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얼마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런데 우리에겐 썩 내키지 않는 말이다. 우리 사회엔 모두가 ‘노블레스’라고 인정할 만한 사람들이 아직 많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하면 “오블리주”보다 “노블레스”에 초점이 맞춰진다. 단지 지금 돈이 많다고, 고위관직에 있다고 노블레스인가. 과연 그들이 이 사회에서 존경받는 노블레스로서 자격이 있는가. 대개는 그렇지 않다. 우린 여전히 길지 않은 자본주의 역사를 갖고 있고 해방이후 사회제도에 대한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돈의 형성과 자본 축적에 대한 불신이 여전하고 고위관직에 대한 불평등, 불공정 시비가 여전하다. 그래서 ‘노블레스’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없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초기 로마시대, 왕과 귀족들이 보여준 투철한 도덕의식, 솔선수범의 공공정신에서 비롯됐다.
초기로마에선 고위층의 공공봉사 등 사회공헌, 헌신의 전통이 강했다. 이러한 전통은 의무인 동시에 명예로 인식되었으며 귀족간 선의의 경쟁이기도 했다.
미국과 유럽에선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참전 경력과 밀접하다. 이 역시 로마의 전통이다. 로마귀족들은 직접 전쟁에 참여하는 전통이 확고했다. 로마 공화정 로마 원로원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1/15까지 급락했는데 수많은 전투에서 귀족들이 계속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로마귀족은 수많은 문제점을 양산했지만 이러한 희생의 전통을 유지했다. 귀족의 솔선수범과 희생은 로마가 세계를 제패한 힘이었다.
영국도 이러한 전통을 강조한다. 제1,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귀족을 대표하는 이튼칼리지 출신중 2,000여명이 전사했다. 포클랜드전쟁에선 영국여왕의 둘째아들 앤드루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6·25전쟁에 미군 장성의 아들이 142명이나 참전해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당했다. 아이젠하워대통령의 아들도 육군소령으로 참전했다.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명예와 돈을 갖추고 사회적 희생, 특히 전쟁과 같은 목숨을 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고위층의 사회공헌적 도덕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여기서의 노블레스는 질시가 아닌 존경을 받는 전통적 가문을 의미한다.
노블레스는 질시가 아닌 존경을 받는 전통적 가문 의미
미국의 ‘노블레스’ 정치명문을 꼽으라면 단연 케네디가와 부시 가문을 꼽을 수 있다.
부시 가문은 무려 2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텍사스의 부호인 부시가(家) 정치인은 제41대 대통령 조지 부시의 아버지 프레시콧 부시에서 비롯된다. 기업가로 성공한 그는 상원의원과 후버 대통령 보좌관을 지냈으며 아내의 부친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보좌관을 지냈다. 부시대통령은 하원의원과 CIA국장, 부통령을 지내는 등 엘리트코스를 거친 뒤 대통령직에 올랐다. 그의 아들 조지 W 부시는 43대 대통령이 되어 연임에 성공했다. 또 다른 아들 젭 부시는 플로리다 주지사를 지낸데 이어 2016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힐러리 클링턴의 대항마로 나설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강력하게 부상하고 있다. 그가 만약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부시가의 대통령이력은 미국사에서 전무후무할 가능성이 높다. 말그대로 정치명문이다. 특히 조지 부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8세의 나이로 해군에 입대, 해군 전투기 조종사로 58회의 전투에 참여해서 무공 훈장을 무려 3개나 받았다. 그의 아들 조지 W 부시는 주방위군에 장교로 입대, 군 경력을 이어갔다.
그러나 미국 최고의 정치명문가로 꼽히는 부시 가문은 호전적 전쟁과 석연찮은 부의 축적과정 등으로 권력적 이미지가 강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존경받는 대통령과는 거리가 있다는 평이다.
그래서 미국 최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최고의 정치가문은 단연 케네디가의 몫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케네디 가문
케네디 가문은 아일랜드계다. 게다가 종교적으로 카톨릭전통을 갖고 있다. 미국은 유럽 카톨릭의 신교박해를 피해 넘어온 청교도적 전통을 갖고 있다 보니 케네디가의 미국 초기 이민사는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조부, 그리고 아버지 조지프 패트릭 캐네디는 케네디가의 기반을 다졌다. 케네디가는 이민 초기 가난했지만 케네디 대통령의 조부 패트릭 조지프 케네디는 사업에 성공, 매사추세츠 주의회 의원까지 지냈다. 이어 그의 아들 조지프 패트릭은 1912년, 하버드대를 졸업한 뒤 파산직전의 지방 은행을 사들여 20대 중반에 은행장이 되었다. 이 은행을 키워내 금융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미국을 대표하는 거부로 성장했다. 동시에 정치에도 수완을 발휘해 상원의원, 주영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주가조작, 주류밀매 등 재산형성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 아들들에 정치적 기대를 걸었다. 1915년 장남 조지프 패트릭이 태어났으며, 1917년 차남 존(35대 미국대통령)이 태어났다.
