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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의 우여곡절 속에서도 유지돼온 남북경협
남북관계의 우여곡절 속에서도 유지돼온 남북경협
  • 평화재단 이사 고경빈
  • 승인 2018.02.20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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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경협의 필요성과 추진방향에 대해 진지한 검토 필요해

커버스토리 2 그럼에도 남북경협이 필요한 이유 - 남북경협의 과정과 해결과제

5.24 조치로 남북교역과 대북 신규투자가 중단된 지 5년이 지났다. 천안함 사건에 대해 북한의 책임있는 조치가 있고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결국 남북교역과 경협이 재개되겠지만 그동안 우리 대북 경협기업들이 겪은 어려움과 고통은 매우 심각하다.

정부가 이들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긴급 운영자금을 대출해주기도 했으나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었다. 사업 중단 기간이 오래되다 보니, 개성공단을 제외한 대북경협 기업의 상당수가 부도나 휴폐업 상태다. 남북경협이 재개되어도 다시 참여하지 않겠다거나 참여할 형편이 안 되는 업체마저 있다. 대북사업 재개 형편이 된다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북한 또는 제3국 대북투자기업과 이해나 지분조정에 따른 갈등도 예상된다. 우리 남한 기업들이 떠나 있던 빈 자리에 북한이 중국 기업을 끼워 들여서 사업공백을 매워나간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는 지난 5년 사이에 남북경협을 위한 내부적 동력과 기반도 많이 축소되었다. 남북의 경협 파트너들 사이에 연락이 끊기고, 일을 잃은 사람들은 직장을 떠나기도 했다. 우리 내부의 남북경협 지원기관 사이의 네트워크도 위축되었다. 오랜 기간 시행착오를 통해 쌓은 경험적 자산이나 기업가적 의욕도 많이 약화 되었다.

남북관계가 정상화되어도 남북경협이 당장 5.24 이전 지점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상황이다. 따라서 비록 경제외적 이유로 5.24 조치가 단행되었지만 남북경협 정상화를 위해서는 경제외적 장애를 해소하기만 하면 될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동안 체력이 떨어진 우리 남북경협기업 들에 대해서 재창업 자금 성격의 긴급수혈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며, 향후 남북경협 자체의 지향점과 기반을 어떻게 재구축 하느냐 하는 큰 과제도 함께 풀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남북경협 정상화의 방향과 전략을 어떻게 다시 설정할지, 약화된 남북협력 추동력은 어떻게 확충할지, 향후 남북경협의 정치적 리스크를 어떻게 안정적으로 분산시킬 것인가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를 검토하기 앞서 과거 남북경협 과정에서 발생한 경제외적 악재가 어떤 것들이 있었고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살펴보자. 

과거 經濟外的 惡材의 극복 경험과 시사점 

① 문익환 목사 밀입북 사건(89.3) : 민간 남북교류협력 법절차 마련의 계기 

남북경협의 역사는 1988년 7월 우리가 선제적으로 북한에 대해 문호를 개방한 “7.7선언”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출발한다. 1989년 1월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기업 총수로는 분단이후 처음 방북하였고, 그해 1.26 효성물산이 북한산 물자로 전기동 200톤(66만 달러)을 처음으로 반입하였다. 북한산 물자가 국내에 반입된 것은 이보다 앞선 1984.9. 북한의 대남 수내물자(쌀 5만석, 시멘트 10만톤, 옷감 50만㎡, 의약품 등) 약 570만 달러 상당을 인수한 것이 처음이지만, 통관 등 교역 절차를 밟아 반입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순조롭게 출발했던 민간의 남북교류가 1989년 3월에 돌발적으로 발생한 문익환 목사의 밀입북으로 대북 문호개방 반 년 만에 전면 중단되게 된다.

문목사의 밀입북 사건은 남북관계를 일시에 악화시키고 당시 정부의 과감한 대북정책에 위기를 불러왔다. 정치적 논란은 별개로 ‘鄭회장 방북은 합법이고 文목사는 불법이다’라는 정부의 논리를 뒷받침할 근거가 애매했다. 정부는 이를 통치행위 이론으로 설명했지만, 미흡했고 일부에서는 정부의 자의성을 문제 삼아 법치주의에 반한다는 비판이 제기 되었다.

