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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인생기행 1. 아! 폴란드①
빛바랜 인생기행 1. 아! 폴란드①
  • 신성은 선임기자
  • 승인 2018.05.24 22: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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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비극, 아우슈비츠 수용소. 여전한 역사의 상처

그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조금 있으니 눈시울이 분명 붉어졌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폴란드 옛 수도 클라코우 인근에 위치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폴란드를 대표하는 관광명소다. 아주 슬픈.

난 일 때문에 폴란드를 자주 방문했다.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동쪽의 루블린, 서남쪽의 도자기 마을 볼레스와비에츠, 그리고 파트너가 있는 베를린 인근 포즈난, 발틱해의 그단스크까지 꽤나 많은 곳을 돌아 다녔다. 특히 많이 걸어 다닌 바르샤바와 포즈난은 도시의 얼개가 머리속에 그려진다.

유럽의 도시들 대부분 그러하듯 그렇게 크지 않다. 덕분에 조금 돌아다니면, 특히 렌터카라도 빌리면 더 쉽게 도시를 익힐 수 있다.

첫 방문때, 폴란드 전역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 비즈니스미팅을 마치고 급하게 클라코우로 가던 중 길을 잃었다. 덕분에 시간이 다소 모자라 클라코우행을 포기했다.

그리고 다시 클라코우에 가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 9월초(2017년), 이번엔 체코를 가야할 일이 생겼다. 나는 프라하를 너무 좋아한다. 그래선지 프라하도 꽤나 갔던 것 같다. 프라하를 거쳐 가나 하고 기대했는데 이번엔 프라하가 아니라 체코 동쪽 오스타라바로 가야했다. 거의 슬로바키아와 접경한 지역이었는데 포즈난에선 프라하가 있는 남쪽이 아니라 바르샤바쪽 그러니까 동쪽으로 가다 남쪽으로 가는 고속도로 코스였다. 폴란드에서 가장 좋은 고속도로였다. 포즈난에서 오스트라바까지 폴란드 고속도로와 체코 고속도로를 달려 갔다. 700km가 훨씬 넘는 거리였다. 우리 파트너는 차를 몰고 가자 했다. “이 거리를” 하며 놀라는 우리를 아랑곳 하지않고 그는 냅다 달려 댔다.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무려 시속 220km가 넘는 엄청난 속도였다. 물론 폴란드 고속도로에도 속도제한이 있다. 그러나 우리 옛날처럼 경찰들이 속도계로 잡아낸다. 그는 “걱정말라”며 코웃음 친다. 잡힐 일이 없다는 것. 그의 차는 아우디였다. 정말 차가 좋은 건지. 나는 경험해보지 못한 속도에 불안감으로 놀랐지만 이내 적응했다.

폴란드는 유럽에서 면적이 꽤나 넓은 나라다. 프랑스, 독일 등에 이어 6번째다. 동유럽에선 제일 크다. 남북한 합한 면적의 약 1.5배. 유럽 선진국과 달리 농업이 발전한 나라지만 최근엔 어딜 가나 공사현장이 즐비하다. 나름 빠르게 발전하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도로상황은 썩 좋지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 도로 상황이 워낙 좋은 탓 일까.  어딜 가도 우리보다 못한 듯하다.

하룻밤을 자고 돌아오는 길엔 폴란드로 올라와서 남쪽 도로를 탔다. 함께 간 선배의 강권에 약간의 시간차를 감수하고 우리는 아우슈비츠로 향했다.

사실 루카스(폴란드 파트너의 이름이다)는 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몇 번 의사를 밝혔지만 선배의 강경한 입장을 꺾진 못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막사동 사이에 위치한 총살장. 

도착한 것은 거의 오후 4시쯤. 오전 미팅을 마무리한 뒤 서둘려 달려왔지만 시간은 한참이나 흘렀다.

고속도로에서 내려 클라코우 외곽을 약간 돈 뒤 아우슈비츠의 넓은 주차장으로 들어오니 많은 관광객들이 북적거렸다.

중국인들과 아시아인들은 어디를 가도 많다. 그런데 독일인도 적지 않았다. 다소 의아해 “독일인이 많이 오냐”고 물었더니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다고 했다. 표를 끊고 수용소안으로 들어가니 그의 낯빛은 점점 변해갔다. 그리고 나도 스스로가 너무 놀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 내가 이것을 이다지도 몰랐나! 나는 학창시절 세계사를 공부했고 무척 좋아했다. 그런데 아우슈비츠가 까마득했다. 분명 몇가지는 기억했다 히틀러의 나찌 독일이 자행했던 엄청난 유태인 대학살, 그렇게 기억했다. 미국의 스티븐 스필버그감독은 유태인학살을 다룬 ‘쉰들러리스트’라는 영화로 세계를 흔든 적이 있다.

그런데 현장에서 마주한 이건 역사적 만행이었다. 있을 수 없는 야만적 행위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다. 정말 오랜만에 가슴 깊숙한 곳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그런데 왜 나는 이러한 역사적 대학살을 희미하게 기억했을까. 까마득하다. 그리고 머리속에서 거의 지워졌던 것 같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가혹했던 이 대학살을 나는 왜 잊고 살았을까.

