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6:34 (금)
한국사회 어떻게 살릴 것인가
한국사회 어떻게 살릴 것인가
  • 조순 박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학술원 회원
  • 승인 2015.02.09 11: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냉전시대의 고정관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어…국가개조 또는 서정쇄신(庶政刷新) 추진 위해선 각 부문의 부실 정확히 파악해야

세월호 이후 우리나라는 위기상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크고 작은 비정상적인 사고의 와중에서 국정은 표류하고 있다. 여론은 국정의 일대 쇄신을 요구하고 있다. 대통령은 이에 호응하듯, 「국가개조」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세 번째 총리후보는 아예 지명도 하지 못했다. 총리의 사표가 반려됨으로써, 총리임명 문제는 끝났다. “국정의 표류”를 막기 위해서 부득이했다고 하나, 국정은 이미 표류하고 있었다. 표류를 막기 위해, 새 총리를 뽑자는 것이 아니었는가. 처음부터 국가개조에 일조할 신임총리를 폭넓게 물색했더라면, 믿을 수 있고 성실한 사람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고,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쌓였을 것이다.

건국 이래, 역대정부는 소위 ‘나라 만들기’(Nation Building)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 결과, 나라는 후세에 길이 모범이 될 만한 전통을 아직 세우지 못하고 있다. 나라는 환갑을 지났다. 해방당시의 순박한 감격과 젊은 의기를 이제는 찾을 수 없다. 이제 새삼, 누가 무엇을 얼마나 하겠는가. 그러나 「국가개조」-좋은 표현은 아니다-의 약속을 영영 포기할 수는 없어 보인다. 나라의 허약한 체질과 국민의 나약한 정신으로는 이 나라의 현상 유지조차 어려워 보인다.

국가개조는 아니더라도 지금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차선(次善)의 일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종래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발상을 새롭게 해야 한다. 고정관념은 대부분 ‘전후’ 미소냉전시대에 우리 머리에 박힌 관념이다. 이제는 ‘전후’가 아니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변신하고, 북한이 일본과 손을 잡고, 중국 국가주석이 우리나라 일간지에 기고문을 보내는 세상이 아닌가. 냉전시대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낡은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한다면, 국가개조는 어림도 없고, 차선의 일도 못할 것이다.

‘나라 만들기’(Nation Building)가 부실을 안고, 어정쩡한 채 오늘에 이른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나라 지도층부터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라는 인체와 같은 하나의 유기체임을 모르고, 국정이 균형과 안정과 공정을 무시했다. 역대 정부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경제발전에 ‘올인’함으로써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냈고, 민주주의도 일단 성취했다. 그러나 ‘나라 만들기’의 안목에서 보면, 단견(短見)이 많았고 좋지 않은 후유증도 많이 남겼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의 기능장애(dysfunction), 사회의 내부파열 (implosion), 교육의 열화(subnormal 劣化) 또는 비정상화는 일조일석에 빚어진 것이 아니다. 그처럼 공들인 경제조차 성장잠재력을 잃기 시작하고, 세월호 같은 참사가 터지는 것을 보면, 그 동안 일구어낸 발전이 적지 않은 허상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가개조」가 어렵다면, 부분적인 국정쇄신이라도 성취하기를 바란다. 현상유지로 잔여임기를 마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나라 사정이 너무 절박하다. 대통령이 먼저 국정방향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국민으로 하여금 그 비전을 감지하고, 그 비전에 동의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단시일 내에 큰일을 많이 할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의 임기를 넘어선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일에 착수해야 한다. 우리의 정치풍토, 관료체제, 그리고 국민의 능력을 직시하면서, 이데올로기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실사구시(實事求是)로 가야 한다. 국가개조 또는 서정쇄신(庶政刷新)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치·경제·사회·교육 각 부문에 깔려있는 부실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정치개혁 위해선 내각제와 다당제 도입 필수적

나는 ‘한나라당’ 명예총재로 있을 때, 어느 경제신문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이 나라 정치는 모든 대통령을 실패로 이끌고, 모든 정당을 실패로 이끌고, 모든 정치인을 실패로 이끌고, 국민을 괴롭혀 왔다.” 나는 독자와 언론의 비난을 각오하고, 그 비난에 대응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전화 한통 안 받았다. 비난의 말도 칭찬의 말도 없었다. 나는 이 기고문의 내용은 지금도 타당하다고 본다.

