나 가난한 자는 송곳 세울 땅도 가지지 못하였다. 또 하천과 못의 이익을 오로지 하고 산림의 풍요로움을 관장하여, 음란 무도함이 법제를 넘어서고 사치스러움을 극하여 서로 다투었다. 읍에는 인군(人君)의 존귀함을 누리는 사람이 있고 마을에는 공후(公侯)의 부유함을 지닌 사람이 있었으니, 하찮은 백성들이 어찌 곤궁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상앙의 변법이 꿈꾸었던 세계는 부(富)와 귀(貴)를 독점한 군주와 그것을 일체 소유하지 못하는 백성으로 이원화된 사회가 아니었다. 백성 중에도 부자와 빈자가 있으며, 명예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있다. 백성들 간에 형성된 부와 귀의 서열화가 백성의 욕망을 주형하는 틀이었는데, 이것은 진나라에 특수한 것은 아니고, 현대의 대부분의 사회에서도 발견되는 보편적인 것이다. 전제 군주적 질서의 특질은 부와 귀의 서열화를 통해서 인간의 욕망을 주형한 데에 있지 않고, 부와 귀를 배분하는 방법에 있을 것이다.

어떠한 방식으로 부와 귀를 배분하였을까? 진나라의 경우, 그 가장 밑바탕에는 사적 토지 소유제도가 있었다. 사적 토지 소유는 땅에 대한 불균등한 소유를 낳고, 땅에 대한 욕망을 낳는다. 주나라 시대의 토지제도였던 정전제(井田制)에서는 땅은 왕의 것이었고, 경작자에게 균등하게 분배되었기 때문에, 남보다 더 많은 땅을 가지려는 욕망은 억압되었다. 상앙은 땅에 대한 욕망을 억압하고 있었던 정전제를 폐지하고, 사적 토지 소유를 허용함으로써, 남보다 더 많은 땅을 가지는 것을 욕망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일벌백계라는 상앙의 공포정치도 사적 소유권을 강화하는 데 일조하였다. <염철론(鹽鐵論)>의 ‘형덕(刑德)’을 보자.

“길에 재를 내다버리는 사람에게도 상군이 형벌을 주었기 때문에 진나라 백성들이 잘 다스려졌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훔치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소를 훔치는 자는 목에 칼을 씌워서 가둔 것은 국가 산업의 근본인 농업을 중시하여 농업을 해치는 경솔한 행위를 두절시킨 것입니다. 변경을 지키는 군사들이 위풍당당하고 군량과 마초가 넉넉한 것은 변방을 도와서 전쟁준비에 치중하는 것입니다. 물건을 훔치다가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를 살인죄와 같이 취급하는 것은 죄인이 마음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아울러 그의 사악한 마음을 꾸짖는 것입니다.”

말을 훔치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소를 훔치는 자는 목에 칼을 씌우고, 물건을 훔치다가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를 살인죄와 같이 취급함으로써 소유권을 절대화하였다. 소유에 대한 욕망은 억압의 대상이었던 것이 아니고, 상앙의 변법이 지향하는 제도적 통치가 최우선으로 보호하여야 할 대상이었다.

몸에 밑천을 가진 사람과 땅에 밑천을 가진 사람

왜 땅에 대한 사적 소유의 체계를 허용하였을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밑천을 쌓아간다. 혹자는 삶의 밑천을 몸에 가질 수도 있으며, 혹자는 삶의 밑천을 땅에 가질 수도 있다. 아직은 천하 통일이 되지 않은 시대, 백성들이 이주의 전략을 쓸 수 있을 때에는 백성이 삶의 밑천을 몸에 가지는 것보다 땅에 가지는 것이 전제 군주의 통치에 더 유리하였다. <상군서>의 ‘산지(算地)’를 보자.