정부는 이를 계기로 남북교류 질서유지를 위해 1989.6.12 대통령특별명령 형식으로 “남북교류협력기본지침”을 제정하여 남북교류 승인절차를 정하고 통일부장관이 경제분야를 포함한 모든 남북교류협력에 대해 권한과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이로서 7.7 선언 직후에 정부의 남북경협 관련 정책을 심의하던 북방정책협의조정위원회(위원장: 국가안전기획부장)와 북방경제정책실무조정위원회(위원장: 경제기획원차관)가 남북교류협력추진위원회(위원장: 통일부장관)로 일원화 되었다.

기본지침이 시행되면서 남북교류가 80일 만에 재개되었고, 이 지침을 골간으로 남북교류협력법(90.7)이 제정됨으로써 통치행위에 해당되지 않더라도 일반인의 방북이나 남북교류가 법적으로 가능해 진 것이다. 밀입국 사건이 통치행위에 해당하지 않는 일반인의 남북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남북교류 법제도 발전의 계기가 된 셈이다. 

② 간첩단 사건(92.10)으로부터 제네바 합의(94,10)까지 : 경협원칙의 정립 계기 

문목사 사건이라는 돌발적인 경제외적 리스크가 해소된 이후 1990년대 초반 남북관계는 순조로웠다. 남북 고위급회담이 개최되어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이 채택되었다.

1991년에는 교역개시 3년 만에 남북교역 1억 달러가 달성되고 직교역과 위탁가공교역도 시작된다. 1992년 1월 김우중 회장은 김일성 주석 및 김달현 부총리를 만나고 북한 삼천리총회사(총사장: 정운업)와 30만평 규모로 남포에 남북합작 경공업 단지를 조성하기로 합의하였으며 김달현 부총리는 남한방문 희망 의사를 전해왔다. 이에 최각규 부총리의 초청으로 김달현 부총리가 1992년 7월 서울을 방문하여 경제계 인사를 만나고 주요 산업시설을 시찰하였으며 최각규 부총리의 평양 답방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2년 봄부터 꼬여가지 시작한 북핵문제가 잘 나가던 남북경협에 어려움을 주기시작했다. 정부는 북한에 다각도로 핵 사찰수용을 압박하기 위해 남북경협 카드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당초 정부는 북핵 문제와 남북경협의 연계 방침을 시사 했으나 시종 일관된 입장을 견지한 것은 아니었다. 핵 협상이 부침을 거듭한 탓도 있었지만 구체적인 연계 수준에 대한 정부 부처간 합의가 불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남포공단 설립을 위한 남북협력사업 승인은 유보(2.28)하면서 남포조사단 방북이 추진(10.6-9)되기도 했고 최 부총리 방북은 북핵 문제와 연계하기도 하고 이산가족 문제와 연결시키기도 하였다.

남북경협 중단의 직접적 계기는 1992년 10월의 북한 간첩단 사건이었다. 정부는 북한에 사과를 요구하며 기업인 방북과 시설재의 반출을 금지시켰다. 대우의 남포공단 협력사업을 공식 불허하고 최 부총리의 방북계획도 공식 철회하였다.

이후 남북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었고 김영삼 정부가 출범(1993.2.25)하자마자 북한의 NPT탈퇴(3.12)로 1차 핵위기가 시작된다. 북한은 우리를 배제하고 대미 협상을 통해 핵문제를 해결한다는 소위 통미봉남(通美封南)의 태도를 굳히게 되고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시 조문파동을 겪으며 남북관계는 얼어붙게 된다.

1994년 10월 우여곡절 끝에 미북기본합의(Agreed Framework)로 위기가 전격 해소되지만, 우리 정부는 한반도정세변화 국면에서 주도권을 상실한 탓에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주도권 회복을 위해 대북 경수로 건설비용의 70%를 부담하겠다고 나서고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북한의 태도변화가 없는 상황이지만 일방적인 대북경협 활성화 조치(94.11.8)를 단행한다.

