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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흉노전쟁 통해 유교, 계몽적 권력으로 등장하다
한-흉노전쟁 통해 유교, 계몽적 권력으로 등장하다
  • 박이택 본지 편집기획위원/고려대 연구교수
  • 승인 2014.08.01 1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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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고전으로 읽는 경제사상사>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재정회계 논쟁서 <염철론>(1)

우리는 앞서 <관자>와 <상군서> 두 고전을 살펴보았는데, 관중학파나 상앙학파는 황로학(黃老學)이나 법가(法家)로 분류되지 유학자는 아니었다. 바로 이 시기에 공자와 맹자가 유가사상을 창시하고 또 발전시켰지만, 그 때의 중국은 유교국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중국이 언제 이른바 ‘유교 국가’가 되었는지, 언제 어떻게 중국문화권은 유교문화권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단지 주류 사상의 교체의 차원에서 보는 것은 본고의 관심 영역이 아니다. 대신, 유교적 이상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새로운 사회경제시스템이 형성된 그 전환의 역사적 시점과 과정을 살펴 보고자 함이다. 

<염철론(鹽鐵論)>이란 어떤 책인가? 

중국이 유교국가로 전환되는 그 어마어마한 사건이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황로학적 법가주의자로부터 유학자로의 권력의 교체는 상당히 점진적으로 일어났으며, 정치권력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두 세력의 경제사상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문헌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양 세력의 경제사상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기원전 81년에 열렸던 염철(鹽鐵) 회의가 그것이다.  

한 무제는 흉노제국과의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군자금을 소금과 철과 술의 전매수입과 균수(均輸)제도의 운영수입으로 충당하고 있는데, 이 제도를 만들고 운영한 주도세력은 황로학적 법가주의자였다. 소금과 철과 술의 전매제도와 균수제도는 국가의 재원을 풍부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한제국 초기 상인세력 발전의 토대였다. 이 속에서 농민경제는 위축되고 있었으므로, 농민경제의 입장에서 흉노제국과의 전쟁, 소금과 철과 술의 전매수입 및 균수제도를 비판하는 세력이 등장하였는데, 바로 유학자가 그들이었다. 염철회의는 이 양 세력이 흉노제국과의 전쟁, 소금과 철과 술의 전매수입 및 균수제도의 존폐를 놓고 한바탕 논쟁을 벌인 토론회였다. <염철론>은 이 염철회의의 내용을 후대의 유생인 환관(桓寬)이 편찬한 것이다.  

유생들, 반진항쟁 속에 정치적 지분을 얻다.  

우선, 이 시기 유학자들은 황로학적 법가주의자들과 한 판 사상 투쟁을 벌일 만큼 세력이 막강했는데, 한나라 이전 진나라의 분서(焚書)와 갱유(坑儒)를 알고 있는 독자들은 다소 의아할 수도 있으리라. 유학자들은 이 때 이미 그 씨가 마르지 않았었냐 하고 말이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지 8년이 지난 때인 기원전 213년 상앙적 법가 정치가였던 승상 이사(李斯)는 반진복고(反秦復古)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진나라 역사서를 제외한 모든 역사서와 제자백가의 학설 및 <시(詩)> <서(書)>를 불태우고, 옛것을 들어 현재를 비판하는 자는 일가족을 모두 죽이고, 고서를 간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도 처벌하지 않는 관리도 죽이도록 요청하니, 진시황이 이에 따랐다. 이를 ‘분서’ 사건이라 하는데, 분서는 서책을 불사른 것일 뿐, 이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유생들은 아직 살아있었다. 이듬해부터 다양한 구실을 붙여 유생들을 생매장을 하여 죽이니, 이를 ‘갱유’라 한다.  