그의 장남은 모든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나 제2차 대전에 해군 대위로 참전, 전사했다. 특히 그는 시신조차 확인할 수 없는 죽음을 당해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렇지만 차남 존 F 케네디는 1960년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존 F 케네디 역시 제2차 세계대전에 해군 중위로 참전, 형과 달리 전쟁영웅으로 귀환했다. 그는 남태평양에서 PT-109 고속 어뢰정의 해군 장교로 있으면서 배가 일본군에 격침되자 위험속에서도 동료들을 구해내며 영웅이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그야말로 용기 있는 대통령의 표상이 되었다. 그는 미국 주류 백인들의 반대에도 불구, 군대까지 동원해가며 흑인인권운동에 앞장섰다. 링컨대통령의 노예해방정책이후에도 사회적으로 차별이 여전하던 흑인들은 케네디 시대에 들어서야 대통령의 적극적인 흑인차별반대정책에 힘입어 사회적 장벽을 극복하는데 큰 전진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또 ‘뉴프론티어’를 역설하며 국민들에게도 국가를 위해 헌신해달라고 강조했다. 특히 그의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조국이 무엇을 해줄지를 요구하기에 앞서 내가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자문해주십시요” 라고 역설, 용기 있는 대국민 연설의 표상이 되었다.
당시는 미소냉전 중었다. 특히 후루시초프는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닉호를 쏘아올리며 우주전쟁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특히 원자폭탄, 수소폭탄 개발로 한발 앞서나갔던 미국인들의 콧대를 일시에 꺾어 버렸다. 이 와중에 쿠바미사일 위기가 닥쳐왔다. 그는 쿠바미사일 위기를 맞아 후루시초프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용기있는 대처로 용기있는 대통령의 결단의 중요성을 다시 각인시켰다. 높은 인기를 누리던 그였으나 1963년 11월, 댈러스에서 리 하비 오스왈드에게 피격돼 사망했다.
케네디 대통령 사후에도 케네디가는 그의 동생 로버트(상원의원. 암살), 에드워드(상원의원)가 모두 명망 높은 민주당의 정치인으로 성장했으나 불운이 거듭되었다.
케네디가는 많은 정치인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전통을 이어갔다. 특히 민주당의 개혁적 입장을 견지하며 사회발전을 위해 활발한 희생적 활동을 전개해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가문으로 자리매김했다.
미국 수도 워싱턴 DC를 가늠하는 포토맥강이 내려다보이는 케네디센터에는 여전히 많은 미국인들과 관광객들이 찾아 그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한국의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즈, 우당 가문
한국의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치가문을 꼽으라면 단연 국회의원 이종걸 의원의 가문을 들 수 있다. 이종걸 의원의 우당(友堂) 가문은 그 고결함에선 오히려 케네디 가문을 훨씬 앞선다.
국내 대표적 정치가문으론 정대철 의원 가문을 꼽을 수 있다. 서울 종로 중구에서 3대에 걸쳐 국회의원에 성공했다. 4.19혁명이후 민주당 집권기 초대 외무부장관을 지낸 고(故)정일형의원(8선), 민주당 대통령후보 중 하나였던 정대철(5선)의원에 이어 정호선 의원이 2012총선에서 당선됐다. 정대철 가문은 모두 야당에서 민주화운동과 정치활동을 활발히 한 명문이다. 특히 정일형 의원은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시절 야권을 대표하는 정치인 중 하나였다. 이 가문엔 한국 최초의 여성인권운동가이자 여성변호사로 꼽히는 故이태영 변호사(정일형의원의 아내)가 있다. 정대철 가문은 집안대대로 내려온 높은 학식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렇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가치에는 단연 우당 가문을 꼽을 수 밖에 없다.
안양에서 4선에 성공한 이종걸 의원은 흠결 없는 정치인으로 손꼽힌다. 잠재적 대통령후보중 하나로 꼽히는 그는 정치인으로서 언론, 대기업 등 소위 사회주도 권력, 특히 권력형 비리에 대해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정치인으로 그 ‘용기’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강제징집을 당했다.
우당 가문에 또 다른 정치인으론 합리적 보수를 주도했던 이종찬 전 의원이 있다. 경기고, 육사 출신인 그는 여당에서 내리 4선에 성공한 중진이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대통령선거대책위원장, 대통령직 인수위원장 등을 맡았으며 국정원장을 지냈다. 지금은 우당기념관 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가문을 가장 빛낸 이는 여전히 우당 이회영 선생이다.
우리네 역사책에서 우당은 그리 크게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항일독립운동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선 우당을 최고의 무장독립운동가, 근대사상가로 꼽는 이가 적지 않다. 특히 그 헌신성과 비권력적 의지는 역사연구를 넘어 감동을 자아낸다.
더욱이 그는 서울 최고 부호 중의 하나였다. 그는 손쉽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박찼을 뿐만이 아니라 그의 형제들과 가솔들을 모두 이끌고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주했다.
그의 6형제들은 하나같이 우당의 이끌림에 따랐고 모두 독립운동의 대오에서 이탈하지 않았으며 무려 50여명에 이르는 가족들까지 힘겨운 삶을 영위해야 했다.