비록 남북경협 중단 조치(92.10)시 조건으로 내건 간첩단 사건에 대한 북한의 사과는 받지 못했지만 남북관계 주도권 회복이 시급하게 요구되는 상황에서 북미제네바 합의를 계기로 남북경협을 재개한 것이다.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로 기업총수를 제외한 기업인 및 기술자의 방북과 위탁가공 시설재 반출과 시범적 수준의 남북경협 사업 추진이 허용되었다. 1994년 11월에는 남북경협활성화 조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남북경협사업처리지침, 북한지역사무소설치지침, 대북투자외국환관리지침 등 3개 업무지침을 마련하였고, 때 마침 국회에서 논의 중이던 WTO 이행 법안에도 남북경협을 민족내부거래로 본다는 조항을 추가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럭키금성, 삼성, 현대, 쌍용, 영신무역, 대동화학 등 6개 기업의 방북이 이루어졌고, 남북교역도 1992년 1억불을 돌파한 이래 3년만인 1995년 3억불을 육박하는 급성장을 하게 된다. 1995년에는 드디어 대우 남포공장이 최초의 남북경협사업으로 승인되었다.

남북경협활성화 조치 이후에는 1996년 4월 북한군의 JSA중화기반입 사건이나 그해 9월의 강릉 북한잠수함 침투사건에도 불구하고, 민간 남북경협은 중단없이 진행되어 사실상 남북경협에 정경분리 원칙의 정립하는 계기가 된다. 북한 잠수한 침투사건과 관련, 당시 정부는 민간 남북경협은 손대지 않고 신포 경수로 공사를 유보하는 조치를 취했다. 즉 정부재정이 투입되는 정부 사업만을 중단한 것이다. 북한이 잠수함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자 정부는 경수로 공사를 100일 만에 재개했다.

이렇게 정립된 민간경협의 정경분리 관행은 다음의 김대중 정부에서 보다 구체화 된다. 정부의 대규모 투자는 북핵문제 등 남북 현안에 연계하지만, 인도적 대북지원에는 조건을 부과하지 않고, 민간의 남북경협은 기업인의 자율적 판단에 맡긴다는 3대 남북경협 원칙의 하나로 확립된 것이다. 

③ 연평해전과 관광객 억류사건(99.6) : 민간경협의 정경분리 원칙과 정부책임의 관계 

김대중 정부는 출범직후, 1998년 4월 2차 남북경협활성화 조치를 발표하면서 정경분리를 남북경협의 기본방향으로 천명하였다.

대기업 총수의 방북도 허용하고 대북투자규모와 설비반출 제한을 원칙적으로 폐기하는 등 남북경협의 제약이 대폭 풀렸다. 이번 조치의 기본방향은 경협주체인 기업의 자율적 판단을 존중하고 민간 주도로 남북경협을 추진하며 정부는 남북경협 질서유지를 위해 과당경쟁과 불공정 거래행위를 방지하는 둥 여건 조성에 주력한다는 정경분리 원칙이 적용된 것이다.

이에 따라 1998년 한 해 사이에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0년 만에 다시 방북하고, 인천-남포 정기항로가 개설되었으며, 금강산 해로 관광이 개시되면서 남북경협의 스케일이 한 단계 뛰어 올랐다.

당연히 정경분리 원칙은 남북교류협력 확대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민간경협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사업주체의 판단에 방임한 것은 아니다. 국민의 안전과 권리의 보호는 정부책임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범위에서 민간경협에 간여할 필요가 있었다.

정경분리 원칙과 정부의 간여 내지 책임 범위와의 관계는 1999년 6월 연평해전과 금강산 관광객 억류사건 대응과정에서 분명해졌다. 연평해전 발생에도 불구하고 민간 남북경협의 정경분리 입장에 따라 금강산 관광을 포함한 민간경협은 계속 허용하였던 정부는 닷새 후금강산 관광객 억류사건이 발생하자 즉각 관광을 중단시키고 현대와 북한 사업자 사이에 유사사례 재발방지책이 마련될 때까지 관광재개를 허용하지 않았다.

