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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 대응 위해 심리학적 접근 필요
도전 대응 위해 심리학적 접근 필요
  • 박이택 본지 편집기획위원/고려대 연구교수
  • 승인 2014.07.21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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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동차산업의 역사> 70년대는 엔지니어링적 접근 시대, 80년대 이후는 경제학적 접근 시대

20세기 경제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단 하나의 문명의 이기를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자동차를 꼽는다. 자동차만큼 삶의 패턴을 바꾸어 놓은 물건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 산업만큼 역동적으로 변화한 산업도 없기 때문이다.

20세기 자동차 산업에서 발생한 4가지 혁명적 변화와 앞으로 다가올 혁명적 변화들

지난 100여년 동안 자동차 산업은 생산 및 유통에 있어 4가지 혁명적 변화를 경험했다. 첫번째 혁명은 포드가 구현한 대량생산의 혁명이다. 차체를 두고, 여러 부품들을 옮겨서 조립하는 생산방식에서, 차체를 컨베어 밸트에 올려놓고, 각 작업자는 자신의 앞에 차제가 도달하면 부품을 조립하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이것으로 생산성이 격단적으로 높아져, 자동차 가격을 낮출 수 있게 됨으로써 이른바 모든 국민들이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갔다. 포드의 시대를 넘어서는 두번째 혁명은 GM에 의해 이루어졌다. 소비자의 취향에 맞는 자동차를 만들고, 소비자들의 취향을 선도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계속 만들어내는 마켓팅 혁명이었다. GM의 시대를 넘어서는 세번째 혁명은 도요타에 의해 이루어졌다. 여전히 자동차 생산에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있었다. 이른바 린 프로덕션이라 불리는 군살없는 기업을 만드는 전략이 그것이다. 이 도요타도 넘어서는 네번째 혁명은 어느 한 기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자동차 산업에 있어 글로벌 M&A와 글로벌 생산체제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자동차의 생산 및 유통에서의 혁명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규정된 자동차범주로부터 자동차를 해방시키는 새로운 혁명이 출현하려 하고 있다. 20세기 자동차를 자동차라 부르게 한 것은 차체와 엔진과 운전자였다. 자동차는 사람이나 물건을 싫어 날라야 하기 때문에, 일정한 공간을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 차체이다. 이제까지의 차체는 편안하고 안전한 것을 지향하였지만, 이제는 그것을 넘어서 언제라도 자신의 삶의 모든 부분을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통제 센터와 같은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이른바 스마트 카의 개념이다. 이제 차체를 구성하는 부품 중에서 냉연강판이나 합성수지나 유리, 카 시트 등이 차지하는 비중은 감소하고, 다양한 IT 용품들의 비중이 훨씬 커질 것이다. 둘째는 엔진이다. 전통적인 자동차 회사들은 가솔린 엔진이나 디젤 엔진의 성능을 개선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왔지만, 수소전지차나 전기차는 엔진이 아니라 모터에 의해 구동된다는 점에서, 구동상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셋째는 운전자다. 이제 운전자가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와 경로만을 설정해 주면 알아서 데려다 주는 시대가 도래하려 하고 있다. 부주의하여 실수하는 인간을 보완할 수 있는 장치들이 아니라, 운전자를 대신해 줄 시스템이 등장하는 것이다. 차체와 구동기관과 조작체계가 모두 변화된 새로운 자동차 세계가 출현할 것인데, 그것은 이제까지 있었던 혁명 못지 않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유럽과 조선의 장기 19세기

