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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교육과 대학입시의 동반성장
고등학교 교육과 대학입시의 동반성장
  • 오성삼 인천 송도고등학교 교장·전 건국대 교육대학&
  • 승인 2014.12.08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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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성장의 길을 찾아서⑨> 지식위주 입학 전형제도 + 인성관련 전형 접목시켜야 새로운 교육 시작할 수 있어

‘공존과 공정한 분배’를 표방하는 ‘동반성장연구소’의 조찬모임 토론에 참여하며 교육현장에 중요 이슈가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마침 오늘 ‘교육과 동반성장’의 주제발표를 서울대학교 입학처장께서 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대학입시와 고교교육정상화를 위한 동반성장을 떠올리게 되었다. 물론 교육현장에서의 동반성장을 이야기하라면 다양한 문제가 쏟아져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우선은 오래 전부터 논의되어 온 빈부격차에 따른 학생들의 학력격차 해소문제가 나올 것이고, 근자에 들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특목고·자율고와 인문계 평준화 고교의 불균형 문제도 불거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극히 제한된 시간에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필자에게 시급한 교육현장에서의 동반성장(shared growth)의 과제는 아무래도 고교 교육정상화를 위한 대학입시의 지향점이란 생각을 하게 됐다.

고등학교 현장에 있어보면 대학입시제도가 마치 대기업들이 행사하는 무소불위의 ‘갑’의 입장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중소기업과의 거래에서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는 구두주문, 납품가 후려치기처럼 대학입학전형제도 또한 3천여 가지가 넘는 제도들을 만들어 놓고 묵시적으로는 고등학교들이 알아서 학생들의 지원을 준비시켜 달라는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입시제도의 종류만이 아니다. 대기업의 횡포처럼 대학들의 탐욕스런 점수욕심은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 모두를 골병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다.

대학입시제도가 초․중등교육과정을 정상화 시키고 학생과 학부모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동반성장을 해 나가야 하건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고등학교 3년간을 하루 두끼니 점심과 저녁을 학교식당에서 밥 먹고 밤 10〜1시까지 교실에 남아 대학입시 준비를 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고등학생들을 보며 대한민국의 대학입시가 탐욕의 단계를 넘어 잔인한 단계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누구와 무엇을 위한 대학입시인가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네 교육의 안타까움은 한국사회를 조망하는 외국인들에게도 묻어난다. 앨빈 토플러(Alvin Tofler)는 “한국의 학생들이 하루 15시간을 학교와 학원에서 미래에 필요하지도 않을 내용을 배우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했고, 영국 파이넨셜 타임스 서울특파원이었던 안나 파이필드(Ana Fifield) 지사장은 한국에서의 기자생활을 마감하고 떠나며 이 같은 평가를 남겼다. “교육에 모든 걸 바치고도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는 딱한 민족”이라고.

요즘도 일선학교에는 “교과서 밖의 내용을 출제해서는 안 되고, 선행학습을 시켜서도 안 된다”는 내용의 공문이 상급 행정기관으로부터 빈번히 날아들고 있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수많은 종류의 대학입시를 준비시켜달라는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해마다 입시철이 되면 대학입시 설명회장은 학부모들의 자리다툼의 각축장이 되고, 입시전략을 설명하는 학원 강사의 설명이 목사의 설교나 주지승의 법문보다 더 설득력을 지니는 대한민국. 학부모들이 학원관계자의 주옥(?)같은 이야기에 밑줄을 긋고 있는 동안, 수험생들은 값비싼 진학컨설팅을 받느라 여념이 없는 사회풍토. 원하는 대학에 들어만 갈 수 있다면 반값등록금이 아니라 더블등록금도 불사할 것 같은 표정들. 그래서 대학입시가 초·중등교육을 왜곡시키고, 대학입시를 향한 우리사회 구성원들의 질주가 고장이 난 브레이크처럼 위험 수위를 넘은지 오래건만 교육의 본질 회복을 위한 사회적 합의는 멀게만 느껴진다.

