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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다자개발은행 체제에 주도권 경쟁이 시작됐다
글로벌 다자개발은행 체제에 주도권 경쟁이 시작됐다
  • 김형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
  • 승인 2016.03.27 16: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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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다자개발은행은 수혜국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해…수혜국은 인프라투자 등을 요구하지만 공여국은 빈곤퇴치 등 의제 중심으로 투자결정

<AIIB 세계경제의 새질서를 꿈꾸다②-다자개발은행 체제의 주도권 경쟁>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sia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 AIIB)의 창립회원국이 총 57개국으로 최종 확정됐다. 지난 2013년 10월 2,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자카르타를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유도요노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재정 여력이 부족한 아시아 국가들의 사회간접자본 확충이 시급하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새로운 국제금융기구(International Financial Institution, IFI) 설립 구상을 밝혔다. 세계은행(World Bank)과 아시아개발은행(ADB)이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지만, 아시아 국가들이 주도하는 다자개발은행(MDB)의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라는 설명과 함께 이 국제금융기구, 즉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인도네시아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다.

AIIB는 중국 주도의 새로운 국제금융기구라는 점에서 적지 않은 관심을 모아왔다. 하지만, 2014 10월 설립 기념식 당시까지 동참 의사를 명확히 밝힌 나라는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중소규모 국가 21개에 불과했다. 자연히 성공적인 출범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전망이 많았다. 그런데 불과 6개월 만에 그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아시아 37개국 뿐만 아니라 역외에서 참여한 회원국이 20개에 이른다. 애초에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던 한국, 호주, 인도네시아 등이 모두 동참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으며, G7에서도 미국, 일본, 캐나다를 제외한 4개국이 이름을 올렸다. 투명성, 지속 가능성 등에 대한 우려를 앞세워 노골적으로 보이콧을 압박하던 미국의 반대가 무색할 정도다

새로운 다자개발은행 설립과 국제금융시장 질서 재편을 향한 중국의 의지는 아시아 내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지난해 7 15~16일 브라질 포르탈레자(Fortaleza). 6BRICS 정상회의에 참석한 5개국 정상은 2012년부터 논의해 온 BRICS 주도 다자개발은행의 공식 이름을 신개발은행(The New Development Bank, NDB)’이라 확정하고 자본금 규모, 출자 방식, 분담 비율 등의 기본 사항들을 결정했다. NDB의 자본금 규모는 1000억 달러로 정했으며, 5개국이 각각 100억 달러씩을 출자해 500억 달러의 초기 자본금을 조성하고 추후 다른 나라들의 참여 의사를 봐가면서 설립 후 5년 내에 1000억 달러까지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중국은 다른 회원국들보다 더 많은 출자를 희망했으나 5개국이 지분과 권한을 대등하게 분담해야 한다는 인도의 제안에 따라 각국이 똑같이 100억 달러씩 분담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NDB 본부가 상하이로 결정됐고, NDB와 별도로 외환위기 등의 긴급 사태에 대비해 조성키로 결정한 1천억 달러 규모의 위기대응기금(Contingent Reserve Arrangement, CRA)’ 410억 달러를 중국이 출연한다는 점에서 NDB 내 주도권 확보에는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독특하게 구성된 자본금 분담 및 지배구조 배분

흥미로운 부분은 AIIB NDB의 자본금 분담 및 지배구조 배분이다.

AIIB의 경우, 중국이 출자금의 50%를 부담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으나, 다른 회원국들이 중국의 독주 가능성에 우려를 표하면서 각국의 국내총생산(GDP) 비중에 맞춰 출자 규모를 정하기로 했다. AIIB의 총 자본금 한도가 500~1000억 달러라는 점을 감안하면 중국이 부담할 금액은 약 30% 수준인 150~300억 달러로 추산된다. 문제는 지배구조다. 미국과 일본이 불참해 중국의 GDP 비중이 다른 회원국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아진 상황에서 출자 지분에 따라 투표권을 부여하면 중국의 독주를 막을 방법이 별로 없다. 이처럼 지분이 많은 나라들이 일방적인 의사 결정을 하지 못하도록 ADB와 같은 다른 국제금융기구(IFI)들은 상근이사진으로 구성된 상임이사회를 둔다. 주요국으로부터 상근이사들을 추천 받아 임명한 후, 투자처 등 주요 사항에 관한 논의와 결정을 이 상임이사회에 위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AIIB에 상임이사회를 두지 말자고 주장한다. 총회, 집행부, 비상임이사회 형태로 지배구조를 구성하고, 투자와 관련해 일상적인 의사결정은 집행부에 맡기자는 뜻인데, 집행부 지명권은 중국이 가장 많이 행사할 수밖에 없어 AIIB의 투자 결정이 중국의 뜻에 따라 이뤄질 경우 이를 견제하기가 어렵다. 다행히 중국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집행부도 더 민주적으로 구성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불안감은 여전한 상태다.