자동차의 발전이 온전히 20세기에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미 18세기 중반부터 자동차의 시대는 시작되고 있었다. 오늘날의 자동차와 상당히 다르기는 하지만, 자동차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최초의 물건이 1769년에 만들어 졌다. 프랑스 육군의 기술장교 니콜라스 큐뇨가 제작한 증기자동차였다. 비록 시속 3.2km로 사람의 걸음보다 느리기는 했지만, 증기기관이 동력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자동차라 할만 하다. 이후 자동차는 지속적으로 개량되었으며, 그 위에 포드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서구에서 자동차의 태동기에 해당하였던 장기 19세기 동안 한국은 어떤 상태에 있었을까? 한국의 장기 19세기는 번영의 시대가 아니라 위기의 시대였다는 수량경제사적 문제 제기는 논외로 하더라도, 19세기 조선왕조는 아직 근대 자동차 문명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자동차는 엔진이 말을 대체한 것으로서 마차 문명의 연장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조선 왕조를 떠받치는 육운의 체계는 마차 문명이 아니라 지게 문명이었다. 마차나 수레가 별로 쓰이지 않았음은 한국의 도로 사정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레는 고작 함경도의 일부 지역에서 사용하는 정도였다. 한국은 산과 계곡과 실개천들이 많은데, 바퀴 달린 운송 수단을 이용하는 것을 특히 어렵게 하는 것은 개천이었다. 개천에는 징검다리를 놓아서 사람의 이동의 편의를 도모하였지만, 징검다리는 바퀴 달린 운송수단과 궁합이 맞지 않았다. 지게꾼에 의한 운반체계와 지게꾼 밖에 다닐 수 없는 도로체계는 지게처럼 서로를 지지해 주고 있었다.

한국에 자동차가 들어오다

한국에 자동차가 들어온 것은 20세기 초였다. 조선왕조의 황족이나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 그리고 한국의 부유층과 관청이 구입한 것이었는데, 이후 자동차 운송업을 위한 용도로 도입하기도 했다. 도로 사정이 좋아진 것도 자동차 보급에 기여하고 있었다. 아니 자동차 보급을 위해 도로를 계속 개수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전국토를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개조하는 대 프로젝트가 20세기 초에 출현하였고, 일세기 지난 현재 그 꿈은 거의 실현되었다. 각 시대마다 국토를 개량하는 방법은 달랐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신작로 개수는, 토지는 주로 기부받고, 노동력은 주변지역의 인민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동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인민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동원하는 부역은 힘들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는 한국인들에게 적의를 일으키게 하는 총독부의 정책들을 조사하였는바, 이 신작로 부역에 대한 불평이 매우 심했다. 1920년대 이후 조선총독부는 도로의 개수에는 부역을 동원할 수 없도록 하였지만, 도로의 유지 보수는 부역에 의존하였다. 1910년대보다 부역의 부담이 줄이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도로품평회를 개최한다고 하면 자갈을 깔아 도로를 단장하는 데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20세기 후반 근대적인 토목건축기술의 발전과 아스팔트 포장법은 도로의 개수 및 유지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도시의 도로, 도시와 도시를 잇는 도로는 상당히 좋아졌다. 20세기 전반 자동차 보급은 이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여전히 농업사회였는데, 농촌은 아직 자동차 문명의 이역에 있었다. 1920년대 담배는 조선총독부 전매국이 전매사업으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한국의 농민들이 그 담배를 어떻게 사서 피우게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우선, 각 농촌까지 담배를 배달하는 것이 문제였고, 담배를 판매해 줄 담배가계를 확보하는 것도 문제였다. 묘안이 떠오르지 않으면, 여러 사람의 지혜를 빌리는 게 방책일 수 있는데, 현상공모가 그것이다. 조선총독부 전매국도 이 난제를 풀 수 있는 묘안을 공모하였는데, 그 당선작이 제시한 방법을 보면 당시 농촌의 도로 실태를 알 수 있다. 담배를 각 농촌에 배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소나 말의 등에 싫어서 운반하는 것이고, 판매는 구장이나 이장 집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20세기 전반 한국에 굴러다니는 자동차는 모두 수입품이었다. 아직 한국에 완성차 제조업체는 출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자동차가 고장 났을 때, 그것을 외국에 보내서 수리할 수는 없었다. 자동차가 많은 곳은 수리업이 생겼다. 한국 자동차 수리업의 효시는 황실의 자동차를 수리하였던 인사동의 강천(江川)자동차로 알려져 있다. 자동차수리업은 A/S용 자동차 부품업의 발전을 가져왔다. 당시 한국에는 완성차 제조업체는 없었지만, 이렇게 자동차 수리업과 자동차 부품제조업은 발전하고 있었다. 물론 한국에 진출해 있는 일본인들이 이 사업을 주도하였지만, 한국인 사업체들도 나타나고 있었다. 경성보디, 경성서비스, 중앙모터스, 삼화모터스, 대동모터스, 경성공업사 등등이 한국인 사업체들인데, 아직 규모는 영세했고, 만드는 품목도 제한적이었다.