▲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은 남북경협 활성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사진은 1998년 10월 27일 북으로 가고 있는 소 1000마리와 트럭 50대 모습. 출처=위키백과

북한이 억류된 관광객을 3일 만에 석방했지만 우리 정부는 유사사건의 재발방지 제도화를 요구하였고 현대와 북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는 북경에서 한 달 동안 협상 끝에 금강산관광객 신변안전보장과 관련한 세부적인 합의서를 체결하였다. 이에 정부는 관광중단 40일 만에 관광 재개를 허용하였다. 즉, 민간 남북경협은 원칙적으로 정경분리에 따르되 국민의 안전과 권리 보호가 필요한 경우 해당사업 범위에서만 간여하고 통제한 것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민간경협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금강산광관, 개성공단사업 등이 실현되면서 매일 상시적으로 많은 국민이 북한에 체류하고, 기업들도 단순교역을 넘어 직접투자를 시작했다. 남북관계가 관념이나 행사차원에서 벗어나 국민생활이나 생업에 직접 영향을 주는 소위 실물분야 남북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이에 따라 남북경협에 참여하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위한 세심한 제도화 노력이 뒤따랐다. 2000년 12월에 남북 당국은 투자보장, 이중과세방지, 상사분쟁해결, 청산결제 등 소위 4대 남북경협합의서를 채택하고, 잇달아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한 국회비준 동의를 받아 2003년 8월 4대 경협합의서를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게 해서 발효시킨다. 

북한도 2002년에는 개성공업지구법과 금강산관광지구법을, 2005년에는 북남경제협력법을 제정하여 남북 경협을 법제화하고, 우리도 2006년에는 남북관계발전법을, 2007년에는 개성공단지원법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민간경협의 법적 보호라는 측면에서 정경분리 원칙과 연결된다.

이와 같이 1999년에 발생한 연평해전과 금강산 관광객 억류사건은 남북교류에 참여하는 국민의 안전과 권리보호에 대한 정부책임과 민간경협의 정경분리 원칙이 서로 모순이 되지 않도록 적절한 해법을 찾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남북관계의 돌발적인 경제외적 리스크가 발생하더라도 대체적으로 민간경협은 법적인 보호 장치를 강화해 나가면서 비교적 지장 없이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10년간 남북경협의 정경분리는 원칙 측면에 있어서나 실천 측면에서도 정착되어 간다. 2002년 북핵문제가 새로운 의혹을 받아 경수로사업의 중단과 제네바합의의 파기로 이어졌지만 남북경협은 대체로 지장 없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④ 북한의 핵실험(2006.10)과 6자회담 ‘2.13 합의’(2007.2) : 정경분리 원칙의 1차 시련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기본적으로 북한 핵문제와 남북문제를 병행해서 풀어간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이런 배경에서 남북경협의 정경분리 원칙은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관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 핵문제가 의혹 수준에 머물렀을 때와 2006년 10월 북한이 실제로 핵실험을 강행하고 핵무장을 선언한 이후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대북포용정책에 대한 비판과 함께 대북지원과 남북경협 중단을 요구하는 여론이 크게 대두되면서 정경분리 원칙을 견지하려는 정부의 정책방향이 흔들리게 된다. 이미 상당한 투자가 이루어진 개성공단과 금강산 사업의 중단을 요구하는 극단적 주장도 부담이 되었다. 2005년 북핵 위기를 타결한 6자회담의 ‘9.19 합의’도 그 이행이 중단되었다.

북한의 나쁜 행동에 대해서는 아픈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정부는 대북 쌀 차관 협상과 개성공단 추가분양을 중단하고, 민간 경협에 있어서도 신규 대북투자사업 승인을 유보하였다. 쌀 차관은 정부재정이 사용되므로 정경분리 원칙이 적용되지 않지만, 개성공단 추가 분양이나 민간 신규투자를 중단한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정경분리 원칙에서 벗어난 예외적 조치였다.

이와 동시에 정부는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고 ‘9.19 합의’가 조속 이행되도록 외교 노력을 경주했다. 대북 제재와 협상의 두 가지 트랙을 동시에 가동했지만 협상에 무게를 둔 셈이다. 이러한 노력이 성과를 거두어 2007년 2월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고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 조치’에 합의(즉, ‘2.13합의’)하여 개성공단 추가분양과 민간의 신규투자가 재개되고 대북 쌀 차관도 제공되었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정경분리 원칙이 시련을 겪었지만 핵 문제가 반년 만에 봉합되고 10월에는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어 대규모 경협사업이 합의됨에 따라 남북경협은 오히려 확대발전의 기회를 잡은 듯 보였다. 