NDBAIIB에 비해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이다.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 등 5개 회원국이 똑같이 100억 달러씩을 초기 자본금으로 출자하는 만큼 지분 비율이 같다. , 어느 한 나라가 독점적인 권한을 행사하기가 불가능하다. 총재(인도), 이사회 의장(브라질), 본부(중국) 등도 골고루 나눠 맡기로 해 권력이나 정보가 어느 한 쪽으로 쏠리는 것을 막고 있다. BRICS 정상회의 초기부터 중국의 독주를 우려하는 다른 회원국들의 목소리가 컸기 때문이다. 지배구조 역시 독특하다. 향후 다른 국가들의 참여로 자본금이 늘어나더라도 5개국의 지분 비율이 총 자본금의 55% 이상을 유지하도록 자동 증액된다는 단서 조항을 덧붙여두었다. 역외의 다른 국가가 아무리 많은 금액을 출자하더라도 45%의 지분밖에 가질 수 없도록 함으로써 NDBBRICS 주도의 개발은행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BRICS 각 회원국들 간 무역 및 금융 의존도를 고려할 때 NDB 내 의사결정의 무게 중심이 중국으로 상당 부분 쏠릴 것은 자명해 보인다.

한계에 직면한 중국개발은행(CDB) 중심의 세계시장 진출

중국 정부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배경에는 정치적, 경제적 요인이 함께 존재한다. 자주 언급된 것처럼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확대 전략(‘Pivot to Asia’ Strategy)를 견제하려는 정치외교적 수단일 뿐 아니라, 그 동안 중국 경제의 고성장을 견인해 온 수출 주도, 투자 주도, 정부 주도 성장 방식이 한계를 드러냄에 따라 새로운 시장과 내부 개혁의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 동안 중국 정부가 발표해 온 ‘Marching Westwards’, ‘New Silk Road Strategy’, ‘일대일로(一帶一路)’ 등 일련의 새로운 경제발전 정책들 역시 이런 고민들을 잘 보여준다. , 선진국 경기 침체에 따른 수출 수요 감소, 국내 투자 설비의 공급 과잉 심화 등으로 아시아 역내 신흥국의 새로운 수요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공공부문의 비효율성과 부패 문제가 임계치에 달하면서 국내 경제발전 방식에 글로벌 스탠더드를 받아들이는 한 가지 방편으로 중국 주도 국제금융기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다시 말해 중국이 이처럼 새로운 다자개발은행 설립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중국경제에 대한 위기감이 그만큼 커졌다는 반증이라 볼 수 있다. 아울러, 그 동안 중국 경제 성장의 한 축을 중국개발은행(Chinese Development Bank)이 담당해 왔다면, 앞으로는 그 역할의 상당 부분을 AIIB가 맡게 된 셈이다.

