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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산(恒産)을 떠받칠 화폐시스템을 제안하다
항산(恒産)을 떠받칠 화폐시스템을 제안하다
  • 박이택 본지 편집기획위원, 고려대 연구교수
  • 승인 2015.02.11 15: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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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고전으로 읽는 경제사상사-유교적 공의(共議)의 정치경제학: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②> 황종희, 금은 대신 동전과 화폐 유통되는 화폐시스템 개혁 제시

명나라가 망했다. 멸망의 원인은 온전히 정치적인 것이었을까? 황종희는 정치투쟁의 밑에 이권 다툼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권 다툼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경제제도였다. 왜 잘 나누는 성인의 정치는 사라졌는가? 이 물음은 경제제도의 변천을 고찰함으로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명이대방록>이 주나라 이래 중국의 주요한 경제제도의 변천을 검토하는 경제사 교과서의 형태를 띤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 그 모든 것을 다룰 수는 없다. 돈에 한정해서 살펴보자.

문제는 돈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돈(money)이 문제였다. 그런데 무슨 돈이 문제였을까? 금은, 동전, 지폐, 물품화폐(粟帛), 사실 명대에는 많은 종류의 돈이 유통되고 있었다. 그것들이 교환의 매개로 기능하는 경제의 영역은 달랐다. <중화제국의 구조와 세계경제>, <화폐시스템의 세계사>의 저자로 유명한 구로다 아키노부(黑田明伸)는 중국의 역사 속에서 화폐의 다종성을 보았고, 그것에 힌트를 얻어 남다른 세계사를 쓸 수 있었다.

고대 중국 문명의 기초에는 동전경제가 있었다. 서구 문명이 금은경제에 기초하였던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금은과 동전의 회류 체계는 매우 다르다. 동전은 가치에 비해 무겁기 때문에, 고가의 제품이나 원격지 거래에는 적합하지 않은 반면, 일용품 시장이나 지역내 거래에 적합하다. 금은은 무게에 비해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일용품 시장에서의 거래에서는 쓰기 어려웠지만, 고가의 제품이나 원격지 거래에는 적합하였다. 한 나라 시대 <염철론>에 등장하는 유학자들이 동서양 교역으로 대표되는 광역적 물류의 옹호론자들에 대항하여 농민적 물류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 문명에 동전경제적 뿌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명대에 이르러 동전경제를 뿌리째 뒤 흔드는 변화가 발생했다. 은경제가 동전경제를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과 라틴아메리카로부터 들어오는 은을 기초로 하여 일반적인 조세 납부수단을 은으로 바꾼 것이다.

명나라 멸망의 화폐적 기원(1): 전제적 황제지배체제의 탐욕

중국은 넓지만, 동전은 무겁다. 바로 이것이 동전경제 시대 중국의 중앙집권성을 제약하는 요인이자, 황제 및 그 측근들의 탐욕을 제한하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은경제가 진행되면서 이 제약은 완화되었다. 보다 강화된 전제적 황제지배체제가 가능하였고, 지배계층의 탐욕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온 세상을 헤집고 다녔다. 사정이 그러하였음은 만력28년(1600년) 봉양 순무 이삼재(李三才)의 상소가 잘 보여준다.

“광세가 시행된 이후 만민이 생업을 잃어 조야가 떠들썩한데 이를 어찌해야 할지 대책이 없습니다. 황상께서는 만민의 주인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입을 것을 주진 못할망정 그들이 입은 옷마저 빼앗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진 못할망정 그들의 먹을 것마저 빼앗고 계십니다. 징수를 담당한 사절은 성화처럼 닦달하고, 세금을 긁어 올리라는 명령은 쇠털같이 빈번하게 들이닥칩니다. 오늘 어느 광산에서 은을 조금 캐고 내일 또 은을 조금 캐면, 오늘 그곳에서 그만큼 세금을 매기고 내일 또 그만큼 세금을 더 매깁니다. 오늘은 어느 관리가 광세징수를 저지했다고 붙잡혀 압송당하고, 내일은 어느 관리가 광세 징수에 태만했다고 파직당하고, 위아래 가릴 것 없이 오직 이익만을 따져 닦달해댄다 합니다. 황상께서 주옥을 좋아하시는 만큼 사람들 역시 따뜻하고 배부른 것을 좋아합니다. 황상께서 내세의 삶을 염려하시는 만큼 사람들도 처자식을 아끼고 사랑합니다. 황상께서 북두칠성보다 더 높이 황금을 쌓아두려 하시면서, 어찌하여 백성들에게는 단 한 되 한 말의 쭉정이와 쌀 껍질도 남기지 않으려 하시는지요? 황상께선 자자손손 천만년 편안히 살 계획을 세우시면서, 어찌하여 백성들에게는 단 하루아침 하루저녁 편안함도 주려 하지 않으신지요? 지나간 역사를 좀 살펴보시옵소서! 조정에서 정치하는 것이 이와 같고 천하가 돌아가는 꼴이 이와 같은데도 난리가 일어나지 않은 적이 과연 있었는지요!” (<이탁오 평전>, 20-21쪽)