“<시경>, <서경>을 익히고 담론하는 선비를 채용하면 백성들은 학문을 배우기 위해 외지로 나가고 군주를 가벼이 여길 것이며, 숨어사는 선비를 채용하면 백성들은 조정에서 멀어지고 군주를 비방할 것이며, 용감한 군사를 채용하면 백성들은 강해지고 금령을 가벼이 여길 것이며, 수공업을 하는 사람이 채용되면 백성들은 경솔하고 이사하기를 쉽게 여길 것이며, 장사하는 사람이 편하면서도 이익을 얻는다면 백성들은 그들에게 의지하고 군주를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종류의 사람들이 국가의 등용 대상에 들게 되면, 농지는 황폐해지고 병력은 약해질 것입니다. 담론을 하는 선비는 밑천이 입에 있고, 숨어사는 선비는 밑천이 뜻에 있고, 용감한 군사는 밑천이 용기에 있고,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밑천이 손에 있고, 장사하는 사람의 밑천은 몸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천하가 다 집이 될 수 있으니, 왜냐하면 그들은 몸에 밑천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밑천을 몸에 갖추고 있어서, 외지에 나가면 어느 곳에서든 세력가에게 의지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갖추어진 밑천을 가지고서 사방의 모든 곳을 집으로 삼는 자는 요임금과 순임금도 다루기 어려워한 바입니다.”

몸에 밑천을 가진 사람은 사방 모든 곳을 집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나쁜 대우를 하는 군주에 대해서는 미련을 가지지 않고 떠나 버린다. 반면에, 밑천을 땅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이주의 전략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전제 군주의 통치에 유리하다. 이에 대해서는 전월 호에서 언급한 <상군서>의 ‘산지’를 참조할 수 있는데, 그 일부만을 제시한다.

“....국경 안의 백성들은 한 가지 일에 전념하고, 백성들이 한 가지 일에 전념하면 농사를 짓게 되며, 농사를 지으면 순박해지고, 순박해지면 살던 곳에 안주하고 외지로 나가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국가를 다스리면 백성들은 밑천을 땅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되어, 외지는 어디를 가나 위태한 곳에 의탁하는 것이 됩니다. 밑천을 땅에 간직하면 순박해지고, 외지에서 위태한 곳에 의탁하면 미혹됩니다.....”

백성들이 이주의 전략을 쓸 수 있을 때, 전제 군주는 자국의 생산력적 기초를 백성들의 몸에 합체되는 인적 자본이 아니라, 백성들이 이주한 이후에도 남게 되는 토지 자본에 두는 것이 유리하다. 토지 자본을 형성하는 데에는 사적 토지 소유를 허용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사적 토지 소유에 기초하여 형성된 토지 자본은 그것을 축적한 개인에게는 부의 원천이지만, 그것은 백성들이 이주한 이후에도 남게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전제 군주의 자산이며, 백성들이 이주할 때 제 값을 받기는 어렵기 때문에 백성들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된다.

토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부가적인 방법들

물론 토지의 사적 소유를 허용하는 것만으로 백성들이 몸에 밑천을 가지는 것보다 땅에 밑천을 가지는 것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백성들이 땅에 밑천을 가지는 것을 선호하게 하는 데에는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 <상군서>의 ‘농전(農戰)’을 보자

“국가를 잘 다스리는 자는 백성들 가르치기를 모두 [농업·전쟁] 한 가지에만 전심전력을 다 하여 관직과 작위를 얻도록 교육하며, 이 때문에 [농업·전쟁 한 방면에만 전념하지 않는 사람은] 벼슬을 하지 못하고 작위를 얻지 못합니다.......백성들은 군주가 상으로 내리는 작위와 봉록이 오로지 [농업·전쟁] 한 방면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게 되면 전심전력으로 [농업·전쟁] 한 방면에만 종사할 것이며, 백성들이 [농업·전쟁] 한 방면에만 전념하게 되면 다른 일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고, 백성들이 다른 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역량이 많아질 것이며, 역량이 많아지면 국가가 강대해질 것입니다. 지금 국경 안의 백성들이 다들 말하기를 “농업·전쟁은 피할 수가 있으면서도 관직과 작위는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이 기꺼이 직업을 바꾸고자 하여 <시경>과 <서경>을 힘써 배우고, 다른 나라의 권세가를 추종하는데, 우수한 자는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고, 뒤쳐지는 자라 해도 관직과 작위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평범하고 미천한 사람들은 상업에 종사하고 수공업을 하면서 다들 농업·전쟁을 회피합니다. 이러한 두 가지 상황이 모두 갖추어지면 국가가 위험합니다. [군주가 백성들에게 이러한 사람들의 행위를 교육 내용으로 삼음으로써] 백성들이 이것을 본받아 배우게 된다면, 그 나라는 반드시 약화될 것입니다.”

