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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경제체제의 윤리적 기초를 묻다
유교, 경제체제의 윤리적 기초를 묻다
  • 박이택 본지 편집기획위원/고려대 연구교수
  • 승인 2014.08.29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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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고전으로 읽는 경제사상사-전쟁과 평화에 대한 재정회계 논쟁서:<염철론>(2)> 漢代, 염철전매제와 균수법에 대한 유가와 법가의 근본 대립

공자는 친애를 기반으로 한 인애의 공동체로서 국가적 문명이 출현하는 과정을 기록하여 전함으로써, 그 문명적 성취가 계속 유지 발전되기를 기원하였다. 그렇지만 이 인애의 공동체로서 주 나라는 춘추전국의 시대를 거치며 형해화 되었으며, 최초의 통일국가 진 나라에 이르러서는 그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천하 무도(無道)의 세계가 되었다. <염철론>에 등장하는 한 나라 유학자들의 시대적 과제는 유도(有道)의 세계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제 유교에 있어 유도의 세계와 그에 걸맞는 경제적 이상사회에 대해 살펴보자.

관자의 도(道)와 공자의 도(道)

앞서, 황로학적 법가주의자들의 교과서인 <관자>에 담긴 경제사상을 살펴보면서, 관자의 도(道)는 일반 백성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공리(功利)주의적 질서를 의미하며, 황로학적 법가주의자들은 이 공리주의적 질서로서의 도를 활용하여 군주제적 통치체계를 확립하고자 하였다고 지적한 바 있다.

공자도 도를 말하는데, 그것은 황로학적 법가주의자들의 도와는 다른 도였다. 공자의 도라고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 <논어>‘이인’편)는 문장일 것이다. 이 문장의 핵심어는 ‘도(道)’와 ‘사(死)’이다.

공자의 도의 본뜻은 “군자는 근본에 힘쓰니, 근본이 서면 도가 생긴다”(君子務本, 本立而道生: <논어>‘학이’편)는 문장에서 간취할 수 있다. 공자의 도는 바로 군자의 도인 것이다. 군자는 근본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군자가 추구하는 근본적인 물음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가’이다. 그것은 하늘이 자신에게 명한 것 즉 자신의 천명을 아는 것인데, 자신의 천명을 깨달으면, 자신이 살아가야 할 길이 저절로 드러나므로, 근본이 서면 도가 생긴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로 보아 공자의 도는 일반 사람들이 추구하는 공리(功利)주의적 도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가를 물어서 얻은 인의의 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인의의 도(道)와 죽음(死)과의 관계는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여 인(仁)을 저버리지 않으며 스스로 몸을 죽여서 인을 이룬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논어>‘위령공’편)”는 문장, 특히 살신성인이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다. 군자가 추구하는 것은 삶이 아니라 인(仁)이기 때문에, 삶을 위해 인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인을 위해 삶을 버리는 것이다.

이로써 공자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한 것은, 공자의 도가 군자들이 추구하여야 할 살신성인의 길이었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장을 다시 풀어쓰면, 아침에 천명을 깨달으면, 바로 그 날부터 죽음을 무릅쓰고 그 길을 가야한다는 것이다. 이 문장에 아침과 저녁이라는 단어를 넣은 것은 깨달음을 얻었으면 긴박하게 실행하여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인애(仁愛)의 공동체의 경제적 기초 (1): 공자의 부(富)

살신성인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애의 공동체, 그것이 바로 공자가 추구하는 이상향이었다. 이 인애의 공동체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언뜻 보면 이 공동체는 인간의 삶보다 인애라는 가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인애가 추구하는 것은 사람의 삶을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공자가 살신성인이라는 문장 뒤에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 <논어>‘위령공’편)”라는 문장을 남겨놓은 뜻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사실 살신성인이란 사람의 삶을 죽음을 무릅쓰고 지키려 하는 것이어서, 가장 고귀한 것은 인(仁)도 아니고, 의로운 죽음도 아니고, 바로 사람의 삶인 것이다.

