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세계화가 노동시장에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비정규고용의 증가이다. 거의 모든 국가가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좋은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경쟁으로 인해 노동의 유연성을 높이고 노동비용을 줄인 탓이다. 한국사회는 이러한 변화를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와 함께 훨씬 더 격렬하고 충격적으로 맞이하였다. 중앙집중화된 단체교섭이나 높은 수준의 최저임금제도를 가지고 있지 못한 만큼 보다 적은 수의 정규직만을 고용하고 비정규직에게는 적절한 보호를 제공하지 않는 기업의 관행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물론 정부가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2007년 7월부터 시행되기 시작한 비정규직 보호법이 이를 규제하기 위한 첫 시도였다. 비정규직 보호법은 상시적으로 2년 이상 고용되어 있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기간제 및 파견노동에 대한 차별적 처우를 금지하였으나 그 효과는 결코 긍정적이지 못하였다. 일부 기간제 근로자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기는 하였으나 기업이 초단기계약직의 활용, 외주화, 해고를 통해 비정규직에 남아있는 노동자의 근로조건을 더욱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정규직 보호법의 통과 이후 파견과 용역 등 불안정한 간접고용이 더욱 증가하고 있다.
비정규직 규모부터 정확히 파악해야…정부안 32.6% vs 수정안 50% 내외
비정규직의 실태를 알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작업은 그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통계청에서 발표하는 정부안이 비정규직의 규모를 축소하고 있다고 노동계가 비판하고 있어 이러한 작업 역시 여의치 않다. 통계청의 부가조사가 시작된 2000년대 이후 현재까지 임금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중 추이를 담고 있는 [그림 1]에서 정부가 발표하는 비정규직 규모는 30% 후반에서 꾸준히 감소하여 2013년 현재 32.6%로 낮아졌다. 같은 그림에 나타나 있는 수정안은 종사상 지위로 임시 및 일용직으로 분류되는 장기임시 노동자를 포함해야 한다는 노동계의 의견을 수용하여 필자가 분석한 비정규직 비중 추이를 보여준다.
정부안과 수정안은 비정규직의 여러 유형 중 한시고용을 산정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발생한다. 정부안의 한시고용에는 고용될 때 근로기간을 정한 노동자, 계약을 계속 반복적으로 갱신하는 노동자, 그리고 비자발적 사유로 계속근무를 기대하기 힘든 노동자 이 세 가지 형태가 포함되어 있다. 정부안의 비정규직 규모는 이러한 한시근로에 파견, 용역, 특수고용 등 비전형근로, 그리고 시간제근로의 비중이 합쳐져서 산출된다.
수정안도 비전형근로와 시간제근로를 한시근로와 합해서 비정규직 규모를 산정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수정안의 한시근로에는 비자발적 사유로 계속근무를 기대하기 어려워도, 또 여타 비정규직 선정 기준에 벗어난다 해도 종사상 지위로 임시 및 일용직으로 분류되는 다수의 잔여임시직이 포함되어 있다. 수정안의 비정규직 규모 역시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긴 하지만, 최근 1~2년 사이에만 50% 밑으로 떨어졌을 뿐 대부분의 2000년대 동안 비정규직 비중이 50%를 넘었다.
정부가 발표하는 비정규직 규모에 포함되지 못했던 이러한 잔여적 임시근로자는 분석결과 학력수준이나 고용된 기업규모, 노조조직률, 임금수준, 사회보험 가입률 등 여러 차원에서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에 가깝거나 아니면 그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전 임금근로자 중 거의 반수가 비정규직인지, 아니면 1/3만이 그러한지는 상당히 다른 정책적 함의를 지닌다. 추가적인 분석 결과, 비자발적 사유로 현재의 고용형태를 선택했다고 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중은 2008년 두 번째 경제위기를 시점으로 급격히 상승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파견과 용역 노동자에게서 두드러졌다.