작위와 봉록이 어떻게 배분되는가가 중요하다. 유식한 사람에게 높은 작위와 봉록이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유식한 사람이 되고자 할 것이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는 작위와 봉록은 농업과 전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상인과 수공업은 농업·전쟁보다는 수월하고 안전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에, 이를 억제하지 않으면 농업과 전쟁의 역량은 줄어들고 상업과 수공업 종사자는 늘어나게 된다. 농업과 전쟁의 역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상업과 수공업을 규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군서>의 ‘외내(外內)’를 보자.

“백성들의 대내적인 일로는 농사보다 어려운 것이 없으며,그래서 가벼운 정치 조치로는 그들을 부릴 수 없습니다. 무엇을 가벼운 정치 조치라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농민이 가난하고 상인이 부유한 것, 즉 식량의 가격이 떨어지면 돈이 귀해지는데, 식량의 가격이 떨어져서 농민이 가난해지고, 돈이 귀해져서 상인이 부유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상업과 수공업을 금하지 않아서 수공업자가 이득을 보고, 도처를 다니면서 밥벌이하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농민들이 노력은 가장 고생스럽게 하면서도 거기서 얻는 이익은 적으니, 상인이나 수공업자만도 못한 것입니다. ..... 식량의 가격이 오르면 농사를 짓는 자들이 유리하고, 농사를 짓는 자가 유리하면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입니다. 식량의 가격이 오르면, 식량을 사들이는 것이 이롭지 않고, 또한 부세와 요역을 가중시키면, 백성들은 상업과 수공업을 버리고 농업 생산에 종사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농업 생산에 모든 역량을 다할 것입니다.”

사적 토지 소유권의 보장과 시장 억압적 정책의 공존

<상군서>의 ‘간령(墾令)’에는 토지가 개간될 수 있도록 하는 즉 토지 자본이 형성되도록 하는 20가지의 정책이 제시되어 있다. 이 정책들은 토지를 개간할 유인을 강화하고, 백성들이 농업의 대안으로 선택할 수 있는 직업에는 페널티를 부과하는 정책들이다. 이 정책들은 대부분 시장경제가 작동하는 것을 막는 반시장적인 조치들이다. 그 일례로 농산물시장에 대한 정책도 그러하였다. <상군서>의 ‘간령’을 다시 보자.

“상인은 쌀을 사들이지 못하고, 농민은 쌀을 내다 팔지 못하게 하십시오. 농민이 쌀을 내다 팔 수 없다면, 게으름 피우는 농민이 부지런히 일할 것입니다. 상인이 쌀을 사들일 수 없다면, 풍년이 들어도 쌀을 사들이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풍년이 들어도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면, 흉년이 들어도 큰 이익을 올리지 못할 것입니다. 큰 이익이 없으면 상인은 두려워하게 되고, 상인이 장사를 두려워하면 농사를 짓고자 할 것입니다. 게으름 피우는 농민이 부지런히 일하고 상인이 농사를 짓고자 한다면 황무지는 반드시 개간될 것입니다.”

이 문장은 경제학자가 볼 때 무슨 소린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와 별도로 분명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은 반시장적 조치를 취함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는 점이다. 사적 소유권에 부합하는 것은 시장경제라고 생각하지만, 상앙의 <상군서>에서는 상품 시장이나 노동력 시장에 대한 반시장적 조치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바람직한 것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시장경제를 보호하여야 한다는 발상은 찾아볼 수 없다. 상앙의 변법은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의 보장과 시장 억압적 정책이 공존하는 경제체제를 지향하는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이 양자는 결합하여 전제 군주의 통치의 기초인 토지 자본의 형성에 기여하리라 본 것이다.

농경과 전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경사생산방식

물론 농경을 중시하였던 것은 농경이 토지 자본에 의존하는 산업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멸국겸병의 시대에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군량과 병사가 있어야 한다. 농경은 바로 그 군량을 생산하는 산업이었다. <상군서>의 ‘신법(愼法)’을 보자.