▲ 중국은 AIIB 창립을 통해 다자개발은행 체제의 주도권 경쟁을 시작했다. 맑은 하늘아래 중국 베이징의 톈안문 광장의 모습. 사진=신화/뉴시스

지난 한 세대 동안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줄곧 두 자리 수를 기록할 만큼 성공적으로 고성장을 이끌어 온 중국 정부의 힘은 국내외 환경 변화에 걸맞은 적절한 정책 대응이었다. 개방 초기에는 국내의 값싼 노동력이 해외의 앞선 기술 및 자본과 잘 결합될 수 있도록 국내 제도 개선과 규제 철폐에 주력했으며, 이는 곧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경이로운 수출 경쟁력 향상과 수출 주도 성장을 가능케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내 자본과 기술이 어느 정도 축적되자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제 10 5개년 규획(2001~2005)을 통해 자국 기업의 해외 진출 지원과 확대를 공식적인 정책 의제로 채택하였다. 이를 위해 중앙 및 지방 정부의 온갖 정책 수단과 여러 국유은행 등을 앞세워 정책 금융과 우대 차관을 제공하면서 중국 기업들의 해외 진출을 적극 지원하였다. 특히 2006년 이후에는 중국의 외환보유액이 당시 적정 수준으로 인식되던 5천 억 달러의 두 배인 1조 달러를 넘어서면서 과잉 유동성에 따른 위안화 절상과 물가상승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해외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 기업들의 해외 진출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수행했던 기관이 바로 중국개발은행(China Development Bank, CDB)이다. ‘개발은행의 기본적인 사업 모델은 국제기구나 정부 등의 높은 신용도를 이용해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한 후 이 자금을 수요 기업이나 기관에 공급하는 것이다. 중국개발은행(CDB) 역시 초기에는 해외에서 차입한 자금을 국내 유망 투자 프로젝트에 배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슈퍼파워 중국개발은행의 저자 헨리 샌더슨은 중국개발은행(CDB)이 이 과정에서 뛰어난 선택과 집중 역량을 보임으로써 중국 산업의 근대화를 크게 앞당겼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중국 내 외환보유고가 급증하기 시작한 2006년부터는 넘쳐나는 중국의 외화를 활용해 기업들의 해외 진출, 특히 자원개발을 지원하는 쪽으로 사업의 중심을 옮겨가기 시작했고, 2010년 이후에는 자원개발 외에 중국 내에서 충분히 경험을 쌓은 철도, 수력발전용 댐, 고속철도 등의 인프라 분야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투자 주도의 고도 성장은 필연적으로 투자 효율성 악화와 성장률 둔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값싼 자금을 이용한 투자는 과잉 투자를 불러오게 마련이고, 시장 논리보다 정치 논리가 앞서는 경우도 잦았다. 이런 과정들이 반복되면서 중국경제의 투자율은 계속 30%, 40%, 50%대로 높아지는데도 불구하고 성장률은 오히려 14%, 10%, 7%대로 계속 둔화되고 있다.

해외 사업에서도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중국정부와 중국개발은행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실적이 빠르게 늘어났지만 돈의 힘, 즉 차관을 앞세워 해외자원이나 중국 기업의 영업권을 보장받는 방식의 해외 사업은 쉽게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관대한 조건과 저렴한 금리로 제공하는 중국개발은행의 자금 지원을 환영했지만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자원개발 프로젝트와 함께 몰려든 중국 기업들과 노동자들은 상대국 정부와 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했으며, 이어지는 시장 장악, 환경 파괴, 계약 위반 등은 중국에 대한 불신과 반대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사업 규모가 커질수록 투자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은 일면 당연한 결과지만, 중국개발은행(CDB)의 부진에는 또 다른 원인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정체성의 문제이다. 공식적으로는 은행이지만, 영업 행태나 운영 방식은 정부기관에 훨씬 더 가까웠다. 은행들이 의무적으로 발간해야 하는 연차보고서에 지방정부나 국유기업, 해외 차관 등의 구체적인 내용이 빠져 있는 경우가 다반사고, 대외관계를 총괄하는 부서가 없어서 해외 파트너 국가와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이 쉽지 않다. 중앙 정부의 결정에 따라 주요 사업 방향이 결정되는 하향식 업무 관행도 문제로 지적된다.

중국개발은행(CDB)이 중국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담당해 온 역할이 컸던 만큼 이런 문제점들에 대한 개선 요구도 거센 편이다. 중국 정부가 다자개발은행 설립을 서두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때문이다. 폐쇄적이고 관료적인 중국개발은행(CDB)만으로는 현재 중국 경제가 직면한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중국 기업들이 시장과 경쟁의 힘을 받아들이고 국제적 표준과 관행에 익숙해지지 않을 수 없도록 새로운 플랫폼 발굴에 나선 것이다. , 12 5개년(2011~2015) 규획에서 강조했듯이 양적 성장을 중시하던 과거와 달리 개혁 개방 심화를 통한 질적인 경제성장을 이뤄내기 위한 디딤돌로 다자개발은행 설립에 나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삐걱거리는 다자개발은행(MDB) 체제와 미국의 국제금융질서 리더십