살신성인이란 사람의 삶을 지키는 사람다운 삶이라 할 수 있는데, 사람의 삶과 사람다운 삶이 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살기에 각박한 사람의 삶은 사람다운 삶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사람의 삶이 사람다운 삶으로 되기 위해서는 우선 생계의 보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논어> ‘자로’편을 보자.

“공자가 위나라로 갈 때, 염유가 말을 몰았다. 공자가 말하였다. ‘인구가 많구나!’ 염유가 묻기를 ‘이미 인구가 많으면, 다시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 공자가 답하기를 ‘부유하게 해주어야 한다.’ 염유가 묻기를 ‘이미 부유해졌으면, 다시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 공자가 답하기를 ‘교육해야 한다.’”

공자는 사람을 가장 중시했다. 다음이 생계이고, 그 다음이 교육이다. 입에 풀칠도 할 수 없으면서 예의를 차릴 수 없음은 공자도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공자는 어떻게 해야 부유하게 할 수 있는지의 문제, 즉 생계를 보장할 수 있는 경제체제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 중국 산동성 영성시 성산두(成山斗)에 있는 진시황 동상. 한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의 성산두에 진시황이 2차례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다. 산동성(중국) 롱청시(英成市)=뉴시스

인애의 공동체의 경제적 기초(2): 맹자의 정전(井田)

공자는 인애의 공동체는 사람들의 생계가 해결된 위에 만들어질 수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하여야 생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생계의 문제는 공자에 있어 open question이었다. 이 open question에 도전한 사람이 맹자였다. <맹자> ‘양혜왕 상’을 보자.

“고정적인 생업(恒産)이 없으면서도 항상적인 마음을 지니는 것은 오직 선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일반 백성의 경우는 고정적인 생업이 없으면 그로 인해 항상적인 마음(恒心)도 없어집니다. 만일 항상적인 마음이 없다면 방탕하고 편벽되고 간사하고 사치스러운 행위를 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죄에 빠지는 데 이른 이후에 그것을 좇아서 형벌에 처한다면, 그것은 백성들을 그물질해 잡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밝은 왕은 백성들의 생업을 제정해 주되 반드시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충분하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살릴 만하게 하여, 풍년에는 언제나 배부르고 흉년에도 죽음을 면하게 합니다. 그렇게 한 후에 백성들을 몰아서 선한 데로 가게 하므로 백성들이 따르기가 쉽게 됩니다.”

항산이 없으면 항심도 있을 수 없으므로, 인애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백성들의 생업을 제정하여 주어야 한다. 어떻게 백성들의 항산의 체계를 만들어 줄 수 있는가? 맹자가 제시한 해법은 바로 정전제(井田制)였다.

정전제란, 토지를 우물 정자처럼 아홉 등분하고, 가운데 9분의 1을 공전(公田)으로 삼고, 나머지 9분의 8을 여덟 가구에게 균등하게 나누어주고, 이 여덟 가구가 먼저 공전의 일을 한 후, 그 일을 마치면 자신들의 사전을 경작하게 하는 토지 분배 및 경영 방식이다. 공전에서 나오는 수입은 왕실과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쓰고, 사전에서 나오는 수입이 각 가정의 생계 재원이 되는 셈이다. 비록 공전에 대한 노동 조세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균등하게 분배된 토지를 스스로 경작하여 먹고 사는 일종의 ‘장인 사회주의(artisan socialism)적 해법’이다.

맹자의 정전제와 인의를 해치는 군주에 대한 폐위(廢位)론이 결합되면, 혁명적 토지 사회주의 이념이 된다. 혁명적 토지 사회주의 이념은, 이후 중국에서 무도(無道)한 왕조의 멸망에 뒤이어 새로운 왕조가 건설될 때, 건국의 이념으로 활용되곤 했다. 조선왕조의 건국과 과전법의 실행도 맹자의 혁명적 토지 사회주의 이념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시장 친화적 접근법(market friendly approach)은 부민부국의 방책이었는가?

