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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다양화, 평준화 체제 무력화
고교 다양화, 평준화 체제 무력화
  • 이종태 한울고등학교 교장
  • 승인 2014.10.17 12: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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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교육제도⑥-상위 1% 교육 필요한가> 자사고 논란보다 무기력해지는 학교교육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 중요해…교육을 보는 장기적 안목 필요…미래 전망하는 국가차원의 상설기구 설치해야

6·4 지방선거에서 다수의 진보교육감이 당선되면서 자율형사립고(자사고) 존폐 문제가 다시금 세간의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진보교육감들이 그동안 문제시 되어 온 자사고 제도를 폐지하리라는 기대 또는 우려가 교차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 알다시피 지금의 자사고 논란은 이명박 정부의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에서 비롯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골자는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권을 확대함으로써 사교육 수요를 줄일 수 있다는 불가사의한 명분을 내세워 기숙형 공립고(후에 자율형 공립고) 150교, 자율형 사립고 100교, 마이스터고 50교를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논란의 핵심은 고교 다양화에 대한 기대와 해석의 차이였다. 찬성측은 그것이 학생들에게 더 많은 선택 기회를 줌으로써 교육의 질을 높일 것이라고 하였지만, 반대측은 그것이 오히려 고교간 서열화와 성적 경쟁을 부추김으로써 교육 불평등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반복되는 자사고 논란의 함정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된 고교 다양화 프로젝트는 일부 성과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위 그림에서 나타나듯이 고교간 성적 편중이 30년 이상 정착된 평준화 체제를 무력화시켰다는 점이다. 다수의 일반고 학생들은 비평준화 시절의 세칭 3류고 학생들과 유사한 열패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지방의 기숙형 공립고 문제 역시 유사하다. 기숙형으로 지정된 소수 학교들은 다소 나은 여건을 확보하였겠지만, 나머지 학교들은 정상적인 교육활동조차 포기해야 할 처지에 내몰리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이명박 정권의 기대와 달리 자사고 수요가 크지 않다는 점이다. 다음 그림은 자사고 경쟁률이 처음에 비해 크게 낮아졌음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학생모집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자사고들이 늘고 있는 가운데 일부 학교들은 일반고 전환을 희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진보교육감들이 자사고 폐지를 추진하는 것은 필연이다. 애초부터 자사고 설립을 반대했던 그들이기에 정책 실패로 드러난 자사고 제도를 그대로 둘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사고 폐지가 쉽지 않다. 이미 적지 않은 학생들이 이 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고 정책당국과 우리 사회의 일부 세력이 폐지를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논란만 이어질 뿐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오래 전부터 반복되어 왔다. 1974년 고교 평준화 정책 도입 이후 끊임없이 제기된 수월성 교육과 평등교육론의 대립, 80년대 중반 이후 불거진 일반계 특목고(과고와 외고) 도입 찬반 논쟁, 90년대의 대입 본고사 부활 논쟁, 2000년대 이후 자립형사립고의 등장과 외고 확대를 둘러싼 논쟁 등은 시기와 소재만 달리 할 뿐 정확하게 동일한 구도를 지니고 있었다.

왜 이러한 소모적 논쟁이 반복되고 있을까. 혹자는 교육을 둘러싼 정치적 계층적 이해관계가 복잡하여 교육문제가 풀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실적으로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필자의 귀에는 무책임한 푸념으로 들린다. 필자가 보기에 그들의 시야는 문제의 핵심을 비껴나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시대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고 무기력해지는 학교교육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지 자사고 유지 혹은 폐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논란의 양측 당사자들은 모두 이 점을 간과해 왔다. 그런데 이러한 간과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자신들의 욕심과 지위를 지키기 위한 의도적 무지 탓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논란의 두 상대자가 겉으로는 국가와 대중을 상대로 지리한 명분 싸움을 하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적절한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 연유로 자사고 논란을 바라보는 필자의 심정은 불편하고 불쾌하다. 왜냐하면, 자사고 논란은 국민들로 하여금 지엽적인 문제에 이목을 집중시킴으로써 정작 중요한 문제, 즉 우리 교육이 직면한 위기를 보지 못하게 하는 함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상위 1%를 위한 학교는 필요한가