은경제는 원격지간 가치 이전에 있어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은경제가 민생의 안정과 병존할 수 있도록 은화 유통에 대한 새로운 규제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제도적 혁신 없이 지배계급의 탐욕을 엔진삼아 브레이크 없이 진행된 은경제화는 국가를 멸망의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명나라 멸망의 화폐적 기원(2): 1630년대 이후 디플레이션 shock

은화의 수입이 감소되면 탐욕은 줄어들고, 문제는 해결될까? 이 문제에 대해 역사가 주는 대답은 “아니오”이다. 이미 은경제화된 세계 속에서 은화의 유입이 감소하면 디플레이션 shock이 발생하면서 농민의 반란 속에 국가는 붕괴된다. 명나라가 그러했고, 청나라가 그러했다.

1810년경부터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독립운동 때문에, 라틴아메리카로부터 유럽으로 들어오는 은이 줄자,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수지 적자를 메울 은을 마련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영국은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하여 중국에 팔았는데, 중국의 아편 흡입 자가 늘어남에 따라, 은의 흐름이 역전되었다. 중국의 은은 공에서 바람이 빠지듯이 중국의 외부로 세어나가, 중국에서는 디플레이션 shock이 발생했고, 이것이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청나라 멸망의 단초가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명나라의 멸망에도 은의 유입의 감소에 따른 디플레이션 shock이 작동하고 있었다. 1630년경부터 일본과 유럽으로부터 들어오던 은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야기한 디플레이션 shock을 <명이대방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은의 유통력이 이미 고갈되었는데도 부세는 옛날 그대로이고, 교역도 옛날 그대로이다. 허둥지둥 은을 구하고자 해도 장차 어디에서 구하겠는가! 그러므로 논밭의 가격은 다른 때의 10분의 1도 안 된다. 어찌 그 토양이 척박해져서이겠는가? 아니다. 부세를 바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재화의 가격이 또한 다른 때의 10분의 1도 안 된다. 어찌 그 물건이 풍부해져서이겠는가? 아니다. 교역하는 데 자금(銀)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탕화(湯火)의 열기 속에서 움직이는 백성들은 시절이 평화롭고 풍년이 들어도 무익하다. 수리시설이 좋은 곳에서 농사를 권해도 무익하다.” (<회계제도> 187쪽)

중국인구의 2%도 되지 않은 만주족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건국함에는 지배계급의 탐욕과 디플레이션 shock이 도화선이 된 민심의 이반이 있었다.

▲ 明나라 때(1374~1379) 건설된 서안성(西安城)은 높이 12m, 폭 15m 그리고 총 길이가 14 km되는 규모로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성벽은 동서남북 4개문이 모두 남아 있고 둘레에는 길이 13.7㎞의 깊은 해자(垓字)가 설치되어있다. 시안(중국)=뉴시스