세계 어디에도 이처럼 고결한 가족사를 이어간 가문은 거의 없다 할 것이다.
우당은 그럼에도 겸손함을 버리지 않았으며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운동사를 다소 오점으로 얼룩지게 한 권력투쟁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가 임시정부운동에 반대한 것도 이처럼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한 항일운동이 그 순수성을 잃을 것이라는 우려에서 비롯됐으며 그의 타고난 겸손과 희생의 정신탓이었다.
그는 민족해방운동에 있어서도 구래 유교관에 입각한 왕정복고적 독립운동을 기도하지 않았으며 서구적 계몽주의에 기반, 민주주의적 가치와 인본주의에 입각한 선구자적 근대사상에 기반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집안의 노비들을 해방(?)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유교주의적 사고가 아니라 당시 계몽주의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인본주의적 민주주의사상에 동조했다.
더욱이 그의 집안이 누려온 조선조 가문사를 보면 그의 행동이 얼마나 선구적이고 희생적이었나를 알 수 있다.
우당은 근대화 혼란기인 1867년, 서울 남산골에서 조선조 명문가 이유승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냈을 뿐 아니라 그의 10대조는 임진왜란이후 병조판서, 좌, 우의정과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이다. 백사이래 모두가 정승․판서․참판을 지낸 손꼽히는 명문가였다.
이런 조선조 최대 명문가문 중 하나인 우당 가문에서 우당을 비롯해 형 건영(健榮) 석영(石榮) 철영(哲榮)과 아우인 시영(始榮) 호영(頀榮) 등 일곱 형제 중에 무려 6명의 형제와 50여명의 가족이 1910년, 모두 만주로 건너가 항일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에 억압받던 1907년 항일비밀조직으로 결성된 신민회의 주역인 우당은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연다. 당시 영의정의 양자로 있으며 서울의 대자산가였던 형 이석영은 온 자산을 정리해 학교설립에 이바지했다. 당시 양부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이 약 6천석이었다고 하니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거의 600억원에 이른다. 이어 이상룡, 김동삼이 가산을 정리, 신흥무관학교의 모습이 체계를 갖추게 된다. 이석영은 후에 돈이 없어 콩비지로 연명하다 생을 마감했다 한다. 정말 눈물겨운 가족사이며 고결한 자기희생이 아닐 수 없다.
신흥무관학교는 진정한 항일무장독립운동의 기지였다. 안창호로 대표되던 실력양성운동과 다른 무장운동론에 핵심 축이었다. 무차별적 테러가 아닌 일제의 상징들을 향한 무장테러와 전쟁을 수행해 나갔다. 김좌진 장군(북로군정서)과 홍범도 장군(대한의용군)의 청산리전투, 봉오동 전투 등 일본군에 대승을 거둔 무장투쟁사에서 혁혁한 전과의 밑거름이 되었다. 항일무장군의 실무장교들은 대부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으며 결국 일제의 끈질긴 추격에 못 이겨 1920년, 폐교되고 만다.
우당의 아내 이은숙은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라는 책을 통해 당시 무장투쟁사는 물론 그들의 이민상황을 상세히 설명해준다. 1910년 한일합방기 만주 독립운동사에 획기적 연구성과를 일궈낸 서중석 박사는 연구서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이라는 책 서문에서 초기 망명 항일독립운동사에서 우당 가문의 헌신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당이 중국인 동지들과 함께 구축한 항일구국연맹은 항일무장투쟁사를 최고의 불꽃으로 평가된다. 상하이 북역 사건, 아모이 일본 영사관 폭파 사건, 톈진항 일본 군수 물자 수송선 폭파 사건, 톈진 일본 영사관 폭파 사건 등 일본 제국주의의 근간을 흔들기 위한 의거가 이어졌다. 이어진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폭탄 투척 의거는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당은 그러나 일제에 붙잡혀 1932년 다롄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만다. 당시 65세였다. 평생 조국을 위한 무장투쟁에 헌신하다 생을 마감했다.
2000년엔 중국 정부마저 우당의 공을 기려 항일혁명열사 증서를 수여하였다
우당의 동생 이시영은 임시정부를 지키다 해방이후 이승만 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냈다. 그러나 그 역시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정권으로 전락하자 이에 항의하고 부통령직을 박찼다.
우당 가문이 해방이후 조국으로 돌아온 식솔이 20여명에 불과하다. 조국을 위한 가족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우당가문은 거의 모든 것을 헌신하고 죽음을 불사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점이다. 그리고 우당가문의 정치적 현재는 이종걸 의원이다.
우당의 역사가 그에겐 오히려 부담일 것이다. 사소한 정치적 협잡이나 대의를 벗어난 어떠한 정치적 행위도 용납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의 생존경쟁과 현실정치를 감안하면 운신의 폭이 크지 않다. 그러나 큰 정치인은 협잡과 정치전술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에겐 큰 길만이 열려있다. 그리고 그것은 명백한 자산이다.
본 기사는 월간지 <이코노미21> 433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