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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자본주의 비판으로서의 도시국가적 윤리학
고대 자본주의 비판으로서의 도시국가적 윤리학
  • 박이택 본지 편집기획위원, 고려대 연구교수
  • 승인 2015.09.19 17: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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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가치 축적의 노예로서의 삶이 아닌 훌륭하고 행복한 삶을 지원하는 체제 구축 주장

<동서양 고전으로 읽는 경제사상사 - 행복과 친애의 정치&경제학: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정치학>②>

어떻게 하면 도시국가를 행복과 친애의 공동체로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철학의 화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철학적 저작들은 정치학을 지향하고 있었지만, 이 행복과 친애의 공동체도 유지 존속되기 위해서는 구성원의 생존과 재생산을 보장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어야 하며, 구성원들의 생존과 재생산의 체계는 그가 제시하는 도시국가적 질서와 정합적이어야 할 터였다. 따라서 그의 실천철학적 저서에는 경제체제에 대한 다양한 구상이 드러나 있다. 물론 그 모든 구상을 다 고찰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는 주된 몇 가지 구상을 간략히 살펴본다.

고대 그리스의 번영과 고대 자본주의

고대 그리스는 어떤 세계였을까?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전근대세계를 맬더스적 세계로 묘사한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임금은 생존하기에 빠듯한 수준에서 결정된다. 근세적 경제발전이 일어나기 이전의 시대를 초장기적으로 보면 이렇게 묘사하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르지만, 맬더스적 족쇄에서 벗어나 상당히 오래 동안 생활수준을 지속적으로 개선시킨 시대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시대가 그러했고, 중국의 송나라 시대가 그러했다.

Ian Morris가 인간의 뼈와 집터로부터 추정한 바에 의하면,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300년 동안 그리스 전역의 1인당 소비는 거의 두 배로 증가했다. 500년에 걸쳐 소비수준이 2배로 늘어난 것은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높게 평가할 바가 아니다. 연평균 성장률로 계산하면 고작 0.14%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 쇠퇴가 아니라 장기 성장이 이루어졌다는 점은 주목해 둘만 하다.

이와 같은 장기 성장의 시대였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 아테네 경제를 맬더스적 족쇄가 채워진 경제라기보다 자연의 풍요로움에 힘입어 생존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아담과 이브의 세계에 더 가깝게 묘사했다. <정치학> 제1부 제8장을 보자.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이런 종류의 재산은 모든 생물에게 태어나면서부터 다 성장할 때까지 자연에 의해 주어지는 것 같다. 어떤 동물은 새끼를 낳는 순간 새끼가 식량을 자급할 수 있을 때까지 새끼를 충분히 먹일 만한 식량을 생산한다. 예컨대 유충이나 알을 낳는 동물이 그렇다. 그리고 태생(胎生) 동물은 새끼에게 먹일 식량을 일정 기간 몸 안에 갖고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젖이다. 마찬가지로 다 성장한 것들을 위해서도 식량이 마련되어 있다고 우리는 추론하지 않을 수 없는데, 식물은 동물을 위해 존재하고, 다른 동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그중 길들인 동물은 노력과 식량을 제공하기 위해, 그리고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야생동물은 식량 외에도 옷과 여러 가지 도구를 제공하기 위해 존재한다.” (<정치학> 39-40면)