현 체제를 비판하는 대안적 사유를 억압하면,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될 법 하지만, 사실은 체제의 붕괴를 가져온다. 체제의 유지는 현 체제 이외의 다른 체제를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는 획일적인 역사관을 확립하여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상의 반격을 허용하고 그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체제의 기반을 공공히 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판적 공격에 대항함으로써 권력의 근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남김없이 제거해 버린 이사(李斯)는 진나라의 붕괴를 가져온 주범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오는 법이다. 살아남은 유생들은 분서 갱유의 위기를 겪으며, ‘왕후장승의 씨가 따로 있겠느냐’며 반란의 횃불을 높이 든 진승의 난에도 다수 참가하는 등 다양한 반진(反秦)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이어 한의 건국 과정에서도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유학자들은 건국 세력의 일부로서 일정한 정치적 지분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우연으로 특정한 사상을 지지하는 세력이 정치적 지분을 갖는다 하여, 자신의 사상을 문명의 기초로 확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때, 어떻게 하여 유교는 중화문명의 기초가 될 수 있었을까? 

문명으로서의 유교를 특징짓는 것은 무엇인가? 

중화제국의 유교문명권으로의 전회를 논하기에 앞서, 문명으로서의 유교를 특징짓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유교의 핵심사상은 ‘효’이다. 유교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와 그에 보답하는 자식이라는 친애(親愛)적 관계를 인간관계의 이상적인 모형으로 보고, 사회적 관계와 국가적 관계는 친애적 관계의 확장 속에 확립되어야 한다고 본다. 어린이가 어른을 공경하고,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하는, ‘서(序)’와 ‘충(忠)’이 모두 ‘효(孝)’의 확장임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효’를 문명의 기축에 두고, 이를 구현하는 예로서,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중시한다. 그렇다면 효의 문화는 인류사적으로 보편적인 것이었을까?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어제까지의 세계>에서 노인대우에 대한 문명적 차이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최근에 쓴 <어제까지의 세계>는 문명에 따라 노인의 지위가 매우 달랐음을 보여준다. 어떤 문명에서는 자식이 부모를 방치하거나 유기하고, 혹은 죽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문명은 유목형 수렵채집 사회와 북극권과 사막 지역에서 발견된다. 유목형 수렵채집 사회에서 노인을 살해(엄밀하게는 방치, 유기, 자살유도, 자살보조, 살해라 표현하여야 하지만, 간략하게 살해라 통칭한다.)하는 문명이 형성되는 이유는 유목형 사회가 요구하는 이동성 때문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말을 들어 보자.  

“거주지를 자주 옮겨야 하는 유목형 수렵채집 사회이다. 짐을 나르는 가축이 없는 유목민은 모든 짐을 등에 지고 이동해야 한다. 아기는 물론이고 4세 이하여서 어른들만큼 빨리 걷지 못하는 어린아이, 무기와 연장과 그 밖의 재산들, 또 이동 중에 먹어야 할 식량과 물까지 짊어져야 한다. 이런 짐에 노인과 병자까지 더해지면 무리 전체가 걸어서 이동하는 게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모든 유목형 수렵채집 사회가 노인 살해라는 문명적 현상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효’를 문명의 기축에 두고 이를 구현하는 예로서, 상례와 제례를 중시하는 유교적 문명이 보편적인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리고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책은 노인을 공경하는 것이 유교 문화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지만, 유교문화가 가장 강렬한 노인 존중의 문명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노인 살해를 어떻게 문명적 현상으로 볼 수 있는가라고 반론할지 모르지만, 문명이라는 것이 인간이 직면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 제도적 해법을 제시하고, 그것을 전승 가능한 체계로 만들고, 그에 기초하여 나름의 독자적인 삶의 행태를 가진 집단의 존속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노인 살해도 노인 존중만큼이나 문명적인 해법이라 할 수 있다. 노인 존중의 문화는 그의 후예들이 자신들도 노인이 되면 그와 같은 대우를 받을 것이라 예상하고 노인을 존중하는 것인데, 이것은 세대간 교환모형의 한 균형이다. 마찬가지로 노인 살해의 문화도 그의 후예들이 자신들도 노인이 되면 살해될 것이라 예상하고 그에 맞는 세대간 교환의 체계를 만든 것인데, 이것도 세대간 교환모형의 한 균형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에서의 정주혁명과 제례(祭禮) 

어느 지역이든 인간은 수렵 채집의 사회에서 출발하였고, 수렵 채집 사회에서는 노인 살해의 문명이 더 적합하였다. 그런데 노인 살해는 세대간 교환모형의 안정적 균형이기 때문에, 현재 인류들도 노인 살해를 문명의 기축으로 삼아야 하지만, 중화문명권과 같이 노인 존중의 문화를 가진 문명도 있다. 어떻게 해서, 노인 존중이라는 세대간 교환의 새로운 균형은 출현한 것일까? 가라타지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정주혁명을 새로운 균형이 출현하는 계기로 보았다.  