자동차 생산을 꿈꾸는 사람들

해방 이후 한국에서는 자동차 생산을 꿈꾸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최무성이었는데, 1955년 4기통 지프형 승용차인 시발자동차를 만들었다. 바로 이것이 한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자동차였다. 차체는 철판을 두드려 만들었고, 엔진은 미군용 지프를 모델로 하여 국산화했다. 변속기와 차축은 당시 한국의 기술 수준으로는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재생부품을 사용하였다. 완전히 수공업적인 방식으로 제작한 것이기는 하지만, 엔진까지 국산화한 명실공히 국산 자동차였다. 한국 자동차 산업 발전의 역사에서 보면, 수공업적 방법으로 자동차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차를 만드는데 동참하였던 사람들이 가졌던 꿈과 그들의 이후의 활동이 더 중요했다. 당시 시발자동차 생산 공장의 한 구석에는 대체연료와 그것을 이용한 엔진을 만드는 기술팀이 있었는데, 그 기술팀을 이끌었던 분이 바로 유신시대 한국 중화학공업화정책의 브레인, 청와대 제2 경제수석이 된 오원철이었다.

시발자동차는 당시 일본에서 만들어지고 있던 고품격의 세단 자동차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고품격의 세단 자동차를 만들 수 있을까? 그 방법 중의 하나는 선진 외국의 자동차 업체들로부터 중간분해부품을 수입하여 조립 생산하는 것이다. 1962년에 새나라 자동차가 일본제 블루버드 승용차를 중간분해부품으로 수입하여 조립 생산한 것이 그것이다. 당시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완전 국산화된 품격 높은 승용차를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중간분해부품을 수입해서 조립 생산하는 것이 자동차 부품업체와 완성차 업체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조만간 알게 되었다. 당시 한국 자동차 부품생산 능력은 일본에 비할 때 기술적으로 매우 떨어졌다. 따라서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는 부품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을 쓰면, 자동차의 성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생산비도 올라갔다. 완성차 업체는 비싸고 품질이 떨어지는 부품을 쓸 유인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완성차 업체가 부품업체의 기술 및 생산성 향상을 지도해 줄 능력도 없었다. 중간분해부품을 수입하여 조립 생산하는 것은 한국 자동차부품 업체를 옥죄는 효과를 가지고 있어서 부품업체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국산화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다각적으로 모색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방안이 중간분해부품이 아니라 완전분해부품을 수입하고, 부품업체를 완성차 업체에 계열화하는 것이었다. 1966년 신진자동차에 의한 완전분해부품 조립 생산체계가 이렇게 하여 출현한 것이지만, 한국 자동차 산업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돌파구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그것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사람에 의해 마련된다. 우선, 그런 사람을 찾아서, 그가 자동차 산업을 개척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신진자동차보다 더 효율적으로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는 기업에 자동차 생산의 문호를 연 것이다. 이 기회에 도전한 것이 바로 현대였다. 1967년 현대는 포드와 기술제휴를 맺고 자동차 산업에 진입하였다. 당시 현대가 포드와 맺은 기술제휴 계약문서를 보면, 남다른 점이 있었다. 그 계약 문서들은 현대가 자동차 부품 국산화, 부품 구입비의 절감을 통한 경쟁력 확보, 월남, 오끼나와에 군납형식이기는 하지만 수출하겠다는 의지 등이 담겨져 있었다.

1974년 장기자동차공업 진흥계획

한국 산업화는 국가와 재벌간의 위험공유체제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 위험공유체제의 주도권을 누가 잡았는가도 시대에 따라 약간 달라졌는데, 1970년대에는 국가가 그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주도권은 비전의 선점에서 나오는데, 중화학공업화 선언이 그것이었다. 중화학공업화라는 비전은 산업 버전으로 구체화되었다. 자동차 산업의 경우, 1974년 장기자동차공업 진흥계획이 그것이었다.