중국의 유학자들의 경제사상은 백성들의 항산의 체계를 위협하는 요인들을 식별하고, 그것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각 시대 유학자들의 경제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항산의 체계를 위협하는 그 시대의 문제는 무엇이었는지를 우선 파악하여야 한다.

한 무제의 시대에 백성들의 항산의 체계를 위협하였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유학자들은 염철 전매제와 균수법이 백성들의 항산의 체계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았다. 반면 황로학적 법가주의자들은 그것을 시장 친화적 접근법으로서 부민부국(富民富國)의 방책으로 보았다. 먼저, 황로학적 법가주의의 의견을 들어보자. <염철론>의 본의(本議)를 보자.

대부가 말했다. “옛날에 국가를 세웠던 사람들은 본업과 말업이 모두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을 서로 소통하게 했습니다. 즉 시장을 열어 사람들이 구하는 것을 한 번에 해결함으로써, 사방의 백성을 모이게 하고 온갖 재화도 모이게 하여, 농부ㆍ상인ㆍ장인들은 각기 자기가 필요한 물건을 얻고, 교역을 마친 후에 돌아가도록 했습니다......그러므로 장인이 나오지 않으면 농기구가 부족하게 되고, 상인이 나오지 않으면 진귀한 재화들도 유통되지 못하게 됩니다. 농기구가 부족하게 되면 곡식 생산을 늘릴 수 없고, 진귀한 재화가 유통되지 않으면 재정이 궁핍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염철 전매제와 균수법은 적체된 재화를 소통시켜서 공급과 수요를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이니, 이를 폐지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염철 전매제와 균수법은 장인과 상인의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적체된 재화를 소통시키는 시장 친화적 접근법이며, 시장 친화적 접근법은 옛날 국가 제도를 만들었던 성인들도 추구하였던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그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이 제도들은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민생을 두텁게 하는 효과도 있음을 지적하였다. <염철론>의 본의(本議)를 다시 보자.

대부가 말했다. “『관자(管子)』에 이르기를, ‘나라에 비옥한 토지가 많이 있음에도 백성들의 식량이 부족한 것은 농기구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며, 산해의 자원이 풍부한데도 백성들의 재화가 부족한 것은 상공업이 발달하지 못한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 등 여러] 물건들은 산 사람을 부양하고 죽은 사람을 보낼 때 꼭 필요한 것들로, 상인의 힘을 빌어 유통되고 장인의 힘을 빌어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배와 노를 창안해서 강과 계곡의 수로를 통하게 하고, 소와 말에 수레를 매어 언덕과 평지의 육로를 두루 통하게 해서 먼 곳의 벽지에까지 이르게 했던 것은 각종 물품을 서로 유통시켜 백성을 편리하게 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선제(先帝)께서는 철관(鐵官)을 설치하여 농기구의 수요를 충족시켰고, 균수관(均輸官)을 설치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넉넉하게 하셨습니다. 염철 전매와 균수의 제도는 모든 백성이 떠받들고 이에 의지해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는 것이므로, 이 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농기구가 충분히 공급되면 식량이 풍부하게 되고, 상공업이 발전되면 산해의 자원들이 개발되어, 백성들의 재물이 넉넉해지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뿐이랴? 염철 전매제와 균수법은 재정 수입을 낳는데, 그것은 흉노족을 정복하는 군비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없애서는 안 되는 제도라 주장한 것이다.

시장 친화적 접근법(market friendly approach)은 항산의 체계를 위협하였는가?

그렇다면 왜 유학자들은 부민부국의 방책인 염철 전매제와 균수법을 비판하였는가? 그 밑바탕에는 시장 친화적 접근법이 야기하는 양극화의 문제가 있었다. 시장 친화적 접근법은 한 사회의 부를 늘릴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분배되는가에 따라 항산(恒産)의 체계에 미치는 효과는 사뭇 달라진다.

