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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동부지역, 제2의 크림반도 되나?
우크라이나 동부지역, 제2의 크림반도 되나?
  • 백호림 기자
  • 승인 2014.06.01 13: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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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복잡해지는 우크라이나 방정식> 친서방(유럽식 경제) vs 친러(러시아식 경제)…민족 갈등과 겹치면서 위기 촉발

우크라이나 사태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크림공화국의 러시아 병합에 이어 동부지역에서의 분리 움직임이 더욱 거세지면서 봉합될 듯했던 우크라이나 사태가 제2 라운드로 넘어가고 있다.

제2 라운드는 크게 두가지로 진행되고 있다. 하나는 동부 3개주의 분리독립 움직임이며, 다른 하나는 가스 가격을 둘러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갈등이다.

동부 3개주의 분리독립 움직임은 이미 크림반도를 러시아에 빼앗긴 우크라이나 정부 입장에선 발등의 불이다. 4월초부터 시작된 동부지역 주요 도시에서의 친러시아 시위가 계속되면서 우크라이나 정부와 친러시아 시위대간의 유혈사태로 악화되고 있다.

지난달 6일 우크라이나 동부의 도네츠크, 루간스크, 하리코프의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친러시아 시위가 벌어졌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는 등 동부 3개주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으나, 시위대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우크라이나 정부는 “우크라이나 영토를 점령하려는 러시아의 각본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크림반도와 달리 강력한 영토 사수 의지를 보였다. 러시아는 이에 대해 시위대를 강제해산할 경우 ‘중대한 오류’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우크라이나 정부는 시위대가 점령하고 있는 정부기관 건물에 강제진압을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 제2도시 마리우풀에서 9일(현지시간) 또다시 유혈충돌이 일어나 최대 2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유혈충돌은 11일로 예정된 동부지역의 분리독립 주민투표 계획을 둘러싸고 정부와 친러시아 시위대간의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발생했다.

최근 유혈충돌로 인한 사상자 수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유혈사태에도 친러시아 분리주의 세력은 물러서지 않고 주민 투표를 강행했다. 도네츠크주의 분리주의 세력이 주도해 11일 실시한 주민투표에서 분리독립에 주민의 89%가 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유혈사태로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가스 가격을 둘러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갈등도 현재 진행형이다. 러시아는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 다른 나라보다 낮은 가격으로 가스를 공급했다. 그런데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인 가스포름이 지난달 5일 우크라이나에 지난 4년 동안 깎아줬던 가스값 12조원을 갚으라고 요구하면서 양국간 갈등이 심화됐다. 이틀전인 3일에는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는 가스값을 1천㎥당 268.5달러에서 488.5달러로 무려 80%나 인상하겠다고 통보했다. 우크라이나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아르세니 야체누크 총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무력 침략할 수 없게 되자 경제적 침공에 나섰다”고 비판했다.

친정부 대 반정부로 갈렸던 갈등이 크림반도의 독립요구와 러시아 병합, 동부 3주의 분리독립 요구 등 왜 이렇게 복잡해 지고 있는 것일까? 우크라이나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사태 전개 과정과 역사적 배경 등을 살펴보자.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이면서도 갈등이 컸다. 이번 사태의 첫 출발도 빅토르 야누비코비치 전 대통령이 EU와의 협상 대신에 친러시아 정책으로 선회하면서 시작됐다.

야당 세력은 야누비코비치의 친러 정책을 비판하며 연일 시위를 벌였고 결국 야누비코비치 전 대통령은 의회의 탄핵을 받고,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들어섰다. 이때까지만 해도 야당 세력의 승리로 보였다. 그런데 탄핵을 받은 야누비코비치 전 대통령이 친러 성향이 강한 크림공화국으로 피신하면서 사태는 우크라이나 대 러시아 갈등으로 커진 것이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친서방 대 친러, 우크라이나인 대 러시아인 등으로 갈등의 원인을 분석하고 있으나, 민족갈등 보다는 역사적 배경과 경제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본질이라고 봐야 한다.

티모센코 전 총리를 지지하는 세력은 친EU 정책을 기조로 우크라이나가 EU에 가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경제적 틀을 EU 가입에 맞게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며, 서구식 자본주의를 지향한다는 의미다. 반면, 야누비코비치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은 서구식 자본주의 보다는 러시아식 경제를 더 선호한다.

이전에 자본주의 블록이냐 사회주의 블록이냐 처럼 우크라이나 사태도 어느 경제에 속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쟁점인 것이다. 이런 갈등은 민족적 차이보다는 역사적 산물이라고 보는 게 더 적합하다.

▲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 지역 검찰청 앞에서 5월 1일 친러시아 시위자들이 모여 있다. 이날 수백명의 시위자들은 검찰이 친서방 정부를 위해 일하고 있다며 검찰청 건물 안으로 난입했다. 도네츠크=신화/뉴시스
우크라이나 지역에 있었던 키에프공국은 11세기까지 동유럽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국가였으며, 그 중심은 현재의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에프였다. 이후 키에프공국이 내부 분열과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모스크바공국이 강력해 지면서 힘의 중심이 키에프에서 모스크바로 이동하게 된다. 우크라이나는 17세기에 폴란드와 러시아로 국토가 분할되는 아품을 겪었다. 그 후 18세기 후반에는 중부와 동부는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고, 서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합병됐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독립을 선언했던 신생국 우크라이나는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1922년에 서쪽은 폴란드, 동쪽은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가 됐다. 이후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소비에트 연방은 폴란드로 진격해 우크라이나 서부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로 만들었다.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던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연방의 혼란이 가중되던 1991년 독립을 선언한다.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서부는 유럽식 개혁을 추구했고, EU의 일원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동부에 살고 있는 러시아인들은 그런 움직임을 우려했다.

지금 발생한 동부의 분리독립 움직임과 갈등은 이와 같은 서부와 동부의 역사적 차이에 근거한 것이다. 다만 크림반도와 동부지역의 사정은 다르게 봐야 한다.

크림반도 사태가 일방적으로 러시아의 승리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의 명분이 충분했다는 것이다. 먼저 크림반도는 과거 소비에트연방시절 러시아 영토였던 지역을 54년 우크라이나공화국으로 할당했다. 그러다보니 러시아인이 다수 민족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러시아는 흑해 함대를 부동항인 세바스토플 항구에 두고 있다. 원래 러시아 땅이었고, 러시아인이 다수이며, 러시아 군대까지 있으니, 러시아가 러시아인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진격시킨 것을 단순히 침략이라고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미국과 유럽의 고민이 있었다. 결국 미국과 유럽은 으름장을 놓는 것 외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크림공화국을 러시아에 넘겨줬다.

그런데 동부지역의 경우, 동부 3개주의 인구 중 상당수가 러시아계라고 하지만, 주민 다수는 우크라이나인이다. 그리고 이 땅은 원래 우크라이나의 땅이다. 그곳에 러시아계가 정착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크림공화국 사태에서 신속한 움직임을 보였던 러시아가 신중하게 대처하는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분리독립 세력에게 주민투표를 연기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동부 3개주는 자칫 침략이라는 국제적 비난 거리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정황을 고려할 때 동부 3개주가 크림공화국 처럼 러시아로 병합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분리독립 세력이 상존하고 있는 한 우크라이나 사태는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E21

본 기사는 월간지 <이코노미21> 5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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