⑤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2008.7)과 천안함 사건(2010.3) : 정경분리 원칙의 2차 시련 

그러나 2007년 남북정상회담은 시기상 대선정국과 겹쳐 합의 이행이 처음부터 불안했다. 보수여론이 득세하고 대북포용정책에 비판적이던 후보가 당선되고 대북정책 재검토를 공언하자 2007년 정상회담의 ‘10.4합의’이행은 물론 정경분리 원칙마저 논란의 도마에 올랐다.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를 핵문제에 보다 강하게 연계시켰고 북핵 문제에 진전이 없는 한 남북경협 확대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신규투자가 아닌 기투자 사업은 계속 허용하였다.

북한이 통일부 장관 발언을 빌미로 개성 남북경협협의사무소 남측 직원을 추방한 것을 시작으로 2010년 ‘5.24 조치’까지 남북관계는 악재의 연속이었지만 정부의 정책은 대체로 2006년 10월부터 2007년 2월 사이(정경분리 1차 시련기) 정부의 태도와 같았다.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서 대북제재와 협상의 두 수단을 병행하되 대북제재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정부와 차별성이 있었지만, 정부차원의 경협논의 중단, 민간경협 신규투자 유보, 금강산 관광은 신변안전의 제도적 보장 시까지 중단한다는 과거 정부 방식 및 기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금강산 관광객 사망 사건으로 인한 민간 경협에 대한 정부의 간여와 통제도 관광 사업으로 국한하였다. 정부가 협상보다는 제재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관광 중단이 장기화되고 정부차원의 지원을 재개되지 않아 착시현상이 있을 수 있지만, 실제 남북경협 현장에서 개성공단을 제외한 상업성 교역도 이 기간 중 축소되지 않았다.

본격적인 문제는 정부가 2010년 3월 발생한 천안함 사건에 대한 대응책의 일환으로 남북교역과 경협을 중단하면서 시작되었다. 정부는 5월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소행임을 밝히고 남북교역과 경협을 중단하되 개성공단 기투자 사업과 영유아 취약계층에 대한 인도적 지원만을 예외로 두는 ‘5.24 조치’를 발표하였다. 

5.24조치는 북한이 천안함 사건의 도발을 시인 사과하고 책임있는 조치를 취할 때까지 △우리 해역에서의 북한선박 운항의 전면 불허 △남북 교역의 중단(개성공단 사업 제외) △우리 국민의 방북 불허 △북한에 대한 신규투자 불허(개성공단 포함) △대북지원 사업의 원칙적 보류(취약계층 대상 제외) 등 강력한 대응조치를 취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경분리에 대한 1차 시련기(2006,10-2007.2)와 이명박 정부 초기의 대응이 ‘정경분리 원칙에 몇 가지 예외를 둔 것’이었다면, ‘5.24 조치’ 이후는 ‘정경연계를 원칙으로 하고 몇 가지 예외를 둔 것’으로, 이는 그간 정부의 남북경협 원칙에 중요한 태도 변화였다.

물론 과거에도 정경분리가 원칙으로 확고히 정립된 것도 아니며 우리 현실에서 문제가 많다는 지적과 비판이 있었지만, 충분한 공론화나 준비과정 없이 정경연계로 원칙으로 변경한다는 것은 과거의 논란을 해소하기 보다는 새로운 논란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5.24 조치’로 북한에 타격을 주고 북한의 태도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당초의 기대효과가 가시화되지 않고, 오히려 남한 기업들이 빠진 자리에 북한과 중국의 경협이 확대 되면서 ‘5.24조치’의 효용성이 부정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북한이 아니라 국내 업체들만 피해를 입었다는 불만도 크게 고조되어, 왜 우리가 남북경협을 추진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입장부터 재정립해야 할 필요도 제기되었다.