대인적 갈등은 그저 살아있는 자와의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주는 사자(死者)의 처리를 곤란하게 한다. 애니미즘에서 일반적으로 사자는 살아있는 자를 원망한다고 한다. 유동생활의 경우, 사자를 매장하고 떠나면 됐다. 하지만 정주를 하면, 사자 옆에서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사자에 대한 관념 및 죽음에 대한 관념 그 자체를 바꾼다. 정주한 공동체는 리니지에 근거하고 사자를 선조신으로 숭상하는 조직으로서 재편성된다. 이런 공동체를 형성시키는 원리가 호수교환이다.” 

 
   
▲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 북쪽 한나라 황제들 무덤군 끝에 위치한 전한(前漢) 제4대 황제 경제(景帝)의 무덤 양릉(陽陵)에는 2003년 개관한 한양릉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한양릉 박물관에서는 관람객이 유리로 된 통로 아래에 발굴 당시 그대로 보존된 부장품을 감상할 수 있으며, 무사, 시녀, 환관, 동물 등 약 60㎝ 크기의 다양한 도용이 그 시대의 특색 있는 매장풍습을 보여준다. 사진=뉴시스

정주를 기본으로 하는 농경문명은 이동을 기본으로 하는 유목민족과 달리 자신들이 사는 곳을 산 자와 죽은 자가 같이 쓰는 공간으로 인식한다. 사는 집, 아궁이, 그릇 그리고 여러 기물들에는 모두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 때가 묻어 있고, 또 그분들을 기억하게 하지 않는가? 그래서 죽은 자와 공존할 수 있는 질서를 만든다.  

원망을 품고 죽은 귀신은 그 곳에 남아 자신의 한이 풀릴 때까지 계속 떠돌아 다닌다는 ‘전설의 고향’은 어떠한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지 보여주는데, 죽은 자의 원망을 풀어주어야 하며, 죽을 자가 원망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것이다. 사자(死者)에 대한 두려움은 곧 사자가 될 노인에 대한 두려움을 거쳐 노인 공경으로 변화하며, 이에 기초하여 효도와 제례의 문화가 정착한다.  

유교적 사유의 출현 

사실 공자는 이러한 ‘노인 공경’이라는 세대간 교환모형의 새로운 균형이 출현하고, 그것에 바탕하여 주나라라는 국가가 건설 · 발전되는 과정을, 새로운 문명의 출현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기록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공자의 저술이나 언술은 중국 문명의 새로운 성취를 존속시킬 수 있는 문명의 체계를 구상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바로 계몽적 권력이나 정치 권력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유교의 국교화는 유교가 계몽적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민족으로서의 오랑캐의 출현과, 그 오랑캐를 교화의 대상으로 설정하게 되는 인식론적 전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유교가 다른 문명에 대해 가졌던 태도는 역사적으로 변화했다. 중국이 아직 이민족에 대해 계몽적 권력을 휘두를 만큼 힘이 있지 않을 때에는 이문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도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논어>의 헌문(憲問)을 보자.  

“공자가 말씀하셨다. ‘관중이 환공을 도와서 제후의 패자가 되게 하여 천하의 질서를 세워 통일하였으니 백성들은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다. 관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어찌 보통 사람들이 하찮은 신의를 위하여 스스로 목매어 도랑에 빠져 죽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겠는가?’” 

공자는 관중을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오랑캐로부터 중화문명을 보호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한다. 공자의 시대는 아직 오랑캐를 교화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은 것이다. 오랑캐를 교화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인식론적 전환과 그에 기반한 계몽적 권력의 쟁취는 언제 이루어진 것일까? 