5년 전 이명박 정부의 출발은 전봇대를 뽑아내겠다했고, 향후 5년을 시작하는 박근혜 정부는 손톱 밑 가시를 제거하겠다고 하지만 우리네 교육계의 전봇대와 손톱 밑 가시가 언제쯤 제거될 것인가를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교육계의 전봇대를 뽑아내려면 무엇보다 ‘착한대학입시’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런데 대학입시가 착해지려면 성적에 집착하는 국내 대학들의 욕심부터 덜어내야 한다. 탐욕스런 곳이 비단 뉴욕 월가의 금융계뿐만 이겠는가. 1점이라도 높은 학생들을 확보하기 위한 대학들의 입학전형제도 곳곳에 탐심이 배어나온다. 몇 년 전 서울의 한 명문 사립대학이 특목고학생들에게 유리한 내신평가방식을 적용하다가 사회적 비난을 받은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다. 학력평가 점수에 대한 탐심이 어디 이 대학뿐이겠는가.

▲ ‘왜 교육에 동반성장이 필요한가?’라는 주제로 열린 동반성장포럼에서 토론자가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동반성장연구소

다행이도 착한 대학입학전형제도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 서울대의 ‘지역균형선발’ 제도가 있어 지방소재 평준화 고등학교들 상당수가 서울대 합격생을 배출할 수 있게 되었다. 교육계의 동반성장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생각한다. 외고, 과학고, 국제고, 자사고 등 다양한 유형의 고등학교들이 우수한 성적과 부유한 집안의 학생들을 선점하는 상황에서도 지방의 평준화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신입생과 학부모들에게 희망의 통로를 열어줄 수 있음이 ‘지역균형 선발’ 제도 덕분이란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배려 깊은 입학전형 덕분에 지역 소재 고등학교들이 개교 이래 서울대 합격자를 몇 명씩 배출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한다. 서울대학교의 ‘지역균형선발제도’를 지켜보며, 보다 많은 대학들이 다양한 측면에서 보다 착한 대학입학전형제도를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인가 하는 기대감을 갖게 된다. 모름지기 착한 대학입시란 ①고교 교육과정을 정상화 시키는데 기여하는 대학입시, ②학생들에게 과도한 입시부담을 덜어 주고 ③사교육으로 인한 학부모의 가계 부담을 줄여주는 방향의 제도가 아니겠는가.

대학교육은 ‘지도자적 인격을 도야(교육법 108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대학교육은 그 본연의 사명을 구현하기 위해서라도 지적인 능력 못지않게 사람됨의 교육인 인성교육을 대학입시에 반영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인성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이야기 해 왔다. 우리사회의 대다수 국민들이 지식중심의 학교교육의 폐해를 실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좀처럼 시행되지 못하는 인성교육은 대학입시란 전봇대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해 학교폭력이 사회적 이슈로 제기됐을 때, 인성교육을 추진했던 고등학교들이 있었다. 하지만 자녀들의 대학입시를 우려한 학부모들의 거센 항의로 중단되고 말았다. 국민 누구나가 학교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면 인성교육의 부실문제를 꺼낸다. 하지만 정작 자녀가 다니는 학교가 인성교육에 치중할라치면 “그러면 대학입시는 어떻게 하냐?”고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다. 인성교육이 필요하긴 한데 자신의 자녀가 다니는 학교는 빼고 다른 모든 학교들이 인성교육에 치중했으면 좋겠다는 모순된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은 생각의 근원은 대학입학전형제도에 기인한다. 우리나라의 초․ 중등교육이 대학입시에 종속(?)돼 있는 상황에서 대학들이 지식위주의 입학 전형제도 뿐만 아니라 인성관련 전형을 접

목시켜 주어야 일선 학교현장이 우리사회의 여망을 반영한 교육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삼성그룹이 올해 신입사원 채용 과정에서 지원자들의 인성면접 시간을 두 배로 늘리는 등 인성 평가를 크게 강화한 것이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해 포스코 계열사 임원의 ‘라면 파동’과 남양유업 폭언 사건 등 대기업 임직원들의 품행 문제가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삼성그룹이 신입사원 채용에서 인성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보겠다는 뜻이 담긴 것이란 언론보도를 접하며 의미 있는 교육적 가치의 반영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변화는 “인간미와 도덕성을 갖춘 인재 선발”의 방침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면접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지원자나 이른바 ‘시험꾼’에 가까운 지원자를 걸러내겠다는 것이다.