지난 5년간 민간경협의 전문가나 남북경협기업들은 계기가 조성될 때마다 ‘5.24 조치’ 해제를 정부에 건의하고 여론에 호소해 왔다. 그러나 북핵 문제에 접점이 보이지 않고 남북관계도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국민들의 부정적인 대북인식이 뿌리 깊이 확산하여 남북경협 재개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다행히 2015년 8월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과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로 발생한 돌발적인 남북 위기상황이 판문점 남북 고위급 접촉으로 타결되어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분위기가 급반전하고 있다. ‘5.24 조치’해제와 남북경협의 재개에 대한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서 성급한 기대감도 있으나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이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지난 30년간 남북 경협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특히 경제외적 리스크로 인한 위기와 극복과정을 살펴보았다. 이제 남북경협이 재개되면 단순히 ‘5.24 조치’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기는 힘들 것이며, 그렇게 되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남북경협을 왜 추진해야 하는 것인지 그 필요성을 재점검하고 이에 대한 국민적 공감과 지지를 확충하고 달라진 환경 속에서 새로운 경협추진 전략을 고민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 개성공단 2000년 8월 현대와 북한이 합의하여 조성한 생산단지이며, 개성직할시 일대에 800만평 규모의 공단과 1200만평 규모의 배후단지를 조성해 국내기업을 유치한다는 구상으로 개발되었다. 개성공단에 입주한 업체에서 북한 근로자들이 일을 하고 있다. 출처=e 영상영사관

남북경협의 필요성과 추진방향에 대한 재검토 

① 정부의 통일정책 구도에서 본 정경분리 

우리 정부는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평화통일 정책구상(70.8.15)으로 6.25이래 암묵적으로 견지하던 북진통일 대신 상호공존하면서 평화통일을 추구하기로 공식 선언한다.

평화통일을 위한 대통령과 정부의 책임과 의무는 1987년 개정헌법에 명시적으로 규정되고, 평화통일 여건 조성을 위해 대북문호 개방을 선언한 노태우 대동령의 ‘7.7선언’(1988.7.7)과 1989년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지지를 결의한 ‘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을 정립하면서 평화통일 이정표가 정부 차원에서 공식화한다.

북한의 연방제와 달리, 우리 정부의 평화통일 정책의 핵심은 통일을 과정으로 보고 민족공동체라는 중단단계를 거쳐 완전한 통일로 가자는 것이다. 상호 대립하고 대결하는 남북이 민족공동체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서로 합의하기 힘든 정치적 문제를 우회하여 경제와 사회문화적 교류협력을 증진시켜 우선 ‘사실상(de facto)의 통일’을 이룩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1970년 이래 역대 정부가 계승하고 있으며 여전히 유효하다. 민족공동체 형성을 위해서 비정치적 분야로부터 교류협력을 추진하고, 이런 분야에서 가장 실효적이고 중요한 수단은 남북경협이다. 남북 사이의 이념적 정치적 대결과 갈등이 존재한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경협을 통해 남북관계를 발전시킨다는 것이 대한민국 통일정책의 핵심인 것이다.

남북경협을 중핵적 정책수단으로 삼은 우리 정부의 평화통일정책 구도는 애초부터 정경분리를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② 정경분리 비판론의 근거 재검토 

우리 현실에서 정경분리 원칙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은 나름 타당하다.

남북관계의 특성상 남북교류협력에서 정치적 성격을 완전히 분리하기란 불가능하다. 이산가족 문제 같은 인도적 사안마저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이념대립을 수반하지 않는 분야로부터 교류협력을 착수한다면 그것은 경제협력분야가 될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가급적 경제협력은 정치 문제와 연계하지 않고 추진하자는 것이 정경분리의 참된 취지이다. 적대적 분단 상황에서 정경분리가 필요하고 가능하다는 사례는 과거 동서독 사례 뿐만 아니라 현재의 중국과 대만간의 양안 관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남북관계와 양안관계를 비교하면, 중국은 이제 사실상 통일이 필요 없는 단계로 들어선 것 같다. 우리가 대북문호 개방을 한 것은 1988년이며 대만의 본토 문호개방은 1987년으로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동안 북한을 다녀온 남한주민이 모두 300만 명인데 비해 본토를 방문한 대만인은 7,000만 명에 육박한다. 200만 명의 대만 사람이 본토에 살고 있다. 중국 본토인도 500만 명이상 대만을 방문했다. 쌍방 간에 아예 합볍적으로 결혼할 수 있어 대만에는 10만 명 이상의 본토인 신부가 살고 있다. 양안 교역의 규모는 1,000억불을 넘어선 지 오래고 상호 직접투자도 3,000억불이 넘는다. 10만 개 이상의 대만 기업이 본토에 공장과 사무실을 두고 있으며 본토인은 대만 주식시장에 투자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의 전 단계인 경제협력기본협정(ECFA)도 체결되었다. 이렇듯 서로의 경제에 상호 깊이 편입되어 버리면 전쟁 가능성이 크게 낮아지게 된다. 상대방 경제에 대한 타격은 곧 자신의 경제에도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양안관계가 남북관계 보다 활발한 것은 중국과 대만이 우리 보다 애초부터 적대관계가 덜 심했다거나 대결 심리가 느슨했던 것도 아니다. 3년의 한국전쟁에 비해 국공내전은 22년 동안 계속되었고, 내전이 끝나고도 양안 사이 섬들을 두고 포격전, 상륙전, 해상전투 등을 벌이며 30년 동안 무력충돌이 있었다. 중국과 대만도 오랫동안 학교교육으로 자기 학생에게 상대방을 악마로 가르치고 대중매체에서도 상호비방에 열을 올려왔다. 서로 상대방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기 전까지 그래왔던 것은 우리와 같다.