선진국 주도의 기존 국제금융질서에 대한 신흥경제권 국가들의 불만과 불신이 커진 탓도 크다. 세계은행(World Bank), 아시아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 ADB) 등 창설 이후 오랫동안 신흥국의 경제 성장과 발전에 큰 도움을 주던 공적 개발은행들이 언젠가부터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 산업은행, 중국개발은행(CDB)처럼 각국 정부가 출자해 설립하는 경우나 여러 나라가 함께 지분을 출자해 설립한 다자개발은행이나 기본 운영 방식은 동일하다. 다만, 개별 국의 개발은행은 자국의 산업 발전과 경제성장을 위해 사업을 추진하는 반면, 다자개발은행은 앞서서 경제발전을 경험한 선진국들이 전세계, 혹은 인근 지역 후발국들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한 만큼, 특정 국가의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업보다는 보편적인 수준의 인프라 건설이나 인간개발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첫째, 금융을 제공하는 다자개발은행과 지원을 받는 국가 간의 눈 높이 차이를 해결하지 못했다. 지원을 받는 국가 입장에서는 자국 경제가 지속 가능한 발전의 토대를 확보할 수 있도록 산업 경쟁력 확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의사 결정이 이뤄지길 희망한다. 인프라, 생산 설비 등의 투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자개발은행을 포함한 국제금융기구나 원조기관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이 기구들은 경제발전을 먼저 경험한 나라들이 후발 국가들의 빈곤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별 국가의 수요보다는 UN, G8 등의 다자간 협의를 통해 새천년개발목표(MDGs)와 같은 원조 의제(agenda)를 먼저 설정하고, 이 의제를 잘 충족시킬 수 있는 사업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의사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수원 국가의 요청은 뒤로 밀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특히 최근에는 학교, 병원, 교육, 보건 등 기본적인 인간개발 수요 충족을 위한 프로젝트들이 우선 선정되는 경우가 많다. 한 예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총 원조에서 전기, 통신, 운송, 수도 등의 인프라 투자 비중이 40% 이상을 차지했으나, 그 후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해 80년대 중반에는 20% 미만으로 떨어졌으며, 현재는 10%에도 못 미친다. 미국의 주도 하에 중남미 빈국을 주로 지원하는 미주개발은행(IDB)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나타나 과거에는 경쟁력 제고, 사회 개발, 국가 개혁 및 현대화 순으로 프로젝트 자원(resources)이 배분되었지만 최근에는 사회개발에 대한 지원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반면 중남미 지역 개도국들의 연합체라 할 수 있는 중남미개발은행(CAF)의 경우 금융시스템, 인프라, 사회개발 순으로 자금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둘째, 선진국들이 다자개발은행의 운영과 의사 결정을 독점적으로 주도한다는 점 역시 큰 문제로 지적된다.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신흥국 경제의 빠른 성장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 경제의 침체로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달라졌음에도 세계은행이나 IMF 등 국제금융기구의 지분 배분과 인적 구성은 그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전세계 GDP에서 BRICS 5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를 훨씬 넘어섰지만 세계은행에서의 지분, 즉 의결권은 아직도 13% 수준에 불과하다. 세계은행 총재는 미국이, IMF 총재는 유럽이 독점해 온지도 벌써 반세기가 넘었다. 올해로 49주년을 맞이한 아시아개발은행(ADB) 총재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일본이 독점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는 신흥 경제권의 요구가 다자개발은행의 정책 방향 결정에 제대로 반영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심지어, 국적상의 이점을 이용해 대규모 프로젝트를 비교적 손쉽게 수주하는 선진국 업체들이 프로젝트 계획 수립이나 컨설팅 등의 명목으로 알맹이를 챙긴 채 실제 사업 추진은 후발국 업체들에게 떠넘기는 사례도 빈번했다. 프랑스 기업들은 아프리카 프로젝트를, 미국이나 스페인 기업은 중남미 프로젝트를 독점적으로 수주하는 식이다.