자사고가 왜 필요한가? 아마 옹호론자들은 수월성 교육을 위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수월성 교육이란 무엇인가? 이 역시 간명하게 ‘우수한 아이들을 따로 뽑아 그들에게 맞는 방법으로 가르치는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내친김에 가상 문답을 이어보자. 우수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공부를 잘한다는 것이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시험 성적을 통해 판단할 수 있다. 공부란 무엇인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 지식을 잘 습득하는 것이다. 우수한 아이들을 어떻게 선별할 수 있는가? 학생간 성적 경쟁을 시키고 반복적인 시험을 통해 선별할 수 있다. 이것을 한 마디로 ‘교과 성적 제일주의’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설마 후기 지식기반사회인 요즘에도 이렇게 생각할 사람이 있으랴 싶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면 아직도 이러한 관점이 대세를 이루고 있음을 실감한다. 세계에서 가장 긴 학습시간, 세계 최고의 사교육비 지출,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잦은 시험과 성적 서열화 관행, 세계 최고의 성적 비관 청소년 자살 등이 이를 웅변한다. 돌이켜보면 교과 성적 제일주의는 건국이후 초중등 교육을 이끌어 온 가장 강력한 원리이자 아직도 대다수 국민의 교육에 관한 판단을 규율하는 상식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교사들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성적 제일주의와 함께 자사고 옹호론을 떠받치는 또 하나의 생각은 ‘성적 우수자 특별대우론’이다. 우수한 아이들을 보통 아이들과 분리하여 그들의 능력에 맞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상위 1%만을 위한 학교가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연유로 그들은 평준화에 극구 반대하고 고입 선발제도의 부활, 특목고와 외고의 도입 및 확대, 자사고의 설립 등을 집요하게 주장해 왔다. 그 바탕에는 기업 경쟁논리에 뿌리를 둔 강력한 ‘1등주의’가 버티고 있다.

사실 성적 제일주의나 우수자 특별대우론은 적어도 합리적인 논의 영역에서는 공개적으로 표명될 수 없을 만큼 비상식화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현실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세력 불균형 때문이다. 기존의 왜곡된 교육 관행에서 혜택을 받은 세력들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육정책의 전향적 변화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합리적 논의가 기득권의 벽을 깰 날을 기대하면서 그들의 약점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성적이 곧 사람의 능력을 나타낸다는 편견에 빠져 있다. 성적이란 출제자의 의도에 맞는 답을 얼마나 많이 제시했는가(절대평가),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가 열등한가(상대평가)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이것이 한 사람의 총체적인 능력과 다르다는 점은 많은 이론과 실증적 자료들을 통해 밝혀진 지 오래다. 학교의 우등생은 사회의 열등생이라는 속담도 시사적이다. 불일치의 주된 이유는 공부의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교과 지식을 습득하는 일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로 하는 일의 일부이며, 따라서 그것을 잘한다는 것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다양한 능력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둘째, 공부의 의미를 교과 지식의 습득으로 보는 시대착오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미 20년 전에 피터 드러커는 학교가 교과 지식에 매달릴 경우 스스로 경쟁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세계 각국은 종래의 교과 지식 위주 교육이 변화된 사회 환경에 맞지 않다는 문제의식 하에 다양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수년 후 OECD는 그 결과들을 ‘핵심 역량’이라는 개념으로 압축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교과 지식의 습득을 넘어 다양한 문제 상황을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총칭한다. 교과 지식은 핵심 역량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