정치가 제몫을 하려면, 정당이 제 구실을 해야 한다. 한국의 두 정당은 이념을 같이하는 정치단체라기보다는, 네편 내편의 편 가르기에서 형성된 두 개의 정치그룹이라고 볼 수 있다. 두 정당은 각각 보수와 진보를 표방하면서,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지만, 현실정치에서 두 당의 정견(政見) 차이는 크지 않다. 또한 여야를 막론하고 청와대와 가깝지도 않고, 국민과의 관계도 멀다. 정당과 국회의 낮은 생산성에 대해, 여론은 늘 비판적이며, 정치인과 국회의원은 국민의 빈축을 사기 일쑤다. 그러다보니, 뜻있는 좋은 사람이 정치에 투신하는 경우도 적고, 간혹 괜찮은 사람이 정계에 투신한다고 해도, 그 자신의 장점과 정체성을 살리기는 어렵다. 요약하면, 이 나라의 정치는 제왕처럼 군림하는 대통령, 편 가르기로 정치신인의 진입을 막는 정당, 국민과 유리된 국회 등으로, 정치의 생산성이 극도로 낮다. 그런데도 고정관념에 얽매인 우리 정치인과 국민은 이 체질을 혁파할 시도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 2014년 7월 10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서 열린 제12회 동반성장포럼에서 조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한국사회 어떻게 살릴 것인가’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나는 「국가개조」의 실마리를 정치제도의 개혁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내각제와 다당제, 나의 의견으로는 우리나라 정치의 생산성을 높이자면 대통령제를 폐지하여 내각제를 채택하고, 아울러 양당제 대신 다당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본다. 고정관념의 포로가 돼있는 사람들은 이 제안에 대해, 극구 반대할 것이다. 양당제를 가지고도 정치의 혼란을 막을 수 없는데, 다당제를 한다면 나라는 정치 혼란의 도가니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제왕적 대통령제, 양당제는 이 나라 정치에 무엇을 가지고 왔는가. 정치의 불모(不毛)를 가지고 왔고, 끝내는 나라의 모습을 세월호처럼 만들지 않았는가. 양당은 각각 보수, 진보를 표방하며 국가와 국민을 걱정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거에서만 이기는 것을 지상목표로 하고 있다. 이 정치관념이 이 나라 정치의 불모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각제, 다당제의 정당은 이 나라 정치에 무엇을 가지고 올 것인가. 정당이 국민과 가까워지게 만들 것이다. 편 가르기와 무관한 새로운 사람이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얻으면서 정치의 활성화를 가지고 올 것이다. 이 제도에서는 보수, 진보의 양당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추구해야 할 특정 분야, 이를테면, 환경보호, 복지증진, 중소기업, 교육, 보건 등의 발전을 표방하는 정당이 나올 것이다. 이런 정당들은 각각 일정비율(이를테면 5%)의 유권자 지지를 얻어야 정당의 지위를 인정받는다. 어떤 당이든 유권자의 5%를 얻기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당이 난립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당제에서 제1당이 돼도 단독으로 안정적인 내각을 구성하기는 힘들 것이므로 제1당은 2, 3개의 작은 당과 연립해서 조각(組閣)할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 정당들은 민주주의적인 협상은 해야 하겠지만, 혼란이 있을 필요는 없다. 지금의 한국처럼 두 당이 죽기 살기로 서로 물고 늘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각 당은 상당한 전문지식을 살리면서 정권에 참여할 것이므로 자신과 긍지를 가지고 정계의 자체정화 (自體淨化)를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나라가 처음부터 내각제, 다당제를 했다면, ‘나라 만들기’를 좀 더 평탄하고 알차게 만들었을 것이다. 사실 제왕적 대통령제와 양당제는 18세기 미국에는 알맞은 제도였다. 오늘에 와서 그 제도는, 미국에서 보는 것처럼, 대통령과 야당 간의 양보 없는 대립, 타협 없는 마찰을 불러와서 민주주의의 위기상황을 만들어내고, 같은 당 안에서도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정치개혁을 하자면, 내각제와 다당제를 도입하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경제의 지속적 발전 위해선 고용 증대, 소득 양극화 해소, 대기업과 중소기업 동반성장, 수출과 내수산업 균형발전 필요