1962년 이래 한국정부는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하였지만, 왜 성공하지 못하였는가? 이에 대한 통렬한 자기 성찰이 없다면, 이 계획도 그 이전의 많은 계획과 마찬가지로 또 한번의 허망한 시도가 되었을 것이다. 이전의 육성정책이 왜 실패했으며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면밀한 검토는 1969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1974년 장기자동차공업 진흥계획은 지난 5년 동안 고안된 방안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1974년 장기자동차공업 진흥계획의 성격은 이 계획에 포함되어 있는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의) 전망’이 잘 보여준다.

(1) 한국의 자동차공업은 외국자동차 제조회사와 같이 Body 및 Engine 등의 중추부품생산시설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즉 “자동차제조” 회사로서 응당 갖추어야 할 독자적 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으므로서 수입부품에 의존한 조립기능밖에 발휘못함에 관련산업인 기계공업분야의 발전문제와 큰 유대를 갖고 있지 못하다.

(2) 그리하여 현금의 KD조립 생산방식의 지속시 외국 대기업의 “부품생산거점의 다국간 분산정책”으로 국산화되는 일부부품의 양산화는 촉진될지 모르나 국산화 안 된 중추부품의 항구적 수입은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자동차의 완전국산화 불능으로 자동차공업과 관련산업의 발전은 저해되며, 외국차형은 또한 빈번한 모델변경으로 장기간 계속 생산이 곤란하며 결과적으로 소량생산되어 원산지보다 가격고와 품질불량을 초래하여 완전 국산화해도 수요유발과 수출시장 개척이 곤란하게 된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따라 매년 증가될 자동차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는 한국실정에 부적합한 외제차량 조립보다 유류소비 절약을 기할 수 있고 빈번한 모델 변경이 없는 경제적인 한국형 차량 양산과 완전국산화를 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한국의 자동차 산업이 외국 다국적 자본의 부품생산거점으로 고착화되어서는 자동차 산업이 핵심부를 차지하는 한국 기계공업 발전이 좌초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짙게 깔려 있으며,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한국의 자동차 회사들이 차체와 엔진 등 자동차의 중추부품을 직접 생산하여야 하고,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 양산체제와 고유모델의 차량을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제시하고 있다.

▲ 1974년 탄생한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 모델인 현대자동차 포니 모습. 사진=울산박물관 제공
그러나 고유모델을 가지고, 엔진공장 등을 포함한 종합자동차 공장을 지어, 경제규모의 자동차를 생산하자고 제시한 정부의 정책은 기업의 입장에서 볼 때는 상당한 도박이었다. 그것이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컸을 뿐만 아니라, 다국적 기업의 부품생산거점으로 있는 것도 기업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나쁜 선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 내부에서는 외국 자동차 기업과 합작투자를 하면, (1) 수익성이 좋은 차종을 때맞춰 선정할 수 있고 (2) 개발비도 들이지 않은 채 외국에서 가져 온 도면과 부품으로 조립만 하면 되며 (3) 새로운 투자 부담없이 간단한 조립라인만으로도 손쉽게 이윤을 확보할 수 있고 (4) 기술문제도 고심할 필요가 없다는 이점들이 있어서, 국가의 시책에 강한 저항감을 보였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단호했다. 고유모델을 가지고 엔진공장 등을 포함한 종합자동차공장을 짓고, 경제규모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래야 자동차공업이 한국의 기계공업과의 유기적 연계 속에서 성장할 수 있으며, 그래야 중화학공업화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부의 이와 같은 강한 의지와 이 의지에 동참하는 기업에 대해서만 지원하겠다는 강한 시사는 기업들도 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장기자동차공업 진흥계획은 한국의 자동차 공업의 독자적 발전 경로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바로 국제 경쟁력이 있는 자동차 산업의 발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 이후의 역정도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79년부터 위기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제2차 오일쇼크와 1980년대 전반의 한국 외채위기 속에서 자동차 산업을 육성한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비관론도 있었으며, 잘못된 선택의 폐해를 최소로 줄이기 위해 합리화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관료들의 액션도 있었다. 1980년대 초 합리화 조치는 별로 성공적인 정책이 아니었으며, 1986년부터 시작된 삼저호황은 자동차 산업의 미래에 드리워졌던 암울한 그늘을 모두 날려버렸다. 한국 자동차 산업의 본격적인 도약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에서 모터리제이션이 시작되고 있었고, 한국 자동차 기업들의 기술력이 강화되면서 해외 시장에서 선전하기 시작하였다. 자동차 산업은 활짝 피워올랐다. 1995년 한국은 세계 제5위의 자동차 생산강국이 된 것이다.