이 시기에 시장 친화적 접근법은 농기구를 생산하고, 국지적 교역을 증진시키는 것에 머무르지 않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장건은 파미르 고원을 지나 대월지에 이르는 새로운 실크로드를 개척하였다. 실크로드를 통해 이루어진 동서양간의 광역적 유통은 권력층과 부유층의 고급 물품의 생산 및 유통의 체계를 발전시킴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삶을 압박하는 측면이 있었다. 이른바 글로벌 경제화에 따른 국지적 생계권의 해체화 현상이 진행된 것이다. <염철론>의 본의(本議)를 다시 보자.

문학이 말했다. “나라에 비옥한 토지가 많이 있음에도 백성들의 식량이 부족한 것은 상공업이 성하고 본업이 황폐해졌기 때문이고, 산해의 자원이 풍부한데도 백성들의 재화가 부족한 것은 백성들의 생활용품을 생산하는 데는 힘을 쓰지 않고 지나치게 정교한 사치품을 많이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강의 마르지 않는 원천으로도 새는 술잔은 채울 수 없고, 산과 바다(의 흙과 물)로도 흐르는 계곡은 다 채울 수 없는 것입니다. ..... 상인들을 억압하여 이익의 통로를 막아 놓는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잘못을 저지르게 될 터인데, 하물며 위에서 이익을 추구하면 어찌될 것입니까. 『전(傳)』에서 이르기를, ‘제후(諸侯)가 이익을 좋아하면 대부(大夫)는 인색해지고, 대부가 인색하면 사(士)는 탐욕스러워지고, 사(士)가 탐욕스러우면 백성(百姓)은 도둑질을 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지금 국가가 이익으로 향하는 구멍을 열어 놓아 백성들에게 (타고 올라 갈) 범죄의 사다리를 만들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초의 광역적 유통은 정교한 사치품의 생산 및 유통을 강화하여, 백성들의 삶을 억압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지배계급의 이익추구 경향도 강화되었다. 이로써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강화되고, 백성들은 이를 감당하게 위해 도둑질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유학자들도 시장이나 상공업의 유용성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 유용성을 넘어 항산의 체계를 해칠 정도로 방치하여서는 안 됨을 주장하였을 따름이다. <염철론>의 본의(本議)를 다시 보자.

문학이 말했다. “백성을 덕으로써 인도하면 백성은 순박해지고, 백성에게 군주가 이익을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주면 민간의 풍속은 각박하게 됩니다. 풍속이 각박해지면 도의를 저버리고 이익만을 좇게 되며, 이익만을 좇게 되면 백성들은 이익을 좇느라 길거리에서 서로 부딪치고 시장에서 북적거리게 될 것입니다.......이런 까닭에 왕자(王者)는 본업을 중시하고 말업을 물리치며, 예의(禮義)로써 백성의 욕망을 막아 식량과 재화를 충실하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시장에서 상인들은 쓸모 없는 물건을 유통시키지 않게 되고, 장인들도 쓸모 없는 기물을 만들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상업이란 적체된 재화를 소통시키는 것이고, 수공업이란 필요한 기물을 갖추도록 하는 것일 뿐, 이들이 곧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 근본 사업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상업은 적체된 재화를 소통시키고, 수공업은 필요한 기물을 갖추는데 머물게 하고, 백성들의 항산의 체계를 위협하는 쓸모 없는 물건들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것을 방지할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예의로써 백성들의 욕망을 규제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사람의 삶이란 더불어 사람답게 사는 것인데, 이익 추구가 이를 해친다면, 이에 대해 윤리적 규제를 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2014년 4월 한국의 봄, 피기 전에 시든 영혼들이, 2000여 년 전 경제체제에 윤리적 규제를 가할 필요가 있다는 유학자들의 주장을 되씹어 보게 한다. 그들을 추념하며, 프레드 하쉬의 <경제성장의 사회적 한계>에서 발견한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사람들은 법률에 의해서 강요된 제한 때문만이 아니고, 도덕·종교·관습 및 교육에서 유래되는 자동적인 제한장치에 따르기 때문에 사회에 부당한 손해를 끼치지 않고 자신의 이기심을 추구하도록 신용하여도 괜찮을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지 <이코노미21> 5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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