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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위험사회 그리고 성찰적 근대화
세월호, 위험사회 그리고 성찰적 근대화
  • 박정서 자유기고가
  • 승인 2014.10.06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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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한국, 후진국형 사고위험과 구조적 위험이 공존하는 이중 ‘위험사회’ …건강한 공동체 복원 위해선 심층적이고 구체적인 성찰 필요해

얼마 전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과거의 삼풍백화점 붕괴나 대구지하철 참사와 유사한 대형사고로 치부되기에는 파급효과가 너무나 커서 어떤 이들은 앞으로 한국사회는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 사건에서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자식과 형제 자매를 졸지에 잃은 가족의 고통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같이 슬퍼하고 안타까워 했고, 이후 구조작업과정에서 드러난 해경과 감독부처의 무능과 무책임의 민낯을 보고 나서는 이제까지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믿었던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 심한 회의와 불신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이 참사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해운사와 선원들의 이해할 수 없는 무책임한 행동이 그들의 종교적 배경과 연관이 있다 하더라도, 세월호 같이 노후화된 선박의 도입을 가능하게 하였던 관련 법률의 개정부터 선박의 개조 및 안전검사, 운항관리 및 감시 그리고 인명구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 걸쳐서 해당 업무를 감독내지 관리하는 기관과 업무담당자가 이러한 참사의 예방에 전혀 기여한 바가 없다는 놀라운 사실에 분노를 느꼈다.

이러한 분노는 처음에는 해운사와 선원들 그리고 이들이 속한 종교집단의 지도자, 구조임무에 실패한 해경에게 향하다가 이제는 정부당국과 여당 그리고 정치권 전반을 겨냥하고 있다. 이에 따라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이익집단화된 관료들과 이들로부터 전관예우를 받는 관피아가 기득권을 누려온 적폐에 있다고 보고 국가 대개조 수준의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할 것을 공언하고 있다.

그러면 참사의 원인이 과연 관피아에 있고 이들만 척결하면 참사는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 일부 진보진영에서 주장하듯이 박근혜정부가 물러나고 국민과 원활히 의사소통할 수 있는 유연한 정부가 들어서면 해결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세월호 사건에서 드러나는 여러 문제들을 다양한 시각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말하듯이 일단 거시적으로 세계 속 한국의 경제 위상은 일견 대단해 보인다. 제조업 부문에서 휴대폰 출하량 세계 1위, 반도체 매출액 2위, 선박 수주·건조량 2위로 세계 정상 수준이다. 자동차 생산 대수는 5위, 조강 생산량 6위, 타이어 매출액 7위로 선두 그룹이다. 그 결과 무역 부문에서 수출 7위, 교역 규모 8위, OECD 회원국 중엔 경제규모 10위의 위상을 가진다.

또한 문화와 국가 이미지 측면에서도 최근 수 년간 K-pop과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대표되는 스마트하고 밝은 이미지로 많은 아시아권 국가들로부터 부러움과 사랑을 받았다. 그 결과 우리는 20여년 이상 무기력해지고 침체된 분위기의 일본을 식민지 지배 이후 처음으로 대등해지거나 일부 분야에서는 오히려 앞질렀다는 우월감을 불과 얼마 전까지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모습 뒤엔 우리가 애써 외면해 온 또 하나의 어둡고 우울한 모습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삶의 질을 보여주는 지표를 보면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아주 참담한 수준에 있다. OECD 국가들의 2013년 팩트북(Factbook) 따르면 한국의 자살률은 10만명당 33.3명으로 OECD 국가 평균 12.4명에 비해 거의 3배 수준으로 월등히 높다. 문제가 심각한 것은 그 추세인데 최근 몇 년간 일부 OECD 국가에서는 자살률이 감소하고 있지만 한국의 자살률은 오히려 추종을 불허하는 수직상승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한국은 인구 10만명당 교통사고 사망자수가 2011년 기준으로 OECD 평균이 6.8명인데 비해 10.5명으로 33개 회원국중 32위에 올라 있는데 이는 한 해 5,000명 이상이 죽는다는 의미가 된다. 한국은 산재 사망율에서도 OECD국가중 1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2013년 기준 하루에 5.3명꼴로 산재사망자가 발생해 한 해 총 1,929명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교통사고와 산재만으로도 매월 2척 이상의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과 밀접히 관련된 삶의 지표가 열악하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한국사회가 근본적으로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심각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이 지향했던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로 대표되는 고질적인 가난극복을 위한 전국민 총동원 체제로부터 시작하여 이후 이룩한 경제개발성과를 기반으로 선진화를 완성하고자 했던 우리의 노력이 국민 개개인의 생명과 함께 무엇인가 중요한 공동체의 가치를 희생하면서 맹목적으로 질주해 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발전방향에 대한 새로운 모색 필요