다시 말해 정경분리가 가능한 상황이 되니까 정경분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경분리를 통해 얻고자 하는 목표가 있으니까 어려운 상황에 있으니까 오히려 정경분리를 추구하는 의미가 있다.

한중관계나 한일관계는 이미 정경분리 원칙을 새삼스레 언급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중국 불법조업 어선을 단속하는 해경이 중국 선원에 의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일본이 독도문제에 대해 도발을 하더라도 서로간의 경협은 큰 지장 없이 진행된다.

우리는 이를 정경분리 원칙이 적용되지 때문이라고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본이나 중국과 수교하기 이전부터 교역을 허용한 사례처럼 정경분리는 정치의 제약이나 한계에도 불구하고 추진할 때에 비로써 정책적 유용성을 갖는다.

현실에 있어 남북관계는 부침을 거듭하고 북한의 도발로 반복되었다. 그럴 때 마다 남북경협이 비판을 받았는데 주로 밑바진 독에 물붓기라든가, 퍼주고 얻은 것은 없다는 식의 지적이 있었다. 이러한 비판의 근저에는 남북경협이 북한에 시혜적이라는 인식이 존재한다.

그러나 민간경협은 추진주체에 이익이 없으면 추진될 수 없다. 초기투자 비용이 들어도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어야 성사된다. 민간경협은 원리상 시혜적이 아니라 호혜적이다.

따라서 남북 경협이 북한 경제를 돕거나 장차 통일 과정을 원만하게 추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단기적 장기적 측면에서 우리 경제에 직접적인 도움이 된다고 받아들여져야 정경분리 원칙이 힘을 받을 것이다.

남북경협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얻고자 하면 남북경협이 우리 경제에 이익이 된다는 점이 제대로 강조될 필요가 있다.

향후 10년은 한국사회의 지속성장과 발전 가능 여부를 좌우하는 중대변화 시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현재의 내수시장과 인적시장과 인적자원 규모로는 추가적인 지속성장 동력을 마련하기 힘든 상황이다. 한국 경제구조의 취약성(빈약한 내수시장과 높은 대외의존도), 인구감소 전망과 고령화로 인한 성장제약은 가장 큰 도전이다. 여성의 경제참여도 제고, 정년 연장, 외국노동자 도입만으로는 현재생산 인구규모를 유지하기에 급급하며, 내수 시장과 인력자원을 획기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대안은 남북경제공동체를 조기에 형성하는 것뿐이다.