셋째, 성적 우수자 특별 우대론은 학습에 대한 무지와 특권의식의 결합이 낳은 기형아이다. 교육 선진국들은 동질적 학습 집단보다 구성원의 다양성을 더 중시한다. 사토 마나부 교수가 주창하고 있는 배움의 공동체 이론 역시 이질적인 학습 집단을 전제로 한다. 더 큰 문제는 특권의식이다. 부 축적의 정당성이 제대로 인정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내 돈 내서 내 자식 특별하게 교육시키는 게 무슨 문제냐’는 생각이 바로 특권의식이다. 여기서 출발한 어떤 정책도 호응을 받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어쩔 수 없는 학교중심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겐 교육과 학교가 동의어이다. 근대 산업사회에서 만들어진 이 등식은 지식기반사회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교육의 내용에서 지식의 비중이 낮아졌을 뿐 아니라 지식 교육에서조차 학교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학교는 교육의 변방으로 밀려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 일반고 살리기 서울고교 교사선언 참가자들이 5월 13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자사고 폐지, 일반고 지원강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일반 학생을 위한 교육의 개선 노력은 적절한가

자사고 설립과 폐지를 둘러싼 논란이 오래도록 지속된 것은 기득권 세력에 맞서 집요하게 이를 비판하고 반대해 온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력은 교사집단이다. 이들은 대안으로 일반 학생을 위한 교육의 개선과 공교육 강화를 주장한다.

이들의 노력은 두 갈래로 전개되고 있다. 하나는 자사고 반대와 같은 소극적 차원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개혁이나 혁신학교 설립과 같이 적극적 차원의 것이다. 먼저 소극적 차원의 노력을 보자.

자사고 반대론의 핵심 주장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자사고는 평등교육의 원칙에 위배된다. 단지 성적이 우수하다고 하여 이들을 선발하여 별도의 혜택을 주는 것은 부당한 특권이며 일반 학생들에 대한 차별이다. 학교 성적이 사교육의 성과까지 반영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둘째, 일부 사립학교에 우수 학생들이 집중되면 일반 학교들(대부분이 공립학교이다)은 슬럼화 될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학생들은 열패감을 갖게 될 것이며 교사들 역시 가르칠 의욕을 잃게 되어 결과적으로 공교육의 붕괴가 촉진될 것이다.

셋째, 국가의 교육 투자는 공교육 강화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학교 다양화나 선택권은 제한되어야 하며, 일반 학교에 대한 지원과 투자를 늘려야 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교육정책의 초점을 소수의 우수 학생에서 다수의 일반 학생으로 옮기도록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조야한 1등주의를 부정하고 성적 제일주의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이 점에서 자사고 반대 세력은 우리 교육의 건강성을 지키는 데 나름의 기여를 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들이 일반 학생을 위한 교육을 실질적으로 변화시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자사고에 대한 비판을 제외하면 대부분 원론 수준의 문제 제기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악의적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기존 학교교육의 변화보다는 오히려 기본 틀을 더 튼튼히 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갖게 된다. 그들의 주장 속에는 교과 지식에 국한된 기존 교육의 문제나 학교교육이 직면하고 있는 시대적 한계 등에 대한 문제의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무지의 탓이라기보다 그들의 존재 조건을 반영한다. 교사집단은 기존 학교체제의 최대 수혜자이며 그런 점에서 일종의 기득권 집단이다. 기존 학교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는 기득권에 대한 중대한 위협일 수 있다. 7차 교육과정의 도입에 대한 교사 집단의 완강한 저항에서 보았듯이 어떠한 교육적 명분도 이 벽을 넘기 어렵다. 당시 그들의 행동을 규율하는 실제 힘은 표면적인 신자유주의 반대 논리가 아니라 학생들의 교과 선택 확대로 초래될 교사 신분 불안이었다. 공교육 강화론 역시 이런 혐의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것이 갖는 평등교육의 명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교육에 대한 국가 통제의 유지 강화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적극적 차원에서 추진된 일반 학생을 위한 교육의 개선 노력을 살펴보자. 여기에는 국가 차원에서 추진된 교육개혁과 일부 진보교육감들이 추진한 혁신학교 정책이 있다. 이것들이 일반 학생들을 위한 교육을 개선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본격적인 교육개혁은 김영삼 정부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당시 대통령 자문기구였던 교육개혁위원회는 교육부를 집행기구로 삼아 교육 분야 전반을 과감하게 바꾸기 위한 수백 가지의 방안들을 만들어내었다. 그 궁극적인 목표는 세계화와 정보화라는 시대적 흐름에 맞추어 기존의 학교체제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성과에 대한 평가는 후하지 않다. 많은 외형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학교 구조와 운영 방식의 기본 틀에서는 의미 있는 변화가 없었다. 자사고 논란에서 보듯이, 교육개혁은 주로 기득권층의 내부 논쟁을 키웠을 뿐이다.