셋째, 선진국의 성공 경험, 즉 서구 몇몇 국가들의 합의에 의해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잡은 각종 제도와 정책, 경제발전 경험 등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점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를 포함한 일부 개도국 사례가 보여주듯이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변화 속도가 워낙 빠른데다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 확대 등으로 각국의 이해관계가 점점 더 복잡하게 얽히면서 과거의 유용한 제도가 이제는 오히려 큰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다자개발은행 안팎에서 선진국의 리더십이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 AIIB의 창립 회원국 (2015.04.15 UTC+8 12:00:00)(파란색) 2014년 AIIB 창립국 (메모) (연한 파란색) AIIB 창립국으로 인정받은 국가

이와 같은 여러 문제점들이 사업 방식과 인적 구성에 대한 불만, 신흥국의 경제적 위상이 아무리 높아져도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현실적 판단 등과 맞물리면서 비슷한 입장에 처한 국가들끼리 아예 새로운 틀을 짜보자는 남남 협력의 움직임을 끌어낸 것이다. ADB 예측에 따르면 2010~2020년 아시아 인프라 개발 수요는 8 2천억 달러 규모이며, 매년 8천억 달러의 투자가 필요한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아시아의 인프라 확충을 위해서는 각종 규제, 제도 정비 등의 정부 역량 강화와 금융 조달 환경 개선이 가장 시급하다고 꼽히는데, 이 두 가지는 AIIB 등을 매개로 한 다자협력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가장 손쉽고 효과적이다.

국제금융질서 게임의 룰변화와 한국의 위상

물론 이런 일련의 움직임들이 새로운 다자개발은행 출범이나 국제금융질서 재편과 같은 실제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앞에 놓인 장애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국 등 신흥경제권 국가들이 국제금융 시장에서 새로운 질서와 합의를 만들어 갈 만큼의 신뢰를 확보했다고 보기가 어렵다. 중국, 브라질, 인도 등은 과거에도 역내 리더십을 확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고, ASEAN+3, SAARC, Mercosur 등 다양한 지역협력체와 국제기구들이 탄생했다. 하지만 이 중에 성공적이었다고 인정할만한 기구나 지역협력체가 있을까? 압도적인 인구와 경제 규모에 힘입어 지역 맹주로서의 위치는 오래 동안 누려왔지만 느슨한 제도와 부족한 신뢰 탓에 EU처럼 중심국이 주변국들을 설득하고 포용해 함께 성장을 도모하는 통합의 단계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AIIB가 계획대로 올해 안에 공식 출범하더라도 자본금 출자나 집행 등의 절차까지 순조롭게 이뤄질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만만치 않다. 500~1천억 달러에 달하는 AIIB NDB의 자본금 출자가 완료되기 위해서는 중국과 BRICS뿐 아니라 선진국을 포함한 주변국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인데 세계경제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낙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플레이어 역할을 담당할 민간 금융기관 및 기업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 것도 까다로운 과제이다. 장기간에 걸쳐 다수의 기업들이 참여하는 인프라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다자개발은행(MDB)과 각국 정부, 프로젝트 수행 기업들 사이에 충분한 신뢰가 쌓여야 하지만 아직 그럴만한 시간을 갖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AIIB57개나 되는 나라를 창립회원국으로 확보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세계 각국의 입장이 왜 달라졌는지를 다시 한 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중국이 AIIB 설립을 추진하는 목적은 비교적 분명하다.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려는 정치외교적 수단일 뿐 아니라, 점차 한계를 드러내는 중국식 경제발전 모형의 약점 보완, 새로운 성장 엔진 추가, 신규 시장 확대 등을 도모할 수 있는 다목적 카드인 셈이다.

이에 비해, 주변국들이 보여준 급작스런 입장 변화는 외교, 즉 국제 무대에서 벌어지는 게임의 룰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게임이론에서 자주 소개되는 사례 중에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라는 게임이 있다. 게임 참여자들이 서로 협력할 때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음에도, 상대방의 동참 여부를 확신하지 못해 모든 참가자가 늘 배신을 선택한다는 것이 이 게임의 간단한 결론이다. 하지만 게임의 규칙이 달라진다면, 다시 말해 이 게임 참가자들이 모든 참가자들의 과거 선택과 그 결과를 알고 있고, 심지어 서로 협력에 대한 논의가 가능해 아예 새로 게임의 판을 벌일 수 있다면 어떨까?