자연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두렵고 변덕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기에 충분한 자원을 제공하는 자애로운 존재로 묘사된다. 이와 같은 묘사를 가능하게 했던 아테네 경제의 장기적 성장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식량은 기술이 향상됨에 따라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인구는 기술의 진보를 잡아먹을 만큼 충분히 빠르게 증가하지 못했다. 전근대적 번영의 시대에 인구의 증가가 식량의 증가를 충분히 빠르게 따라잡지 못하도록 하는 메커니즘은 있었는가? 최근 경제사가들은 전쟁과 도시화와 교역의 발전에 주목한다. 이것들은 모두 기술을 진전시키는데 기여하지만, 전쟁은 직접적으로 사람을 죽임으로써, 도시화와 교역의 발전은 전염병을 유포함으로써 인간의 사망률을 높이는데 기여한다. 기술을 발전시키고 인구증가를 억제시키는 이와 같은 요인들은 고대 시대에도 장기적인 성장의 시대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시대의 아테네도 전쟁이 빈발하였고, 도시경제가 발전하였으며, 교역이 발전하였던 시기였다. 이중 어느 것이 더 중요했는지 더 살펴보아야 할 문제지만, 이것들은 결합하여, 소비수준을 장기적으로 개선시키고 있었으며, 상품화폐경제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와 같은 변화를 혹자는 고대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노동가치설인가 자연가치설인가?

물론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수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의 선물은 그 자체로는 인간이 사용할 수 없는 형태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인간이 소비하기에 적절한 형태로 변형시켜야 하는 데, 이 때 도구는 매우 유용하다. 도끼, 망치, 끌 등 손도구도 유용하지만, 이 시대 가장 유용한 도구는 바로 노예였다. 인간의 형상을 한 도구로서의 노예의 의미를 독해하기 위해서는 자연이 주는 선물을 향유하기 위해 행하는 수고가 어떤 윤리학적 가치를 가진 행위인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정치학> 제1부 제10장을 보자.

“정치가의 기술이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제공하는 사람들을 받아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자연은 또 인간들에게 대지나 바다 등을 식량원으로 제공할 것이 틀림없는 만큼 가사 관리인의 임무는 주어진 것들을 받아 적절히 관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옷감을 짜는 사람의 임무는 양모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양모를 사용하는 것이고, 질이 좋고 쓸 만한 양모와 질이 나쁘고 쓸모없는 양모를 구별해내는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정치학> 48면)

자연이 주는 선물 속에 내장되어 있는 유용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소비하기에 편하도록 가공하는 것을 우리는 생산이라 표현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사용이라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생산적 존재는 자연이다. 인간은 자연이 준 선물 속에 내장된 사용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사용할 뿐,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는 아니다. 혹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노동가치설 주창자로 독해하기도 하지만, 위 문단으로 보는 한, 그는 노동가치설 주창자가 아니라 자연가치설 주창자라 해야 할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생산능력을 가진 것은 자연일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 활동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인간의 활동은 어떤 가치를 갖는가? 그것은 생산적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가치를 갖는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활동을 생산적인 것과 비생산적인 것으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 윤리적 가치 판단을 할 필요가 없는 것 등으로 분류한다.

▲ 라파엘로가 로마 교황 율리우스 2세 명령으로 그린 프레스코 벽화 ‘아테네학당’.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자로 묘사돼 땅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의 저서 “니코마스윤리학(Nicomachean Ethics)를 들고 있다. 가운데 인물이 아리스토텔레스. 출처-엔하위키 미러

인간은 자연이 준 산물이나 인간 그 자신에게 내장된 사용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 활동하는데, 윤리적 가치는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 활동에만 부여된다. 자연의 선물 속에 담긴 사용가치를 향유하는 인간의 활동 그 자체는 어떤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윤리적 판단의 대상은 인간 자신의 사용가치를 향유하는 합리적 선택 행위에 한정될 뿐이다. 인간이 부족하지도 그렇다고 넘치지도 않는 딱 그만큼의 최적화된 행위를 합리적으로 선택했을 때, 그것을 중용이라 하고, 최고의 윤리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넘치거나 부족한 것에 대해서는 윤리적 비난을 가한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윤리적 기준에 의한 인간 활동의 범주화를 가능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적 기준에 의한 인간 활동의 범주화와 인간의 윤리적인 능력은 선천적으로 결정된 측면도 있다는 것을 결합하여, 주인과 노예라는 지배체제를 정당화한다. 물론 노예라고 완전히 윤리적 능력이 결여된 것은 아니며, 스스로 개발하여야 할 탁월성의 영역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정치학> 제1부 제13장을 보자.