IMF 체제

한국은 자원도 없었으며, 산업도 낙후되어 있었다. 외국으로부터 자원과 기술을 수입하여 산업을 발전시켜야 하는데, 돈이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외자로서 밑천을 삼고, 수출로 돈을 벌어 갚아나가는 정책을 취한 것이다. 기업도 별 볼일이 없어서 정부가 보증을 서야 외자를 도입할 수 있었으며, 정책금융으로 두둑한 지원을 해 주어야 외국 기업과의 경쟁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국가와 재벌간의 위험공유체제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체제는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국가와 재벌간의 위험공유체제가 형성되고 있었던 시기에 세계경제체제는 세 시스템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기축시스템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대항 시스템, 그리고, 기본적으로 기축 시스템에 참가하여 자국의 경제력의 향상을 도모하려는 개발주의 정권을 위해 만들어진 기축 시스템의 하위 시스템으로서의 개발 협력 시스템이 그것이다. 국가와 재벌간의 위험공유체제는 이 개발 협력 시스템이라는 틀 속에서만 허용되는 것이었다. 한국이 개발도상국의 단계를 넘어서면, 이것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는 브레튼 우즈 체제의 붕괴와 글로벌 변동성의 형성을 배경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핫 머니화한 글로벌 변동성은 높은 발전 가능성이 있는 지역을 찾아 다녔는데, 그래서 발견한 곳이 동아시아 NIEs였다. 현재 BRICs의 1970년대 판인 셈이다. 한국이 현재 국제 단기자본의 ATM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은 누차 확인되고 있다. 당시에는 국제자본의 변동성과 국제 시장의 변동성에 매우 민감하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경제였음에도 이에 대한 대응체계가 별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이 위험은 국가와 재벌의 위험공유체제로 해소될 수 있는 위험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해결할 주체는 형성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 IMF체제가 출현한 것은 역사적 필연이었다.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한국의 IMF체제는 세계 자동차 산업의 네 번째 혁명과 연동되어서 전개되었다. 한국의 자동차 기업들은 비록 국가와 재벌간의 위험공유체제 속에 포함되어 있기는 했지만, 세계 제5위의 자동차 강국이라는 지위가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차체와 엔진, 파워 트레인 시스템 등 자동차 주요 부품에 있어 이미 세계 선진기업들과 경합할 만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결여되었던 것은 글로벌 시장의 변화와 위험에 대처할 능력이었다. IMF체제는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체제로의 변화였다. 현대·기아차 그룹은 글로벌 기업으로의 변신하였다. 삼성자동차와 대우자동차도, 르노삼성과 GM대우라는 형태로 글로벌 생산체제의 한 형태로 변형되었다. 어찌보면 자동차 산업의 경우, IMF체제를 거치면서 20세기 자동차 산업에서 발생한 4가지 혁명적 성취를 모두 끌어안은 산업으로 변화되었다 할 수 있다.

어떤 미래가 펼쳐 질 것인가?