AIIB 설립 기념식이 열렸던 201410월 당시만 해도 AIIB 참여가 실익이 별로 없다고 판단한 국가들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선진국 주도로 만들어진 경기의 규칙이나 판을 바꿔보자는 후발 경제권 국가들의 열망, 그리고 새로운 기회에 대한 시장의 절박한 요구, 중국이 AIIB에 대해서는 훨씬 신중하게 대응할 것이라는 선진국들의 판단 등이 낙관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창립회원국 57개국 확보라는, 6개월 전과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AIIB NDB의 설립과 발전은 1차적으로 신흥경제권 내 인프라 시장 확대에 기여할 뿐 아니라, 인프라 개선에 따른 역내 생산성 향상을 통해 관련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어 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기회이다. 특히 최근 중국 기업들의 신흥시장 진출이 늘어나면서 중국 기업들을 매개로 한 글로벌 비즈니스 협력과 가치사슬이 확대되고 있다. 아시아 지역은 물론이고, 중남미와 아프리카에서도 변화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 브라질 월드컵은 중국의 글로벌 경쟁력을 보여준 좋은 무대였다. 경기장 및 호텔 건설, 경기 중계용 IT 설비, 친환경 교통 인프라 등 여러 면에서 브라질 업체와 중국 업체들의 시너지가 활발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하이브리드 궤도버스의 시스템 설계와 운영은 브라질 회사가 맡고, 차량과 전력선 공급, 시공 등은 중국 업체가 맡는 식의 분업이 이뤄졌다. 중국산 크레인과 중국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월드컵 스타디움 건설에 큰 차질이 빚어졌을 것이라는 보고서도 나왔다.

문제는, 이처럼 AIIB가 예상을 크게 웃도는 관심을 이끌어내면서 우리나라의 입지가 위태로워졌다는 점이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역외국은 물론이고 일본, 인도, 호주 등 아시아 주요 경쟁국들이 모두 가입에 난색을 표하는 상황이어서 우리가 가입만 결심하면 AIIB 내 두 번째 지위는 무난히 확보할 것이라는 기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인도를 비롯해 호주, 독일, 영국 등 역외 주요국들마저 속속 창립 멤버로 참여함에 따라 두 번째 자리는커녕 5% 대 지분 확보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우리에게 열심히 구애의 손길을 내밀던 중국의 관심도 점점 일본 쪽으로 옮겨가는 모양새다. 중국이 일본에 수석부총재 자리를 제안했다거나, 독일 총리가 전화 회담을 통해 일본의 참여를 권유했다는 등의 보도마저 나왔다.

한국의 전략적 선택

그렇다면 향후 우리의 고민과 대응 전략은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먼저, 중국의 새로운 성장 엔진 확충과 내부 개혁 과정에서 어떤 부분을 우리와 협력할 수 있을지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거 한국경제의 발전 과정에서 겪었던 성공과 실패 경험 중 상당수가 중국에서는 아직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게임 규칙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후발 경제권 국가들 간의 연대와 협력, 이에 대한 선진국들의 긴장, 더 나은 결과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게임의 판을 바꿀 수 있다는 과감함 등 기존의 게임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규칙들이 자꾸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 변화의 시발점 역할을 한 후발 경제권 국가들과의 바람직한 관계 설정이 필요하다. , 우리에게 익숙한 기존의 외교 원칙은 미국이나 중국 등에게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지만, AIIB 내에서는 달라질 필요가 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면 감옥에 갇힌 주인공이 소장과 간수들의 세무나 회계 등의 각종 업무를 대신 도와주고 여러 가지 특혜를 누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다른 영화에서 묘사되는 일반적인 대리인들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즉 권력층과 가까워지면서 기존 동료들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주인공은 다른 죄수들과도 계속 좋은 협력 관계를 유지한다. 그 비결은, 그가 얻은 특혜를 독점하려 고집하지 않고 다른 동료들과 기꺼이 공유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동료 죄수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교도소장에게 과감히 맞서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원했던 목표, 즉 탈옥에 성공한다. 거의 60개에 육박하는 AIIB 회원국들 사이에서, 특히 중국과 다른 주변국들과의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행동의 원칙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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