북한에 매장된 지하자원 가치는 6조 달러로 평가된다. 동아시아 최대 철광산과 탄광이 있으며 아연과 마그네사이트 매장량은 세계 5위권이다. 첨단제품 개발에 필수적인 희토류도 상당량 부존한다는 보고도 있다. 철 등 주요광종의 국내수요 1/4 만이라도 북한에서 조달해도 100년 이상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북한의 공장은 경제난과 대북경제재제로 원자재와 원료가 부족하여 가동율이 매우 낮다. 노동자가 일감이 없어 놀고 있다는 말인데 다르게 표현하자면 노동력이 풍부하다는 말이다. 60~70년대 우리나라처럼 북한도 돈을 벌기 위해 노동자를 외국에 보내고 있다. 북한노동자 임금은 중국노동자의 절반이지만 손재주가 좋고 생산성이 높아 중국기업들에게 인기다. 인건비 비중이 높은 노동집약적 산업에게 북한의 노동력은 큰 매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남북경협이 우리에게 이익이라고 무작정 정경분리 원칙을 교조적으로 적용해서는 역시 정책원리로서 유용성이 없다. 남북관계는 교전상대방간의 적대관계라는 특성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안보문제는 앞으로도 모든 정책적 고려에 우선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안보 차원에서 보더라도 ‘5.24 조치’는 궁극 해결책이 아니다. 안보에는 평화를 지키는 것과 함께 만들어 가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7.7선언’ 이후의 정책이 정경분리를 표방했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한반도 평화 만들기의 일환에서 안보 차원과 연결된다.

남북경협 중단 조치를 ‘평화 지키기’라는 안보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남북경협재개도 ‘평화 만들기’라고 하는 안보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평화통일 정책의 중요한 수단인 남북경협을 무작정 유보해 둘 상황은 아니다. 과거 경제외적 리스크를 극복한 과정을 참고하여 ‘5.24 조치’의 합리적 출구를 모색해야 한다. 

③ 남북경협 제도개선 방향 : ‘5.24’이전으로 회귀(回歸)가 아니라 제도적 발전이 수반된 새로운 방향의 설정 

과거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남북경협은 경제외적인 리스크 극복과정에서 제도적으로나 정책적으로 한 단계 발전했다.

밀입북 사건(89.3)은 남북경협 법제도 구축의 계기가 되었고, 대규모 간첩단 사건(92.10)은 정경분리 원칙이 정비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연평해전과 금강산 관광객의 억류사건(99.6)은 민간경협의 정경분리 원칙과 정부책임 범위간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5.24 조치’도 그 출구를 나서면서 남북경협에 새 차원을 열어야 한다.

‘5.24 조치’로 인한 논란의 핵심은 정경분리의 문제이다. ‘5.24 조치’의 출구는 남북관계 전반 상황에 따라 전략적으로 마련되겠지만, 남북경협 관련제도가 정경분리 문제에 대해 보다 명료한 모습으로 정리되어 남북경협 발전의 중요한 계기로 되어야 한다.

2010년 이후의 경험은 남북관계의 특수성에 따라 완전한 정경분리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남북경협이 양안(兩岸)경협처럼 확대되기 전까지 우리 현실에서 정경분리는 남북경협의 이상(理想)이지 이를 현실인 것처럼 전제하고 추진해서는 곤란하다는 값비싼 교훈을 남겼다.

정경분리를 추구화되 남북경협이 자체 힘을 가지고 정치적 역향력을 배제할 만큼 성장할 때까지는 ‘정경분리’보다 경영환경의 예측가능성을 높일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것이다. 즉 경영외적 리스크의 양상이나 단계에 따라 이를 누가 어떻게 부담 또는 분담할 것인가 하는 기준을 미리 제시함으로써 남북경협의 경영환경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높여보자는 것이다.

‘5.24 조치’가 안보 차원에서 불가피했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기업은 사전준비와 조치가 미흡했고 북한내 재산보전이나 회수가능한 재산 처리를 위한 시간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해 큰 불만을 갖고 있다.

정경분리의 전제는 기업의 자율판단을 존중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정치적 리스크를 정부가 부담하는 것은 정경분리가 아니다. 정경분리 원칙을 살리면서 경제외적 리스크들에 대한 정부의 사전조치와 필요한 절차를 규정하고 각각의 단계(범주)에서 정부와 민간 사이에 리스크를 합리적으로 분담하게 할 필요가 있다.

‘5.24’의 출구가 마련되면 남북경협의 정경분리와 정부개입 문제 즉, 정부와 기업 간에 경영외적 리스크를 분담 문제가 명확히 정리되어 남북경협을 뒷받침하는 제도가 한 단계 발전하기를 기대해 본다.

본 기사는 월간지 <이코노미21> 436호(2016년 2월)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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