[그림 1] 임금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중 추이, 2002-2013
비정규직 일자리의 낮은 질도 문제
그렇다면 이러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종사하고 있는 일자리의 질은 어떠한가? 가장 직관적인 나쁜 일자리 속성은 낮은 임금과 사회보험으로부터의 배제이다. <표 1>은 2013년 성별, 그리고 고용형태별 일자리 특성을 담고 있는데,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해 이러한 나쁜 일자리 속성을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특히 정부안과 대비하여 종사상 지위 상 임시 일용직으로 분류되는 다수의 잔여임시직을 포괄하는 비정규직의 정의를 사용한 수정안의 경우 그 차이는 더욱 크게 나타난다. 수정안에 따르면 여성 임금노동자의 약 58%, 그리고 남성 임금노동자의 약 38%가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었으며, 정규직 남성의 임금을 100으로 했을 때 이들의 임금수준은 각각 36.1%, 55.4%에 불과하였다. 사회보험 중 건강보험을 제외한 국민연금과 고용보험의 미적용 비율도 매우 높아 과반에 가깝거나 넘는 비정규 형태의 노동인구가 보호받고 있지 못하였다. 시간제 비정규직의 경우 남녀 모두 정규직 남성 대비 임금수준이 20% 전후에 불과하였고, 사회보험 미가입률은 80%에 이르러 모든 비정규직 형태 중 가장 나쁜 일자리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쁜 일자리 속성은 단순히 임금수준이나 사회보험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깊이 있게 다루어져야 하는 주제이다. 임시직 등 비정규형태의 고용은 빈곤으로 추락할 위험을 높인다. 또한 비정규직 직무 경험이 낙인으로 작용하여 이후의 경력개발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실제로는 노동자이나 분류상 자영업에 속하는 특수고용직이나 유사 독립 도급업자의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사용자로서의 책임 회피를 위해 기업이 이러한 특수고용형태의 노동을 과도하게 활용하다 보면 비정규직은 사고와 교육훈련 부족 등 더 큰 위험에 노출되게 되고 결국은 낮은 신뢰와 몰입도로 더 큰 악순환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
비정규직 규모 파악 미흡으로 현 정책적 대안은 한계가 있어
현재 실시중인 정책적 대안은 일단 비정규직의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다는 점에서 크게 제한된다. 노동인구의 거의 절반이 비정규직이거나 비정규직과 거의 다름없는 근로조건 하에 있다면 이들은 더 이상 특수하게 돌봐주어야 하는 노동시장의 소수자가 아니라 주된 정책 대상자가 되어야 한다. 현재 통계에서 제외되어 있는 노동인구가 교육수준과 연령 등 인구사회학적 속성, 임금과 근로조건, 사회보장의 수준 등 모든 면에서 비정규직 평균조차 하회하는 특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이들 중 다수가 공식부문에서 벗어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이 큰 의미가 없는 비공식 영세 업체의 소속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특수고용 등 비전형 노동자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노동자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정책 방향이 논의되고 있다. 산업 재해 등 특수한 분야와 관련하여 이러한 논의는 더욱 활발하다. 정치권에서 자주 언급되긴 하지만 실제로 제대로 실행된 적은 드문 노동자의 범위 확대, 파견이나 용역 근로자에 대한 근로 3권 보장, 직접고용 의무화, 사용사유 규제 등이 이러한 논의 중 보다 진전된 편에 속한다. 과도기적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논의될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며 만일 제대로 시행된다면 큰 의미를 가질 수도 있겠지만, 불안정 고용 비정규직이 상시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차별적 저임금, 노동과정상의 여러 문제들, 그리고 빈곤과 노후보장의 부족 등 여러 가지 다차원적인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결책은 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고진로(High Road) 사회’의 새로운 표준고용관계
미래에 좋은 일자리를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광범위한 정책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시장은 고용의 불안정과 저임금을 수반하는 비정규직화로 인해 큰 변화를 겪어 왔다. 최근에는 비공식 취업과 불안정 일자리가 급속도로 확장되면서, 취약 노동자가 양산되고 있다. 이러한 표준고용관계의 형해화는 포디즘 시대에 맞추어 발전한 노동권과 사회보장권을 급격하게 무력화시키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에서 한국사회 노동시장 상황에 걸맞는 새로운 표준고용관계 패러다임이 필요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실제로 많은 해외 학자들이 이러한 패러다임에 대해 제언한 바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영미권 국가에서는 노동조합이나 강력한 내부노동시장에 의해 규제되어 온 좋은 일자리를 유지하려는 암묵적인 타협이 노동시장 유연화로 인해 파괴되었다. 새로운 사회계약론은 불안한 일자리로부터의 경제적인 안정 뿐 아니라 집단 대표권과 교섭력을 제공해주는, 또 전 생애에 걸쳐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훈련받을 수 있는 권리를 주자는 입장이다.