“도덕적(ēthikē) 탁월함의 경우도 그 점은 마찬가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모두들 도덕적 탁월함을 지니되, 똑같은 정도가 아니라 각자 제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지니는 것이다. 그래서 치자는 완전한 형태의 도덕적 탁월함을 지녀야 하는데, 그것은 그의 기능이 진정한 의미에서 우두머리 장인(匠人)의 기능이고, 이성이야말로 우두머리 장인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구성원도 각자 필요한 만큼 도덕적 탁월함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아이의 탁월함은 자신과의 관계가 아니라 그의 목표와 스승과의 관계에서 존재하며, 마찬가지로 노예의 탁월함도 주인과의 관계에서 존재한다. 우리는 노예가 생활에 필요한 일을 처리하는 데 유용하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렇다면 분명 노예에게는 약간의 탁월함만이, 말하자면 무절제하고 비겁하여 가끔 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은 정도의 탁월함만이 필요하다.

...... 따라서 분명 주인은 노예에게 노예 고유의 탁월함을 심어주어야지, 노예가 할 일을 일일이 지시하는 관리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노예에게는 이성이 없으며 주인은 명령을 내리기만 하면 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노예들에게는 아이들에게보다 더 충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정치학> 58-60면)

노예에게는 노예로서의 소임을 할 수 있도록 그만큼의 탁월함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주인은 주인으로서의 도덕적 탁월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주인에게 요구되는 탁월함과 노예에게 요구되는 탁월함이 다르다는 것이다.

왜 경제체제를 규제하는 윤리적 코드가 필요한가?

그렇다면, 주인으로서의 도덕적 탁월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도시국가적 질서를 유지하는데 어떤 기능을 수행하며, 그리고 그와 같은 도덕적 탁월함을 가진 사람들이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철학의 체계 속에 담겨져 있는 ‘경제체제를 규제하는 윤리적 코드’를 묻는 것인데,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대 아테네 자본주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연이 주는 선물을 사용함으로써 생존 및 재생산의 물자를 확보할 수 있다. 이를 위한 기초적인 단위는 가정이다. 가정은 주인-노예로 구성된 생존물자의 확보체계와 부부관계와 부자관계로 구성된 재생산의 체계를 모두 포괄한다. 이 가정은 생산과 재생산의 자족적인 상태를 지향하여야 하지만, 자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물자를 전부 자신이 마련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부족한 물자는 구입하고, 남는 물자는 판매하는 교환경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물교환으로서의 교환의 체계를 수용한다. <정치학> 제1부 제9장을 다시보자.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물건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 두 가지 용도 모두 물건을 사용하는 것이지만 그 양상은 같지 않다. 한 가지 용도는 물건에 고유한 용도지만, 다른 용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샌들은 신는 데도 사용되고 교환되는 데도 사용된다. 샌들은 두 가지 용도로 쓰이는 것이다. 돈이나 음식을 받고 샌들이 필요한 사람에게 샌들을 주는 사람은 샌들을 샌들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샌들의 고유한 용도는 아니다. 샌들은 교환하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다른 재물도 마찬가지다. 물물교환(metablētikē)은 이들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너무 적게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돈버는 기술(chrēmastikē)이 상업의 자연스러운 부분이 아님을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쌍방의 욕구가 충족될 때까지만 교환 행위가 필요할 것이다. ”(<정치학> 43면)