지금 한국사회에서 연속하여 발생하는 참사와 우울한 삶의 지표는 지금까지 우리가 추구한 사회발전 방향과 과정 전반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 뿐 아니라 향후의 발전방향에 대한 새로운 모색을 요구한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 직후 나온 그의 저작 「위험사회」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 깊이 천착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우리사회가 근대화, 합리화의 과정에서 깨끗하게 청산하지 못한 전근대적인 네포티즘(nepotism)같은 후진성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울리히 벡의 주장은 우리가 지향하는 선진화 모델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여전히 함의를 가진다. 벡은 위험이 평상적 수준을 벗어나고 산업의 논리 속에서 체계적으로 재생산되면서, 현대 산업사회는 그 정점에서 위험사회로 이행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합리화 내지 근대화로 알려진 산업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부가 재생산되고 축적됨과 동시에 위험은 이러한 부를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당위성으로 변모하였다는 것이다.

수 년전 타계한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피터 번스타인은 수 천년의 인류역사에서 현대와 과거를 구분 짓는 기준을 과학기술의 진보 혹은 자본주의나 민주주의의 진보보다 ‘위험에 대한 지배(mastery of risk)’라는 측면에서 찾을 것을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인류는 위험을 지배할 수 있었기에 신의 변덕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미래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자연 앞에서 더 이상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위험이란 부를 얻기 위해서 당연히 감수해야만 하는 난관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고 ‘위험 감수(risk taking)’가 현대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기폭제 가운데 하나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위험 감수를 통해 경제성장이 이루어 졌고 나아가 삶의 질이 개선되고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 졌다.

▲ 5월 22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민영화와 위험사회,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말한다’ 정책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지적한 바에 따르면 과감하게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기업가정신으로 칭송 받고 부가 ‘위험’을 감수했을 때에만 수여되는 트로피로 인식됨에 따라 경제활동이 대부분 합리적인 동기에 따라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부를 향한 탐욕스럽고 비합리적이고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의 영향도 커져서 경제시스템이 주기적으로 불안정해진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2008년의 미국와 유럽의 부동산 거품 붕괴와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이러한 ‘야성적 충동’이 적절히 제어되지 못할 때 얼마나 심각한 경제적 파국이 초래 되는지 볼 수 있었다.

‘야성적 충동’ 제어되지 못할 때 심각한 경제적 파국 초래될 수 있어

우리는 확률예측이라는 도구를 활용하여 위험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오늘날 전례 없이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다. 고대나 중세시대에서도 사람들은 직관에 의존하고 득실을 따져서 그럭저럭 미래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지만, 위험이나 의사결정의 본질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파스칼과 페르마의 확률이론이 나오고 나서야 가능해졌다.

수학자들은 초기 확률이론에 계속해서 독창적이고 정교한 이론을 하나하나 추가하여 위험관리의 정량기술도 발전시켜 나아갔다. 현재 ‘종형 곡선’이라고 알려져 있는 정규분포구조와 표준편차의 개념은 모두 오늘날 잘 알려져 있는 ‘평균법칙’을 구성하는 것이며 위험의 양을 정하는 필수도구이다. 이러한 확률이론의 구사를 통해 위험을 관리하지 못했다면 큰 강을 가로 지르는 대규모 다리도 설계하지 못했을 것이고 우주비행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며, 애플이나 구글 같은 혁신기업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자본시장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는 교통사고나 의료사고는 물론 지진이나 쓰나미의 피해까지도 예측가능하다고 여기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블랙스완」이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진 당시 통계학자이자 파생상품 트레이더인 나심 니콜라스 탈렙은 이러한 정규분포에 기반한 확률예측의 효용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세계는 일상적이고 작은 사건이 지배하는 ‘평범의 왕국’과 희귀하고 비일상적인 사건이 블랙스완 처럼 갑자기 발생함으로써 전체를 바꿔 버리는 ‘극단의 왕국’이라고 하는 두 가지 종류로 나뉘어 지는데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가 ‘극단의 왕국’에 속해 있다고 주장한다.