화폐시스템 개혁(1): 금은의 유통을 금지하라

어떻게 해야 지배계급의 탐욕으로부터 그리고 은화 유입의 변동으로부터 민생을 보호할 수 있을까? 황종희는 금은의 유통을 허용하는 한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금은의 유통을 금지하고,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화폐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우선, 금은의 유통 금지를 합리화할 근거가 필요했다. 그래서 제시한 것이 금은 유통 금지의 7가지 이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금은제도를 폐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금은제도를 폐지하면 일곱 가지 이점이 있다. 곡식과 비단(粟帛) 같은 종류는 일반 백성들의 힘으로 경작하여 쉽게 풍족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이 그 하나이다. 동전을 주조하여 유무(有無)를 통하면 주조하는 사람은 쉴 틈이 없고, 화폐가 고갈되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그 두 번째이다. 금은을 저장하지 않으면 빈부의 차가 심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그 세 번째이다. 가볍게 지니고 다니기에 불편하니 백성들은 고향을 떠나는 것이 어렵게 될 것이다. 이것이 네 번째이다. 관리가 사사로이 소매 밑에 감추기 어려운 것이 그 다섯 번째이다. 도적이 금궤를 열고 훔쳐 도망가도 짐이 무거워 (멀리 못가니) 쉽게 쫓아갈 수 있는 것이 그 여섯 번째이다. 동전과 지폐가 통용되는 것이 그 일곱 번째다. 그러나 반드시 엄격한 금령을 내려 광산에서 (금은을) 훔치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금은을 유통시키는 자는 동전을 함부로 주조하였다는 논죄를 한 이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회계제도> 187-188쪽)

금은은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키고, 향촌 사회를 해체시키고, 지배계급의 탐욕을 유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금은이 유통되어서는 동전과 지폐가 통용될 수 없다는 자신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화폐시스템 개혁(2): 동전과 지폐가 유통되도록 하라

황종희가 제시한 화폐시스템 개혁은 금은 대신에 동전과 지폐가 유통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금은이 원격지간 가치 이전의 수단임에 반해, 동전은 지역내 유동성으로서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킬 뿐만 아니라, 그 무거움으로 인해 금은과 달리 과잉 유동화의 문제도 가지지 않았다.

단, 동전은 무겁기 때문에, 지역간 가치 이전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는 어렵다. 지역간 가치 이전도 필요하다. 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지폐이다. 지폐와 금은은 모두 지역간 가치 이전의 수단이지만, 금은이 동전경제를 위축시킴에 반해, 동전을 본위로 한 지폐의 발행은 동전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역경제의 활성화와 지역간 가치 이전 양자를 모두 도모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동전과 지폐를 쌍으로 한 화폐시스템을 제안한 것이다.

물론 중국의 역사에서 동전과 지폐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금은경제의 형성은 동전과 지폐 제도의 폐단에서 말미암은 바도 있기 때문에, 동전과 지폐제도가 잘 유지될 수 있는 방안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역사를 볼 때, 동전의 폐단은 국가가 주조이차를 노리기 위해 고액전이나 저질 화폐를 발행함에 기인했다. 따라서 동전이 재화의 원활한 유통을 위한 교환의 매개로 사용되는 영구적 이로움을 위하여, 주조이차라는 일시적 이로움은 제한되어야 함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전폐(錢弊)가 이익이 되는 까닭은 일시적인 이로움은 없어도 그 후 영구한 이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3, 4전의 비용으로 10전의 이익을 얻고, 적은 양의 종이로 금은에 해당하는 만큼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일시적인 이로움이다. 국경 안에서 항시 천만의 재화가 끝없이 유전하는 것이 영구한 이로움이다. 뒤에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항상 이것을 돌아보고 저것을 잊었기 때문에 (화폐제도에 대해) 새롭게 의논하는 것이 장애가 되어 왔다.” (<회계제도> 190-191쪽)

과거의 역사를 볼 때, 지폐제도의 폐단은 지폐의 가치를 안정시키는데 실패한 것에 기인한다. 따라서 지폐의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동전본위 지폐제도를 제안한다. 동전을 지급준비로 가지고 있다가, 언제라도 백성들이 지폐를 동전으로 바꾸기를 원할 때 바꾸어 주면, 지폐가치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명나라가 지폐제도[鈔法]를 시행하려고 하였으나 할 수 없었던 것…. 명대의 보초고(寶鈔庫)는 오래된 지폐를 회수하는 데 불과하며, 칭제(稱提)의 제도를 갖추는 것을 강구하지 않았으니, 어찌 시행되지 않은 것이 이상하겠는가? 의종 때 이익을 말하는 신하가 (화폐제도의) 시행에 대한 처음과 끝의 상세한 내막을 모르고, 헛되이 한 척의 종이가 금과 은에 해당하는 것을 보고, 단지 그것(지폐)을 제조하는 제도만 강구하고 시행되는 제도는 강구하지 않았다.