자본주의의 장점은 기업의 혁신(이노베이션)에 있다. 우리나라 발전의 초기에는 혁신이 순조로웠고, 정부의 지원도 많아서 재벌로 불리는 대기업들이 크게 발전했다. 그 중 전자, 자동차, 제철 등 분야에서는 세계굴지의 기업들로 자라서, 지금 우리 경제의 1등 기업(National champion)이 되었다. 그러나 재벌기업은 이 나라의 특권층으로 발전하여 세습화가 진행되면서, 30대 재벌 그룹에는 새 기업의 진입도 거의 없어졌다. 기득권이 굳어짐에 따라 재벌의 혁신 자체도 정체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재벌기업이 커지고 투자가 이루어져도 고용은 늘지 못하며, 양극화는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구 노령화와 함께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악화시키고 있다.

우리 경제가 세계 10위권에 들었다는 환호의 소리가 나오기 무섭게,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 경제를 덮고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나라는 유기체이며, 나라의 일부인 경제도 유기체이다. 유기체가 성장하자면 각 부분의 균형과 조화가 잡혀야 한다. 우리 경제가 지속적인 발전을 하자면, 재벌기업과 중소기업사이에 균형이 잡혀서 고용이 늘고 소득의 양극화가 해소되어야 한다. 아울러, 수출산업과 내수산업이 같이 발전하여 지역경제와 거시경제의 균형이 잡혀야 한다. 한마디로 우리 경제가 살길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 수출산업과 내수산업의 균형발전에 있다. 이 길이 아니고는 살 길이 없다.

글로벌 경제는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 나의 견해로는 글로벌 경제는 아직 위기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며, 그동안 선진국 중심의 양적완화정책은 경제를 되살렸다기보다는 오히려 다시 금융부문의 거품을 조성할 위험이 있다고 본다. 글로벌 경제의 ‘뉴 노멀’(New Normal)로 간주된 저성장은 앞으로 당분간 불가피할 것이다. 왜냐하면 208년의 위기를 불러온 각종 불균형, 불안정, 불공정의 요소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러한 뉴 노멀에 잘 적응해야 하며, 저성장에 너무 조급해하지만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체질개선을 해야 한다.

한국, 공화정치 해 왔다고 볼 수 없어

지금 우리 사회에는 분열, 부패, 부조리, 몰염치가 당연시 되고 있다. 국민의 가치관은 돈이면 그만이고, 믿음과 성실은 없다. ‘성실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다 (不誠無物)’는 말이 있듯이 돈만 아는 사회에는 좋은 일이 있을 수 없다. 헌법은 대한민국이 民主共和國 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민주>에 관한 얘기는 일단 접어두자. 국민 대다수가 모든 선거에 올인하는 모습을 보면,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열정은 높다고 보아야 한다. <공화국>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로마 말(라틴어)로 ‘레스푸블리카’ (Res Publica)란 말인데, 그 의미는 <공공(公共)의 나라> 내지 <공중의 복리(福利)를 중요시하는 나라>라는 뜻이다(윤평중 교수, 「박근혜 대통령, 共和政의 지도자가 되어야」, 조선일보, 2014년 6월 12일 참조)