탈렙은 레바논 내전을 겪은 자신의 경험을 비롯해 국지적인 전쟁, 미국 금융시장의 붕괴 등 역사적 사건들을 근거로 확률모델에 따르면 100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사건들이 현실에서는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불연속적이고 급격한 비약이 일어날 가능성을 무시하는 정규분포는 이러한 현실의 극단적인 사건들을 설명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우리가 불확실성을 길들이고 있다는 확신을 주어 결과적으로 위험을 예방하기 보단 위험을 부추기는 ‘거대한 지적 사기(Great Intellectual Fraud)’라며 확률이론의 정체를 폭로 한다. 탈렙은 우리의 고정관념과 달리 우리가 사는 세계가 극단적인 것, 미지의 것, 개연성이 극히 희박한 사건에 의해 지배되고 결정되므로 극단적인 사건을 예외로 치부하여 덮어 버리지 말고 오히려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인간 지식의 진보와 성장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바로 그 진보와 성장 탓에 미래는 갈수록 예측이 어려워질 것이지만 확실하고 설명가능한 것만을 추구하는 플라톤적인 태도와 확률이론은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전에 예측할 수 없는 극단적 대형사건이 ‘블랙스완’

탈렙에 따르면 인간이 지금까지 구축한 인위적인 복잡계에서는 예측가능성이 떨어지거나 심지어 통제하기 힘든 연쇄 반응의 고리가 폭포수처럼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다 결국 사전에 예측할 수 없는 극단적이고 극심한 충격을 주는 대형사건이 터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블랙스완이라 부르는 것이다.

블랙스완처럼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으면서 우리가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는 것들(unknown unknowns)이 상황을 최악으로 끌고 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쉽게 인지되지 않으면서 그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문제들은 과거의 경험으로는 전혀 예측이 불가능할 뿐더러 실제로 현실화될 경우 그 효과가 증폭되어 우리가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문제들 보다 훨씬 더 치명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처럼 명백하게 문제로 인식되는 안전사고들은 시스템에 타격을 주고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긴 하지만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수준까지 전개되지 않지만(?) 블랙스완은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이렇게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현실화될 경우 치명적인 위험은 심화되는 양극화, 공적 신뢰(public trust)의 붕괴, 원자력발전소 안전문제 등을 들 수 있다.