김대중 정부의 교육개혁은 5·31 개혁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이와 동일하게 평가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도 주목할 만한 교육개혁 정책은 없었다.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교육복지와 방과후 학교 사업은 기존 학교체제의 보완일 뿐 미래지향적인 변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 이후의 정책들은 한 마디로 교육개혁이 아니라 교육개악일 뿐이다. 고교다양화 300 정책에서 볼 수 있듯이, 보수 기득권 세력이 앞뒤 안보고 추진한 교육정책들은 문제의 해결은커녕 혼란만을 키웠다. 현정부 역시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혁신학교에 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아직 현재진행형이라서 말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정치적 목적을 배경으로 하는 중앙정부 발 개혁정책이 아니라 지방자치권력이 현장 수요를 바탕으로 추진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일부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나 학부모의 호응이 크고 학생이나 교사의 행복도가 크게 높아진 것도 평가할 만하다. 이러한 호의적 반응은 부분적이나마 학교의 운영 방식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점이 특히 시사적이다. 나름의 혁신학교 성과는 우리의 과업이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처음부터 혁신학교 모델이 한계가 있음을 누차 지적하였다. 일부 학교에 인적 물적 자원을 집중 투자하여 우수 사례를 만들고 이를 확산시키는 방식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수십 년간의 교육개혁 과정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이보다 더 근원적인 한계는 혁신학교의 지향점이 기존 학교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지 아이들이 숨 막혀 하는 일반학교보다 조금 더 나은 학교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그러한 학교조차 이루기 어렵다. 왜 그럴까?

가장 큰 이유는 모든 학교가 거대한 관료체제에 하나의 톱니바퀴로 끼어있어서 전혀 자율성을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이다. 교육과정의 편성이나 교직원의 임면, 예산 편성과 집행 등에서 혁신학교가 누릴 수 있는 자율성은 극히 제한적이다. 어느 공립학교에서 운 좋게도 구성원들이 힘을 모아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해도 학교장이나 핵심 교사가 바뀌면 하루아침에 그 성과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러한 환경을 바꾸지 않은 상황에서는 제한적 의미를 갖는 혁신학교조차 사상누각일 뿐이다. 만들기는 어렵지만 허무는 것은 순간이다.

혁신학교의 미래에 대해 기대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교사 집단의 일반적인 의식과 태도에 기인한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혁신학교에 참여하기를 꺼린다. 일반학교에 비해 일이 많고 힘들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이를 마다하지 않는 교사는 극소수이다. 혁신학교 확산의 기본적인 한계는 여기에 있다. 만일 혁신학교에 대한 특별 지원이 없다면 이러한 취약성은 더 커질 것이다. 이런 형편에서 혁신학교의 성공을 통한 다음 세대의 교육을 어떻게 기대한다는 말인가!

한국교육의 희망을 위한 실마리

우리 아이들이 PISA 평가에서 매번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지만, 이를 근거로 미래 한국교육이 밝다고 전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화려한 겉모습 뒤에는 치명적 약점들이 여러 겹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 복잡한 실타래를 풀 수 있는 희망의 실마리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우선, 교육현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절박한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안이한 태도로는 문제도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한국교육이 환골탈태하지 않는다면 한 세대 뒤에는 3류 국가로 전락할 것이라고 예언 아닌 예언을 해왔다. 비록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지만, 5·31 교육개혁의 출발은 한국교육의 총체적 위기라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제 다시금 사회적 합의를 통한 제2의 5·31 개혁이 추진될 시점이다.

다음으로, 교육을 보는 장기적 안목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의 뜨거운 교육 쟁점들은 대부분 너무 근시안적이다. 절벽으로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조그만 배 안에서 싸우는 형국이다. 소아병적 자세를 버리고 시대 변화를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국가 정책 단위에서 더욱 절실하다. 우리도 교육과 사회의 미래를 전망하고 대비하는 국가 차원의 상설 기구를 설치해야 한다.