또한 ‘고용을 넘어선’ 보편적 복지모델로의 패러다임 전환도 제안된 바 있다. 고용을 넘어선 모델의 핵심적 내용은 노동시장 지위와 상관없이, 탄생부터 죽음까지 지속적인 보호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델에서 포디즘 시대의 정규직 지위는 더 의상 의미가 없다. 모든 노동자는 생애주기의 어떤 순간에 유급노동시간을 줄인다 해도 혹은 돌봄 노동만을 수행한다 해도 적절한 사회적 보호와 임금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노동시장에의 참여여부나 고용형태와 상관없이 전 생애주기에 걸쳐 기본소득과 같은 경제적 안정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데에 이 두 입장이 의견을 같이한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은 바로 이러한 전면적인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될 것이다. 한국의 고용상황이 선진국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만큼 서구 학자의 이론이 그대로 적용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경우 고용 안정의 수준이 그 어떤 불안정한 영미권 국가보다도 낮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필자는 2012년 출간한 『고진로 사회권』의 결론 부분에서 이러한 패러다임의 도입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정책을 제안한 바 있다.
현대 사회에서 고진로 사회의 특성인 고임금 고부가가치 일자리가 다수를 차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제조업의 주변노동력과 더불어 비정규직이 많은 저임금 서비스업 일자리의 생산성을 높이는 일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이 부문으로 저임금 노동자의 공급이 계속되는 한 시장 메커니즘 하에서 이 문제의 해결은 가능하지 않으며, 따라서 보다 적극적인 국가의 개입이 요구된다. 그런 점에서 최저임금을 노동자 평균임금의 1/2 수준으로 올리고, 공공부문에서 양질의 사회적 일자리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 1990년대 이후 실시되어 왔으며 현재 시민단체와 주요 지자체가 우리나라에도 도입하고자 하는 생활임금(living wage) 역시 저임금 일자리의 개선을 위한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생활임금은 지방정부 및 지방정부와 계약을 맺는 사부문의 고용주에게 지역의 실질 생계비에 해당하는 임금을 지불하도록 조례로 명시하는 제도이다. 또한 장시간 근로를 개선하고 휴직 휴가제도의 전면적 개편을 통해 모든 노동자에게 가족을 부양할 기회와 자기계발을 위한 시간을 확보해 주어야 한다.
문제는 이미 여러 집단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제안된 바 있는 이러한 원칙과 제안이 실시될 수 있도록 강제하는 사회적 세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조합은 특수한 기업별 조직 형태로 인해 이와 같은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상당히 제한적이다. 그렇다면 작업장에서 노동자의 대표성을 제고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에 대해 고민해 보아야 한다. 작업장에서의 산업 안전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노사 공동위원회를 활성화하는 것도 이러한 방향으로의 첫 걸음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활동이 지자체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미국 위스콘신 주 금속산업부문의 노사 파트너십(Wisconsin Regional Training Partnership)과 같은 노-사-정 협력 프로그램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이 파트너십은 저임금노동자에 대한 교육훈련을 통해 고임금 제조업분야의 취업을 가능하게 하였고, 동시에 쇠퇴해 가고 있던 밀워키(Milwaukee) 지역의 산업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시민의 생애주기에 맞추어진 보다 진보적인 소득 재분배 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 앞에서 일자리의 개선 방안에 대해 논의하였으나 모든 일자리를 양질의 일자리로 만들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당연히 매우 크다. 이러한 제약과 불안을 완화시켜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대안은 기본 소득(basic income)으로부터 나온다. 물론 전체 시민을 대상으로 전 생애기간 동안 제공할 수 있는 기본소득은 아직 정치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가능하지 않겠지만, 생애의 중요한 시기에 한시적으로 제공되는 기본소득은 재충전과 재훈련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노동력의 질을 제고하는 결과도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고진로 사회권 패러다임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복지정책의 전면적 개편이 불가피하다. 정규직 등 기득권자를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정책을 수정하여 비정규직과 하층계급을 포괄하고 만일 필요하다면 이들에게 우선적인 기회를 주고자 노력해야 한다.
또 다른 방안은 복지제도의 디자인과 집행 과정에 가능한 한 많은 시민사회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다. 제 3섹터와 사회적 경제의 활성화도 그 한 방안이 될 수 있으며, 지자체에서 예산을 시민의 제안과 참여를 반영해 결정하는 것도 시도해 볼 수 있다. 이는 시민사회에 단순히 복지서비스의 집행을 이관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공공성과 민간부문의 효율성의 시너지 효과를 찾아내려는 진지한 노력, 그리고 시민사회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여 복지 정책을 구성해야 한다는 책무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 기반 하여 이루어지는 서로의 장점이 융화, 활성화된 국가-시민사회 관계의 형성을 의미한다. E21
본 기사는 월간지 <이코노미21> 4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