최근 프랑스의 경제학자인 토마스 피케티 교수는 「21세기 자본론」을 통해 유럽과 미국에서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켰는데, 상대적으로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한국에서도 아직 정확한 데이터가 없긴 하지만 경제성장율을 상회하는 자본수익율 때문에 발생하는 부의 양극화와 소득불평등 추세는 유럽이나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양극화와 소득불평등 문제가 심화되면서 저성장 체제가 장기간 유지된다면 젊은 세대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 버리고 기존의 사회체제를 보호하고 계속 유지해야 할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사회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응답이 “태어나고 싶다”는 응답을 크게 추월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현재 한국사회의 공적 신뢰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사실과 취약한 공동체 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원전마피아와 관련된 납품비리 사건이 연이어 터지고 있고 당초 설계보다 운영기간을 연장해 논란이 되고 있는 원자력발전소의 안전문제도 일본 후쿠시마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소해 보이는 문제 하나가 국가 전체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산업사회의 진보이자 해체 과정이 성찰적 근대화 과정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가 산업사회의 정점에서 맞이 하게 된 것은 울리히 벡이 말하듯 구조적 위험으로 가득 차 있는 참으로 아슬아슬한 ‘위험사회’이다. 그는 위험이 우리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고 산업사회의 발전논리 속에서 확대 재생산되면서 현대 산업사회가 존재론적으로 재앙에 근거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이전의 위험과 달리 현대의 위험은 더 이상 특정 지역이나 집단에 한정되어 있지 않으며 국경을 넘어서 퍼져가는 지구화의 경향을 보여 준다. 지구 온난화나 원자력발전소 사고 같이 현대의 위험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위험이 아닌 묵시론적 파멸이고 후세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지금까지 처럼 위험을 감수하면서 맹목적으로 부를 추구하는 것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울리히 벡은 사회가 실제로 진화하려면 근대화는 반드시 ‘성찰적(reflexivity)’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벡에게 성찰성은 추상적인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일반 대중 속에서 전개되는 과학에 대한 비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성찰성을 획득하려면 산업사회의 원리들 자체를 성찰하여 산업사회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 산업사회의 진보이자 해체의 과정 이것이 성찰적 근대화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이 과정을 이끄는 요체는 무엇 인가? 벡에 따르면 일반 대중의 참여적 비판을 제약하는 과학기술 전문가체계의 해체와 재구성이 바로 그것이다. 벡의 주장은 일부 전문가 집단과 기업이 과학기술 지식을 독점하도록 놔두지 말고 일반 대중이 개입할 수 있도록 하여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제어력을 높이자는 것이다. 벡의 위험사회 이론은 우리 한국사회가 지난 수십 년간 무비판적으로 추구해온 근대화, 현대화 모델과 우리 사회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선진국의 모습이 근본적으로 어떠한 한계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지 를 보여 준다.

▲ 2008년 4월 3일 독일의 사회학자로 ‘위험사회’의 저자인 울리히 벡 교수가 한국을 방문해 서울 강남 봉은사를 찾아 한국 불교를 체험하고 있다. 사진=봉은사 제공/뉴시스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참사 대책으로 사고 현장에서 구조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해경을 해체하고 국무총리실 산하에 국가의 재난안전을 총괄하는 가칭 ‘국가안전처’를 신설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대책은 각 부처에 나누어져 있는 재난 및 안전관련 기능을 모아서 총리실 직속 기구화함으로써 컨트롤타워로서의 위상을 강화하고 유관 부처와의 협조를 보다 원활하게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사고대책과 비교하면 중앙부처의 신설이 포함된 보다 포괄적인 조치이긴 하지만 큰 사고가 터졌을 때 마다 발표되는 ‘안전에 만전을 기하는’ 대책과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일반 대중의 참여를 이끌어 내고 사고현장에서의 대응력을 강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안전사고에 대한 ‘스위스 치즈’ 모델로 유명한 제임스 리즌은 복잡한 시스템을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도입한 안전장치는 새로운 ‘사고유형’ 즉 새로운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잠재성을 키울 위험성이 있다고 본다. 「정상사고(Normal Accidents)」라는 책을 쓴 찰스 페로우 교수도 복잡한 동시에 ‘강하게 결합된(tightly coupled)’ 시스템은 아주 위험하다고 보는데, 복잡성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이 잘 못될 수 있음을 뜻하고 강결합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너무 빨리 확산되어 실패에 적응하거나 뭔가 다른 방법을 써보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예를 보면 미국에서도 9.11테러가 발생하고 나서 모든 유형의 안전사고를 총괄할 중앙부처로서 공룡같이 방대한 국토안보부를 신설하고 여기에 연방재난관리청(FEMA)를 편입시켰는데 국토안보부가 테러대응에 노력을 집중하고 재난대응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인력의 이탈로 현장조직이 약화되어 결국 2005년 발생한 카트리나 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재건을 시작하려면 우선 패배부터 인정해야 하는데 한국은 얼굴 화장만 고치고 있다.”는 한 일본 전문가의 지적처럼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대책의 핵심 내용은 사고원인과 구조실패에 대한 깊은 성찰없이 결국 안전에 관련된 기존 업무분장을 조정해서 신설되는 부처에 모으는 것으로 결론 나고 있다. 탈렙은 이와 같이 기계적이고 어설픈 개입은 의미 있는 신호와 왜곡된 잡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적 무능함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이 자신이 보지 않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알고 있는 지식을 과대평가해 하향식(top-down)으로 접근하는 것은 소비에트-하바드 환상(soviet-Harvard delusion)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환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혜택은 작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부작용은 엄청 큰 정책이나 행위에 엮이도록 한다. 오늘날과 같이 복잡한 시스템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복잡한 규정과 정책 보다 오히려 단순한 해결책이 더 효과적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복잡한 시스템일수록 예상하지 못한 결과의 사슬이 계속 증가하고 불확실성 때문에 안전을 위한 개입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고 이것은 또 다른 개입을 낳으며 결국 이전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08년의 금융위기에서 주역을 담당했던 신용부도스왑(CDS)는 원래 채권을 발행한 기업이나 국가가 부도가 나더라도 원금을 보장받기 위해 도입된 위험관리 상품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위험을 줄여주는 대신 더 확대시키고 결국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금융시스템을 붕괴직전까지 몰고 갔다.