물물교환은 소유와 필요의 괴리가 가져온 물건의 사용가치의 미실현을 해소한다는 점에서 자연이 준 선물을 향유하기 위해 허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물교환은 교환경제를 허용하고, 교환경제는 상업경제를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물물교환은 사용가치를 적게 평가하는 사람으로부터 사용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으로의 물건의 이전이라는 점에서 교환의 이득을 발생시킨다. 이와 같은 교환의 이득이 있으면, 사용가치의 실현이 아니라 교환의 이득 그 자체를 추구하는 행위가 발전한다. 바로 돈버는 기술에 바탕한 상업경제이다. 그런데 이 상업경제는 자연의 선물을 향유하는 자족적 생존경제를 해체하고, 인간을 무한한 가치 축적의 노예가 되도록 한다. <정치학> 제1부 제9장을 다시 보자.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증식이 가사 관리의 기능이라고 믿고는 가지고 있는 화폐를 그대로 간직하거나 무한히 증식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인간이 훌륭한 삶이 아니라 단순한 생존을 추구하는 데서 기인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들의 욕망이 무한하듯, 그 욕망을 충족시킬 수단도 무한하기를 원한다. 훌륭한 삶을 추구하는 자들마저도 물질적 향락에 도움이 되는 수단을 추구한다. 또한 물질적 향락은 재산의 소유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에 인간은 재산 획득에 전념하게 되고, 그리하여 두 번째 종류의 재산 획득 기술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들의 향락은 과잉(過剩)에 있으므로, 그들은 향락의 과잉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술을 찾게 된다. 그리고 재산 획득 기술로 이런 향락을 얻을 수 없는 경우, 그들은 다른 수단을 써서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데, 이때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능력을 자연에 위배되게 사용한다. ..... 그런데도 이들은 모든 기술을 재산 획득 기술로 전환하는데, 재산 획득이 목적이고 모든 것은 목적에 이바지하여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정치학> 46면)

인간의 가정생활의 본래적 기능은 생존과 재생산에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고 사용하는 것인바, 그 기능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생산물의 본래적 사용가치에 대한 우리의 욕구’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들이 이와 같은 자연적인 욕구의 한계 속에서 살아간다면, 자연의 선물은 충분히 넉넉하다. 그러나 교환의 이익을 얻기 위한 재산획득 활동이 주가 되면, ‘자연적인 사용가치에 대한 제한된 욕구’ 대신에 ‘한계가 없는 부에 대한 욕구’가 인간을 지배하여, 불평등과 빈곤과 채무노예가 양산된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교환을 통해 사용가치를 실현하면서도 가치 축적의 노예로 전락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은 가치 축적의 노예로 살아가는 삶보다 더 나은 삶 즉 행복하고 훌륭한 삶을 제시하고, 서로 그와 같은 삶을 살도록 지원하는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쓴 이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 자본주의 비판은 아직도 유효한가?

아리스토텔레스를 호출하는 경제학자는 두 분류이다. 한 분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속에 담긴 ‘가치론에 대한 맹아적 발상’에 주목하는 학자들이다. 또 한 분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속에 담긴 자본주의 비판에 주목하는 학자들이다. 전자를 대표적인 사람이 슘페터라면, 후자를 대표하는 사람은 폴라니와 칼 맑스이다. 폴라니는 ‘경제체제를 규제하는 윤리적 코드’로부터 ‘사회로부터 자립되지 않은 경제’ 즉 ‘사회에 매몰된(embedded) 경제’라는 과잉시장화 되기 이전의 경제체제의 모습을 보았다면, 칼 맑스는 상업경제에서 인간이 가치 축적의 노예로 전락한다는 비판적 인식 속에서 화폐 물신화와 가치의 전도과정이 역사적으로 출현하는 현장을 보았다.

그러나 아직도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제학자들에게 충분히 잘 해독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치 축적의 노예이기를 그만두고,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을 더불어 즐기면서 훌륭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치 축적의 노예로서의 삶의 대안으로서의 살만한 삶, 즉 훌륭하고 행복한 삶의 모형을 마련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대안은 만족스럽지 않다. 그가 제시한 훌륭한 삶은 노예소유자들인 자유민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예적 삶에 대한 비판은 훌륭한 삶의 방식을 정립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그의 실천철학적 함의는 여전히 현실적 울림이 있다. 21세기 현재 한국인이 추구할 만한 품격있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 그리고 모든 한국 사람들이 그와 같은 품격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것을 멋들어지게 제시하는 것이 가치 축적의 노예로서의 삶에 대한 진정한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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