흉노제국의 출현과 문명의 대립 

멸국겸병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춘추 전국의 시대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진나라의 천하통일로 온 천하를 진나라가 지배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진나라의 군사적 위협 속에서 유목제국으로 재편되었다. 흉노족의 목특이 아버지 두만선우를 죽이고, 다른 유목부족들을 흡수 통합하여 유목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진나라가 망한 이후 새롭게 건설된 한(韓)나라를 침공하여, 기원전 198년에는 한나라를 흉노제국의 사실상의 조공국으로 만들었다. 한나라는 비록 문화적으로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기는 하였지만, 군사력의 면에서는 흉노제국에 한 수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양의 조공을 바치는 굴욕적인 조약을 받아들인 것이다. 

일상 생활의 과정으로 볼 때 유목민족은 농경민족보다 군사 기술을 채득하는 데 더 좋은 조건이지만, 반드시 유목민족이 군사력 면에서 농경민족을 앞서는 것은 아니다. 농경민족의 높은 생산성은 유목민족과 대결하는 체계를 갖추는 데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지만, 이 체제는 농민들의 삶을 상당히 압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한 것은 춘추전국과 진한 교체기를 거치는 동안 농민들의 삶이 너무 피폐해졌기 때문에, 농민들의 삶을 회복시키는 치유의 시대를 갖는 것이 필요하였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하지만 흉노제국은 상당한 조공을 받고 있음에도 일상적으로 한나라를 침범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제국도 민생이 어느 정도 치유되어 흉노족과 전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군사력과 경제력이 충실해졌다. 조공을 주며 흉노제국과 화친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력으로 흉노제국을 제압하려는 무제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무제의 시도는 기원전 51년 흉노제국의 선우가 한나라 선제에게 굴복함으로써 완성되었다. 

유학자들은 왜 자기 나름의 재정관과 경제관을 확립해야 했는가? 

한 무제가 흉노족을 정복하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염철 전매제와 균수제를 운영하였는데, 이것이 민생을 위협하는 정도가 심하였기 때문에, 기원전 81년에는 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기원전 81년 염철회의가 개최되었다. <한서>의 ‘식화지’를 보자.  

“(현량과 문학은) 소금과 철, 술 등의 전매를 관리하는 관청과 균수를 담당하는 관청을 철폐하여 천하와 더불어 이익을 다투지 말 것을 청하고, 절약 근검의 모범을 보인 뒤에야 교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사대부 상홍양(桑弘羊)은 이를 반대하면서, 염철주(鹽鐵酒)의 전매와 균수(均輸) 등은 국가의 대업으로서 사이(四夷)를 제압하여 변방을 안정시키는 데 필요한 재정의 바탕이기 때문에 철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민족으로부터 중화문명이 위협을 받을 때, 이에 대항하기 위해 군비를 마련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로 유학자에게 용인되기도 하였다. 공자가 오랑캐로부터 중화문명을 지켰다고 관중을 높게 평가한 것이 그것이었는데, 관중에 대한 공자의 이 평가는 이후 주전론적 유학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바이다. 조선왕조가 후금(청)의 침략을 받았을 때, 조선의 주전론자들이 들었던 근거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장기화되면 농민경제가 위협을 받게 되어 체제 유지가 어려워지는데, 그렇다고 오랑캐를 용인할 수도 없었다.  

농민경제의 보존과 오랑캐로부터의 중국문명의 보존 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하는 딜레마 상황을 극복한 것은 오랑캐를 박멸이나 점령의 대상이 아니라 교화의 대상으로 삼는 인식론적 전환이었다.  

점령의 무기가 물리적인 무력이라면, 교화의 무기는 우월한 문명이다. 오랑캐조차 교화시킬 수 있는 우월한 문명으로 중화문명을 확립하는 것, 그것은 유교가 계몽적 권력으로 재편되는 과정이었다. 이와 같이 인식론적 전환의 과정은 농민경제의 보존과 오랑캐로부터의 중국문명의 보존 중 하나를 택하게 하고 있었던 당시의 재정구조에서 촉발되었으며,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유교가 계몽적 권력으로 재편되기 위해서는 유교가 자기 나름의 재정관과 경제관도 확립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제 <염철론>을 읽을 준비는 된 상태이다. 황로학적 법가주의와 비교할 때 유교는 어떤 상이한 경제사상을 제시하였는가? 이것이 다음 호의 과제이다. E21 

본 기사는 월간지 <이코노미21> 4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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