위험 작을 수 있지만, ‘제로’일 수는 없어

우리 한국사회는 설상가상으로 세월호 참사 같이 전형적인 후진국형 사고위험과 원자력발전소 같이 울리히 벡이 말하는 산업사회의 정점에서 나타나는 구조적인 위험이 공존하는 이중위험사회이다. 문제는 오늘날과 같이 복잡한 세계에서 모든 유형의 사고 특히 선진국형 사고는 사전에 예측해서 완벽하게 예방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정상사고 이론’에 따르면 사고는 분명 일어날 것이다. 위험이 작을 수는 있지만 절대 ‘제로’일 수는 없다고 한다. 여기서 탈렙은 그의 독특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데 그는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예측하는 것보다 불확실성과 변동성 때문에 발생하는 피해의 민감도 측면에서 시스템을 보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시스템이 어떤 무작위적인 사건이나 충격에서 손실보다 이익이 더 크면 ‘안티프래질(antifragile)’하고 그 반대는 ‘프래질(fragile)’한 것이다.

안티프래질은 살아남은 모든 자연적 시스템 혹은 복잡계의 특징이다. 자연은 더 나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서 과거에 발생하지 않았던 상황에 대비한다. 즉 자연은 스스로 알아서 초과보험에 가입하여서 사고가 발생해도 다시 원상으로 복구하고 오히려 이전보다 더 튼튼해질 수 있는 복원력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사회시스템도 세월호에서 화물을 더 적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빼버린 평형수를 주입해서 복원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맹목적인 생산성 추구와 자유시장경제 시스템은 우리 한국사회로 하여금 이러한 초과보험내지 평형수를 비생산적이고 반시장적인 규제로 치부해 버리게 했다. 울리히 벡에 따르면 과학기술의 합리성을 추구할 때 마치 외눈박이 거인처럼 경제적 유용성만 추구하고 생산성을 제고하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은 대체로 무시하다가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인 칼 폴라니는 현대의 고전이 되어 버린 그의 대표작 「거대한 전환」에서 그가 ‘악마의 맷돌’이라 명명한 소위 자기조정 시장경제라는 기제가 원래 사회에 속해 있던 경제현상을 분리시켜서 원래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이 아니었던 자연과 노동의 상품화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맹목적으로 추구함으로써 결국 사회를 황폐화시키고 해체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 칼 폴라니가 생각하는 해결책은 사회적 관계가 자기조정 시장 기반의 경제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를 사회적 관계에 다시 흡수해서 공동체적 삶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폴라니는 시장의 횡포가 사회에 의해 제어되지 않으면 사회가 무너지는 것을 막고자 하는 정치적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출현하게 되는데 파시즘이 바로 이러한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의 한 형태였다고 말한다. 이중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한국사회도 국가가 민주주의적 정통성과 민주주의적 통제를 통해 공동체의 공공성을 하루 빨리 복원시키지 못한다면 좌절한 일반 대중은 내셔널리즘이나 포퓰리즘 같은 비합리적인 정치행태에 쉽게 빠져 들 위험이 있다. 박근혜 정부가 적시한 ‘적폐’가 과연 무엇인지 ‘비정상의 정상화’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심층적이고 보다 구체적인 성찰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기존의 기계적이고 수직적인 통치가 아닌 시민사회의 참여와 협업을 통해 건강한 공동체의 복원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 E21

본 기사는 월간지 <이코노미21> 7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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