현재 한국의 자동차 기업들은 차체, 엔진, 파워 트레인 등 전통적인 자동차 제조기술에서는 글로벌 빅3와 큰 차이가 없다고 평가되고 있다. GM, 포드의 나라인 미국에서 현대·기아자동차가 선전하고, 현대·기아자동차보다 중국에 먼저 진출한 도요타 자동차보다 중국시장에서 현대·기아자동차가 더 선전하고 있다. 한국 자동차 산업은 20세기 자동차 산업에서 발생한 혁명적 성취를 모두 잘 흡수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전통적으로 규정된 자동차범주로부터 자동차를 해방시키는 새로운 혁명이 출현하려 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기존 자동차 업체들이 가지고 있던 차체, 엔진, 파워 트레인 등 전통적 기술을 무력화시키는 파멸적 혁신의 성격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20세기 한국의 역사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세계가 어느 만큼 변화될 수 있는가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이 경험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세계는 변화되어 갈 것이다. 자동차는 자동차가 아닌 것이 될 것이고, 우리 생각하는 산업 구분은 더 이상 유의미한 구분의 체계가 아닌 것이 될 것이다.

혹자는 앞으로 제조업의 시대가 아니라 서비스업의 시대가 될 것이라 이야기 한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경제학 이론이 보몰의 역설이다. 생산성 증진이 높은 산업은 점점 생산성이 높아져서, 가격이 하락한다. 그래서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든다. 반면, 생산성 증진이 일어나지 않는 영역은 그대로여서, 생산성 증진이 일어나지 않는 영역의 비중이 커진다는 것이다. 생산성의 증진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영역은 제조업이고, 생산성의 증진이 일어나지 않는 영역은 서비스업이므로, 산업에서 제조업의 비중은 줄고 서비스업의 비중은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한 가지의 전제 위에서 성립한다. 재화가 서비스를 대체하지 않는다고 가정이다. 그러나 많은 서비스는 재화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안마 서비스는 안마의자가 대신할 수 있으며, 청소 서비스는 로봇 청소기가 대신할 수 있다. 서비스는 기계화될 수 있다. 최근 3D 프린터가 주목받고 있다. 현대·기아차에서 신모델의 시제품을 만들 때 3D 프린터를 사용한다고 한다. 기존의 기계화는 정형화되고 반복적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작업기를 만들고, 그 작업기를 원동기로 작동하는 체계였다. 3D 프린터는 작업기에 있어 혁명을 가져올 것이다. 일회적이며 복잡한 것, 그래서 기계화되지 못한 것, 사실 서비스업은 이러한 영역에 많이 존재하는데, 이제 이 영역도 기계화될 것이며, 그 시대를 열어가는 첨병이 3D 프린터라 할 수 있다. 자동차가 자동차가 아닌 것으로 되는 시대는 서비스가 서비스가 아닌 시대로 되는 것과 더불어 진전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조업이 아니라 서비스가 미래라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사라져 가는 산업 구분의 체계 속에 미래를 억지로 집어 넣으려는 시도 이상이 아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떠한 산업을 키울 것인가라는 20세기적 산업육성정책이 아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자동차를 커다란 스마트폰으로 생각도 해보고, 바퀴달린 축전지로도 생각해 보고, 이동하는 집무실로도 생각해 보고, 그에 대응할 수도 있는 방안을 만들어 내는 창의력을 키울 수 있는 경제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창의력은 현재를 넘어서는 비전을 제시하고, 그것을 위해 장기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추동력이다. 이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족쇄는 불안감으로 현재의 시스템이 주는 렌트의 체계에 사람들이 목매달게 하는 것이다. IMF 체제가 결코 축복일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미래의 기대를 미래의 불안으로 바꾸고, 그 위에 자기의 시스템을 구축한 불안의 경제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불안의 경제시스템이 지속하는 한 한국의 미래는 없다. 있다면 오직 불안한 미래와 그 속에 한참 오그라든 인간이 있을 뿐이다. 이제 자동차 산업의 미래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기업가나 산업정책가는 심리학자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불안을 느끼고 어떻게 하면 불안을 느끼지 않는지, 불안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경제 시스템을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그래서 얻어지는 창의력의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추가적인 조치들이 필요한지, 고민하여야 한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시대는 오원철 전 청와대 제2 경제수석의 엔지니어링 어프로치의 시대였다면, 1980년대 이후의 시대는 고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경제학적 어프로치의 시대였다. 그러나 모두 과거일 뿐이다. 이제는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심리학적 어프로치 혹은 인간학적 어프로치가 필요한 때이다. E21

본 기사는 월간지 <이코노미21> 3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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