로마 역사를 보면, 로마 사람들은 용기와 명예를 극도로 중요시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설화가 많다. 그런 로마공화정 시대의 국가운영은 집정관(執政官)으로부터 호민관(護民官)에 이르기까지 “공공의 안녕과 복리(福利)”를 매우 중요시했다. 공화정 시대를 이끈 인물 중에는 유덕(有德)한 군자(君子)는 적었어도, 별의별 유형의 인물이 많았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시민에 대한 신의(信義)와 애정을 가지고 국민의 인기를 확보한 점이라 생각된다. 즉, 로마 공화정 시대의 정치이념은 ‘공공(public 公共)의 중시’에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 있는 사항은 고대 동양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대동사상(大同思想)>이 그것인데, 『예기(禮記)』 「예운(禮運)」편(篇)에 있는 공자(孔子)의 말이 그 내용을 잘 요약하고 있다. 「큰 도(道)가 행하여질 때 천하는 공공(公共)을 위한다 (大道之行也, 天下爲公)」라는 공자의 말이 그것인데, 영어로 의역(意譯)하면, ‘When Sage's Great Way prevails, the Universe is for the Public’이 될 것이다. 『예기』의 말을 여기에 다 인용할 수는 없고, 다만 <대동(大同)사회>의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대충 다음과 같다. ‘성인이 다스리는 천하에는, 모든 사람이 좋은 가정을 이루고, 할 일이 주어진다. 가정이 부양할 수 없는 홀아비, 홀어미, 부모 없는 어린이, 자식 없는 늙은이, 그리고 장애인(廢疾者)은 나라가 보살핀다. 길에는 도적이 없고, 세상은 편안하다. 이런 사회를 <대동(大同)사회>라 하고, 대동사회의 전 단계로 살만한 사회를 <소강(小康)사회>라 한다’. 한마디로, 성인에 의해 다스려지는 대동사회는 복지정책을 통하여 나라의 상하가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공화정치>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중국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달성함으로써 <소강사회>를 성취했다고 한다. 앞으로 좀 더 경제가 부유해지고, 사회 정의가 실현되면 <대동사회>를 달성했다고 할 것이 분명하다. 대동사회, 이것이 중국역대의 이상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이상도 대동사회라 생각한다.

우리의 공화정치는 어떤가. 민주주의는 일단 달성되었다고 치더라도 공화정치를 해 왔다고는 볼 수 없다. 낙하산 인사, 관피아, 모피아, 철피아 등 마피아 무리가 도처에 횡행한다. 나라의 공기(公器)가 특권층의 사물이 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경제는 세계 10위권에 진입했다고 하지만, 국민은 행복하지 않다.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최고다. 정치권력은 국민과 동떨어져 있다. 나는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국민과 가까워지기 위해 좀 더 노력했으면 한다. ‘국민을 친근하게 하는 것이 정치의 도리’ 라는 말이 『대학』의 첫머리에 나온다. 국가의 지도자는 정례 기자회견뿐만 아니라, TV나 라디오 방송도 정기적으로 하고, 가끔은 민정 시찰도 하면서 국민에게 국정의 방향, 세계정세 등을 설명해주면 좋겠다. 사람은 가까워지면 서로를 이해하고 배우게 된다. “세 사람이 함께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배움에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 없고, 나이의 늙고 젊음도 없다.