대학입학전형은 지원학생이 입학 후 학업을 제대로 따라갈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름 하여 입학 후 학업능력에 대한 예측타당도를 점검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대학에서의 배움의 과정을 마치고 사회에 나가 어떤 인물로 살아갈 것인가를 동시에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길지 않은 면접을 통해 지원학생들의 인성과 자질 그리고 그가 지닌 가치관을 판단하는 것은 지난(至難)한 일이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래전 우리사회에 사회봉사를 활성화 시키기 위해 대학입시에 사회봉사 점수를 연계했고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시작단계에서는 사회봉사가 과열돼 심지어 학부모들이 자녀를 대신해 봉사활동의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10여년이 지난 지금, 사회봉사는 우리사회에 일상적 가치로 정착했고 한국인들의 봉사는 국내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 산간 오지까지 파고들고 있다. 이제는 어떤 댓가를 기대하지 않고 사회봉사활동을 통해 삶의 보람과 의미뿐만 아니라 즐거움도 찾게 되지 않았는가? 초중고등학교의 교육이 대학입시에 종속돼 있음은 매우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대학입시 제도를 활용하면, 빠른 기간에 인성교육이 활성화 되고 뿌리를 내리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식에 앞서 인성을 중시하는 평가기준이 대학입시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취업에도 반영시켜야 한다. 그래야 인성이 중심이 되는 대한민국, 행복한 국민시대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인성 중시 평가기준, 대학입시 및 취업에도 반영시켜야

많은 사람들이 “대학입시를 목표로 인성교육을 한다는게 말이 되냐”고 목적과 수단이 바뀐 것이란 비판을 할 수도 있다. 대학입시를 전제로 인성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성교육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대학입시제도를 활용하는 방안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사회가 오래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인성교육의 필요성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지만 인성교육이 여지껏 제자리 걸음만을 되풀이 하고 있음은 유용성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 아니겠는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오로지 목표는 하나,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인 학생들에게 대학입시에 반영되지 않는 내용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학교현장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단 하나, “선생님, 인성교육이 대학입시에 반영 되나요?”. 그것 뿐이다. 대학입시와 관련 없는 그 어떤 내용도 관심과 가치를 공유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 우리사회의 풍토다. 비단 초중고등학교 현장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대학생들을 상대로 인성교육을 강화할라치면, “교수님, 인성교육이 입사시험에 반영 되나요?”를 왜 묻지 않겠는가. 이것이 시장적 가치를 지닌 자본주의 교육의 문제이기도 하다.

차제에 서울대학교가 나서서 대학입시에 인성교육을 반영하는 방안을 마련해 초중고등학교 교육현장에 긍정적인 시그널을 보내주기를 기대한다. 무엇보다 학교에서의 인성교육에 시간을 할애하는 학교의 학생들이 대학입시에서 지식중심의 공부를 한 학생들에 비해 손해를 볼 수 있다는 학생 학부모 그리고 교사들의 불안감을 해소해 주는 일이 급선무다.

종단연구를 통해 인성교육을 제대로 이수한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 간의 대학생활 적응 방식을 비교해 보는 방안을 제안코자 한다. 1930년대 중반 미국에서는 진보교육의 효과를 검증하기 위해 30개 시범고등학교 졸업생들을 미국 30여개 이상의 대학들이 별도 전형을 통해 입학을 허가했고, 고등학교과정을 포함한 8년 연구(The Eight-Year Study)의 프로젝트를 통해 중등학교의 교육과정을 개선하는데 기여한 사건이 있었다. 한시적이긴 했지만 미국의 30여개 대학들이 자원해서 진보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들에게 대학입시 염려말고 그들이 추구하는 진보교육의 가치를 실현토록 한 것이다. 교육개혁을 통한 사회변화를 위한 통큰 대학입시를 열어준 것이다. 우리네 대학들도 교과점수에 대한 집착을 덜어내고 초중고등학교에서 인성교육을 충실하게 이수한 학생들이 과연 대학생활에서 어떤 차이를 나타내는가를 연구할 수는 없는 것인가. 지식위주의 교육에 전념한 학생들과 인성의 바탕위에 지식교육을 받은 학생들 간에는 어떤 차이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지적호기심이 발동되어 인성교육의 효과와 필요성에 대한 실증적 자료를 내놓았으면 좋겠다. 기업들 또한 마찬가지로 이들 두 부류의 신입사원들이 입사후 직무수행과 관련해 어떤 차이를 보이는가를 검중해 내놓을 수만 있다면 인성교육으로 손해를 볼것만 같아 불안해 하는 사회구성원들에게 희망적인 인성교육의 지향점을 내놓을 수 있질 않겠는가. 우리사회는 언제 쯤에나 그런 통큰 대학이 나타나 줄 것인가.

서울대의 인성교육 반영은 아마도 다른 대학들의 동참을 유도하게 될 것이고, 고등학교뿐만 아니라 취학 전 가정교육에서부터 인성교육 광풍(?)이 일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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