“이것으로 살펴보건대 국가가 중요시되는 이유와 군주가 존중받는 이유는 모두 힘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중요시되고 군주가 존중받는 두 가지 상황에 있어서는 힘이 근본인데도 오늘날의 군주들 중에 힘을 획득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으로는 농경만한 것이 없고,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는 전쟁만한 것이 없습니다. 농경과 전쟁이라는 두 가지 일은 효자도 그의 부모를 위해 종사하기 어려워하고, 충신도 그의 군주를 위해 종사하기 어려워하는 것입니다. 만약 군주가 자기의 백성들을 부려서 효자와 충신들도 어려워하는 일에 참여시키고자 한다면, 형벌을 이용해서 강요하고 포상을 사용해서 부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신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속의 견해에 얽매인 통치자들은 법도를 버리고 언변과 지혜에 의지하지 않는 자가 없고, 공로와 힘을 경시하고 인의를 제창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백성들은 이 때문에 농경과 전쟁에 힘쓰지 않는 것입니다. 저 백성들이 그들의 힘을 농경에 집중하지 않으면 국내에는 식량이 부족하게 되고, 그들의 지조를 전쟁에 집중하지 않으면 대외적으로 병력이 약해질 것입니다. 국경을 들어와서는 국내에 식량이 부족하고, 국경을 나가서는 대외적으로 병력이 약하다면, 비록 만 리의 영토를 차지하고 백만의 병사를 보유하고 있다해도, 넓은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농경과 전쟁을 중시하는 것은 그것이 군주의 힘이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는 토지 자본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전쟁 역량을 강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살펴보지 못하였는데, 상앙의 변법은 농경과 전쟁을 동일하게 중시하고 있다. 상업의 변법은 농경과 전쟁 이외의 분야를 희생하여 농업 생산력과 군사력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정책의 체계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20세기 개발국가(developmental state)들이 활용하였던 경사(傾斜)생산방식과 닮았다. 20세기 개발국가들이 공업을 발전시키려 했음에 비해 상앙의 진나라는 농업과 전쟁 역량을 발전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다르기는 하다.

상앙의 변법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 것인가?

상앙의 변법이 진나라의 천하 통일의 밑받침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체로 합의한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전제 군주적 통치의 체계가 붕괴될 수밖에 없는 체제였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논란거리였다. 기원전 81년에 벌어진 경제대토론회였던 염철회의에서도 이 문제는 논의되었다. <염철론>의 ‘비앙(非鞅)’을 보자.

“대부가 말하였다. 진나라가 상군을 임용하자 국가는 그 때문에 부강해졌으며, 그 후 마침내 육국을 병합하고 제왕의 통일사업을 완성하였습니다. 2세 때에 이르러 간사한 신하가 전횡하자 올바른 법도가 행해지지 못하고 제후들이 이반하여 국가는 멸망하였습니다. ... 조고가 진나라를 망친 것을 가지고 상앙을 비난하는 것은 숭후 호가 은나라를 어지럽힌 것을 가지고 이윤을 비난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문학이 말하였다. 끌을 잘 사용하는 자는 만드는 것이 공고해서 헐렁하지 않고, 기초를 잘 다지는 자는 높이 쌓아 나가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윤은 요·순의 도를 은나라의 기초로 삼았기 때문에 자손들이 왕위를 계승하여 백 대가 지나도록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상앙은 엄중한 형벌과 준엄한 법률을 진나라의 기초로 삼았기 때문에 2세에 이르러 국가가 멸망했습니다....... 이는 상앙이 진나라를 위해 제왕의 덕업을 개척한 것만 알고 그가 진나라에 망국의 도를 초래한 것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상앙의 변법에 의해 만들어진 체계가 지속가능한 것이었는지 어떤지를 알기는 어렵다.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서서, 상앙의 변법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체계가 등장하였는데, 그것들은 자신들이 관철하고자 하는 개혁구상을 합리화할 수 있는 전거로 사용하기 위해 상앙의 변법을 해석하는 것들이어서, 모두 객관적이지 않다. 그러나 역사란 객관적인 진실로 확인된 것만을 바탕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 논쟁처럼, 미래의 아젠다를 선점하기 위해 과거를 자신의 아젠다에 걸맞도록 각색하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각본들은 미래를 선점하기 위한 투쟁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기원전 81년에 벌어진 염철회의(鹽鐵會議)라 불리는 경제대토론회(經濟大討論會)는 이를 잘 보여준다. 염철회의의 내용을 기록하여 전하는 <염철론>, 이것이 다음 호에서 다룰 고전이다. E21

본 기사는 월간지 <이코노미21> 2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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