세 번째로, 교육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학교는 더 이상 교육의 전부가 아니다. 교육을 위한 하나의 기관일 뿐이며 그나마 역할이 점점 축소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의무교육 제도는 넓은 길을 막고 사람들에게 학교라는 좁은 길목을 통과하도록 강요한다. 이제 미래를 향한 교육의 넓은 길을 터야 한다. 명실상부한 평생교육의 관점에서 교육의 새 틀을 짜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교육 불평등 문제이다. 국가의 획일적 통제가 없는 상황에서 균등한 기회 배분이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교육 강화론은 바로 이 점을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선진국의 복지제도에서 볼 수 있듯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으면서도 공정한 자원 배분이 가능하다. 이 사실을 외면한 채 공교육 강화만을 주장하는 것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몸부림으로 비칠 뿐이다.

그런데 사실상 공교육 강화론은 첨예한 정치 문제와 연결된다. 지금과 같은 경직된 교사 신분 제도는 학교 체제의 어떤 변화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40만 교사의 신분을 불안하게 만드는 학교 체제의 해체를 성사시킬 수도 없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묘책은 없다.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합리적 방안을 만들어 설득하고 이를 점진적으로 실행해 나가는 길이 있을 뿐이다.

네 번째로, 학교 체제의 실질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학교 굴레를 이루고 있는 핵심 고리들을 벗겨야 한다. 대표적인 것들로 학력인정, 학교 설립 인가, 국가교육과정과 교과서, 시험 성적과 석차, 교사자격증 및 임용, 그리고 최근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네이스 체제 등을 꼽을 수 있다. 이것들은 대부분 근대 산업국가 및 식민지 시대의 유물로서 교육을 학교 울타리 안에 묶어놓는 강력한 기제인데, 21세기 탈근대적 환경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러니이다

마지막으로, 백 번 양보하여 기존 학교 체제 안에서 학생들의 숨통을 열어줄 수 있는 방안들을 생각해 보자. 앞에서 비판한 혁신학교 수준이라도 가보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해방을 제안한다.

하나는 거대한 관료체제로부터의 해방이다. 그 출발로 학교 단위의 교사 임용 제도를 제안하고 싶다. 서구의 교육선진국들은 대개 학교운영위원회에서 교장을 공모하고, 교장이 교사들을 선발한다. 계약제이지만 연장이 가능하다. 이를 통해 단위학교의 자율성과 교육에 대한 교사 및 교장의 책무성이 보장된다. 우리나라의 비인가 대안학교들에서 그 유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교원 승진이나 전보 제도가 갖는 부작용들도 일거에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시험과 경쟁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를 위해서는 수능 시험과 학교 석차 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 수능 시험 제도는 그것이 갖는 긍정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교육과정을 왜곡시키고 아이들을 시험의 노예로 만드는 주범이다. 최근 수능을 비껴가는 대입 경로가 늘어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세계 모두가 부러워하는 핀란드 학교에는 고교 졸업시험을 볼 때까지 일제 고사가 없고 따라서 석차도 없다. 성적 스트레스로 자살하는 경우도 상상하기 어렵다. 왜 우리라고 이런 교육을 할 수 없는가!

학교 현장에 온 지 1년 반이 지난 지금 필자의 눈에 비치는 교육의 실상은 걱정스럽기만 하다. 학교 안팎의 틀은 옛날 그대로이지만 아이들의 의식과 행동은 완전히 따로 놀고 있다. 학교에서 의미 있는 학습 경험은 갈수록 줄고, 소수에 그쳐야 할 부적응 학생들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대로는 대책이 없어 보인다. 학교 안과 밖의 대안교육에 대한 학부모의 관심이 증가일로에 있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매년 50조 원의 국가 예산이 투입된다. 속이 쓰리다. 거국적인 발상의 전환, 그리고 우리 국민의 특별한 결단을 갈망한다. E21

본 기사는 월간지 <이코노미21> 7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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