과학기술 발전 필요하지만 인문학이 발전해야

우리나라 교육의 이념이 무엇이든 간에, 현실로 나타나는 교육을 보면, 오로지 돈과 권력을 위한 목표와 수단을 가르치는데 ‘올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우리 ‘나라 만들기’의 맹점이 교육의 실패에 있다고 본다. 파괴된 가정, 분열된 사회에는 돈이면 그만이라는 에토스(ethos)가 넘치고 있다. 쉽게 배우고 남보다 먼저 선수를 쳐서 돈을 벌라고 한다. 세상에 이런 교육이 어디 있는가. 대학입학 정원보다 고등학교 졸업생 수가 적다고 한다. 세상에 이런 제도가 어디 있는가. 게다가 학교폭력, 왕따가 횡행하는 학교는 정치세력에 오염돼가고 있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발전도 필요하지만 인문학이 제대로 발전해야 한다. 인문학이 발전하자면 문사철(文史哲)에 걸친 광범한 식견(識見)이 있어야 한다. 문사철의 지식은 높은 수준의 어문능력 (語文能力)을 필요로 한다. 우리나라나 일본의 어문은 한자를 빼면 남는 것이 없다. 대부분 어휘의 원천이 한자이기 때문이다. 한자어를 한글로 쓴다고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는 없다. 한자를 쓰면 쉽게 빨리 읽을 수 있는 글도 한글만 가지고는 읽기도 더디고 이해도 불완전하다. 나는 ‘한글 전용을 가지고는 이류국(二流國)도 어렵다’는 글을 쓴바 있다. 한마디로 한글만 쓰는 한국어를 가지고 인문학의 발전은 불가능하다. 인문학이 약하면, 문화가 약하고, 문화가 약한 나라는 문명국이 아니다. 이 점에 대해 한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경제, 정치, 사회, 교육 등의 굵직한 정책은 맹목적으로 밀어붙이지 말고 과학적으로 타당성을 실험한 후에 시행해보라는 것이다. 과학의 생명은 무엇인가. 실험이다. 어문정책에도 실험을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다. 몇 개의 초등학교에서 한자를 가르치는 반과 한글전용의 반을 나누고 다른 모든 것은 똑같은 조건에서 일정 기간 동안 가르쳐보라는 것이다. 만일 한자를 배우는 반이 한글만 배우는 반보다 월등한 지능의 발전수준을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국민을 속인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당한 처벌을 감수할 용의가 있다. 나는 일본의 대외정책을 미워하지만, 그들의 한자 배우기에 대한 성의를 보면, 지력(知力)이 상당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일본은 국수주의(國粹主義)가 강한 나라지만, 어문정책은 국수주의를 고집하지는 않는다. 한국에는 국수주의자는 없다고 하면서 어문정책은 국수주의를 고집한다. 국수주의는 문화발전의 독약이다. 독약이 아니라 사약(死藥)이다.

개혁의 어려움

개혁은 어떤 나라에서도 대단히 어렵다. 우리나라에선 더욱 그렇게 보인다. 신라 천년의 긴 역사를 통해, 관제(官制), 학제(學制) 등에는 혁신도 ‘개혁’도 없었다. 성골(聖骨), 진골(眞骨) 등의 기득권세력이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가르치지도 않고 쓰지도 않으니, 인물이 나올 수 없다. 신라의 역사를 보면 인물다운 인물은, 김유신을 뺀다면, 다섯 손가락이 남을 정도다. 실학파 역사학자 순암 안정복(順庵 安鼎福)은 그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가 당제를 도입하고자 했으나, 일직 죽어서 뜻을 이루지 못해 정말 애석하다고 썼다. 조선왕조(朝鮮王朝) 오백년 동안 이율곡(李栗谷)이 열망한 경장(更張), 즉 개혁은 한 번도 못했다. 임진왜란을 당해도, 병자호란을 당해도, 서정(庶政)이 썩어가는 데도, 개혁은 없었다. 고종 갑오년(1894년), 일본의 강제에 의해 갑오경장(甲午更張)을 했으나, 그것은 망국의 개혁이었다. 사람에 나이가 있는 것처럼, 나라에도 나이가 있고, 문명에도 나이가 있다. 나라나 문명이나, 제 때에 개혁을 하지 않으면, 맥을 못 쓰다가 곧 늙어 죽는다. 모든 고대문명이 그래서 죽었다. 유독 중국문명이 예외인데, 그 문명도 거의 죽을 지경에, 두 번의 혁명을 겪은 후에 겨우 기사회생(起死回生)을 했다. 대한민국도 이제 환갑을 지났다. 후세의 모범이 될 새로운 나라의 전통은 세우지 못하고 있는 판에, 구질구질한 구태가 많이 쌓였다. 지금이 ‘나라 만들기’(Nation Building)의 기회로 보이지만, 워낙 개혁의 DNA가 미약한 나라라, 또 무사안일에 젖지 않을까 두렵다.

본 글은 2014년 7월 10일 개최된 동반성장연구소 제12회 월례포럼에서 발표한 것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