관에 본전이 없는데 백성들이 어떻게 신뢰하겠는가! 그러므로 그 때 시행할 수 있다고 한 사람은 마치 날아가는 탄환을 보고 구운 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진정으로 전민(錢緡)을 쌓아놓고 5년을 경계로 오래된 지폐를 거두어 불사르고 관민(官民)이 사용하는데, 관(關)에서는 그것(지폐)으로 상세(商稅)를 물리고 시장[場]에서는 그것을 염인(鹽引)으로 교역한다면 또한 어떻게 시행되지 않을 걱정을 하겠는가!” (<회계제도> 192-195쪽)

동전본위 지폐제도는 금본위 지폐제도(=금태환 제도)와 같은 종류의 것은 아니다. 동전은 지폐의 가치를 보증하는 수단임과 동시에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킬 지역내 유동성이다. 동전을 본위로 한 것은 광역적 유통과 지역내 유통의 조화를 도모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화폐시스템 개혁(3): 임토작공(任土作貢)을 허용하라.

그러나 동전과 지폐를 쌍으로 한 화폐제도도 나름의 결점을 가지고 있다. 동전도 잘 회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양에서는 돈을 천(泉)이라 쓰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것은 퍼도 퍼도 계속 쓸 수 있는 우물처럼 마르지 않고 회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는데, 현실은 이와 달랐다.

구로다 아끼노부(黑田明伸)가 돈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중국인의 기록에 “올해는 풍년이어서 쌀값이 비싸다”라든가 “올해는 흉년이어서 쌀값이 싸다”라는 어찌 보면 말도 되지 않는 표현들이 중국인의 일기에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왜 이와 같은 표현이 등장한 것일까? 그의 분석에 의하면, 한 지역에 풍년이 들면, 쌀이 풍부할 것이라 생각한 상인들이 돈을 잔뜩 갖고 모이기 때문에, 쌀보다 돈이 많아져서 쌀값이 비싸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지역에 흉년이 들면, 쌀이 없기 때문에, 돈을 가진 상인들이 전혀 오지 않아, 쌀보다 돈이 더 귀해져서 쌀값이 싸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돈의 회류 체계의 불안정성을 보여준다.

돈의 회류체계의 불안정성 속에서 민생을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그 지역의 생산물로 조세를 납부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는 것, 즉 임토작공(任土作貢)이 그 해법일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천하의 은이 고갈되면, 흉년에는 농토의 소출은 세금을 바치기에 부족하고, 풍년에는 농토의 소출로 세금을 바치기에는 넉넉하지만, (이것을) 은으로 바꾸어 낸다면 (흉년 때와 마찬가지로) 세금을 바치기에 넉넉하지 못하다. 이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해마다 모두 흉년이 들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늘은 백성들에게 풍년을 주었는데, 위에서 다시 그것을 빼앗는다. 이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자들이 백성들을 원수로 여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왕(聖王)이 천하를 다스리면 그는 반드시 농토를 마땅한 것에 맡겨서 백곡을 생산한 자에게는 백곡을 내게 하고, 뽕과 삼을 심은 자에게는 비단과 베를 내게 하고, (그밖에) 잡다한 생산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생산한 것을 내게 하여 백성들을 궁핍한 데 이르게 하지 않을 것이로다!” (<토지제도> 153-154쪽)

임토작공이란 조세 납부에 있어서는 그 지역의 토산물에 화폐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화폐 환류체계의 불안정성을 백성들이 스스로 유동성을 창출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해소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글로벌 유동성 속에 심화되는 양극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황종희가 살았던 명말청초의 시대는 중국에서 상품화폐경제가 만개했던 시대였다. 고도로 발전된 상품화폐경제 속에서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지적 고투의 결과 얻어진 결론은 동전본위 지폐제도와 임토작공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이 화폐시스템은 잘 작동할까? 우리는 아직 이것에 답할 상태에 도달해 있지 않다. 그렇지만, 현재 세계 각국이 경험하고 있는 ‘글로벌 유동성 속에 심화되는 양극화’라는 경제 문제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문제는 아니라는 점은 명백해졌다. 이에 대한 과거의 지혜는 무엇이었을까? 이것도 우리가 고전 속에서 찾아야 할 보석 중의 하나이다. 

본 기사는 월간지 <이코노미21> 10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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