아마도 우리네 일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의 역사가 고단했고 내 개인사가 힘겨웠다. 그래서인 것 같다. 아마도. 그런데 왠지 미안했다. 루카스, 그에게도 미안했다. 그는 어느 정도 감정에서 벗어난 뒤 조금씩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너무나도 엄청난 역사의 기록에, 폴란드인들이 서서히 복원해온 생생한 사실 재현에, 서서히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온몸이 계속 떨림을 느끼고 있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어간 유태인은 무려 4백만명이 넘는다고 한다(異論.이론은 많은 것 같다). 상상이 안된다. 어떻게 이정도 공간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끌고 와서 죽일 수 있었는지, 상상을 초월하는 역사의 광기에 정신이 멍해졌다. 페이스북에 여행의 모든 걸 걸고 있는 선배의 핸드폰 사진질과 포토스팟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 그 친구에게 민망했다.

얼마나 죽었는지에 대해선 약간의 차이가 있는듯 하다. 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한 건 틀림없다. 말그대로 홀로코스트(holocaust)다. 2차대전중에 사망한 유대인이 약 6백만명으로 알려져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6백만명중에 약 4백만명 정도가 유대인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세계를 지배하는 유대인들의 거대한 슬픔, 그리고 히틀러의 학살, 인종청소라는 학살에 묻혀진 뼈 아픈 역사가 또 있다. 유럽에서 큰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전장이 되어버렸던 슬픈 역사의 폴란드, 그리고 폴란드인들의 죽음이다. 2차대전중에 독일의 침공을 받고 무려 6백만명에 가까운 폴란드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넓은 폴란드 평원은 20세기 거대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중에 전장이 되면서 피로 물들었고 사통팔달의 아우슈비츠는 집단 수용소로 슬픈 역사를 안게 됐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폴란드인들에게 독일은 어떤 존재인가”

그도 한국의 슬픈 역사를 알고 있다. 동북아의 한국은 유럽의 폴란드와 유사한 역사를 갖고 있다. 나의 질문은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여전한 분노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다. 독일은 세계대전 책임국가로써 세계에 사죄하고 지금도 항상 그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반면 일본은 여전히 가식적이고 다시 군사강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볼품없는 섬나라가 아닌 아시아 최고의 군사강국으로 부상해 아시아의 중심 중국마저 집어삼켰던 역사를, 일본인들은 내심으론 자랑스럽게 생각할 거라고.

그런데 독일은 세계대전 패전과 치욕의 역사를 뒤로하고 유럽의 지성을 대표하는 초강국이 되었다. 지금 독일은 유럽조차 몸살을 앓고 있는 비이성적 이기주의에 그래도 가장 강력하게 대응하는 국가로써 인류역사의 진보적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여전히 비 유럽국가 특히 터키나 중동 피난민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기도 하다. 순수 독일인들의 불평과 신나찌의 창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굳굳이 유럽공동체의 이성과 이상을 가장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아주 “멋진” 국가다.   

그럼 그런 독일은 아주 긴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폴란드에게 어떤 국가일까!

현실이 버거운 폴란드에게도 역시 독일은 가까운 이웃이다. 적지 않은 도움을 받는 국가이다. 주말이면 국경이란걸 느끼기 어려운 유럽이니 장보러 갈 수 있는 국가다.

그렇지만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물론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다.

독일이 세계대전 대학살과 전쟁에 대한 책임으로 진정 무엇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들은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지 않는가.

그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강하게 부정했다.

그들이 뭘 했는지 정말, 정말, 잘 모르겠다”

우리가 여행하는 사이 폴란드 정부는 독일에게 제 2차대전 폴란드 침공의 대가로 1조 달러의 배상으로 요구했다. 1조달러면 1천131조원이고 거의 우리나라 1년치 예산의 2배를 훌쩍 넘는 금액이다. 현재 폴란드 인구는 약 3천8백만명. 그런데 600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죽었으니 폴란드 역사상 가장 뼈아픈 기록이다. 폴란드 정부의 주장은 독일이 제대로 보상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진정 어린 협상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

그의 말이 맞을 지 모르겠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역시 폴란드의 다른 곳처럼 원형 그대로 보존된 곳이 아니다.

슬픈 폴란드의 현대 역사는 한편으론 지난한 복원의 역사이기도 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제2차 세계대전 막판 독일에 의해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으나 소련군의 이른 진주로 그나마 남았던 건물과 막사를 폴란드가 복원한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그들의 역사를, 전쟁으로 산산이 파괴되어버린 그들의 국토를 서서히 나름 철저하게 복원해 왔다.   

아우슈비츠는 유대인과 전장포로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시작, 나찌의 전쟁이 악랄해지는 만큼 더욱 악랄한 살육의 현장으로 변모했다. 그 역사 만큼은 아니지만 그들이 복원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대량학살의 처참한 현장을 잘 재현하고 있다. 집단총살이 있던 곳, 가스실, 고문실, 뿐만이 아니라 인체실험실 등이 있었다. 여성 희생자들의 머리카락은 카펫을 만드는데 사용되기도 했다. 유대인들과 집시 등 집단 살육된 그들의 장신구와 금니는 금괴를 만드는데 활용되었다. 뼈는 갈아서 골분비료를 썼다고 하니 그곳은 역사적 집단 학대와 살육의 아수라장이었다.    

 

폴란드인들에의해 복원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입구. 제2차 세계대전 홀로코우스트의 현장을 찾는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폴란드인들에의해 복원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입구. 제2차 세계대전 홀로코우스트의 현장을 찾는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다른 한 켠엔 그들이 어떻게 역사를 복원해왔는가를 보여주는 공간도 있었다.

많은 독일인들이 이곳을 방문한다. 그들은 그들의 선조가 만들어 놓은 이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갈까. 정말 궁금하다.

잿빛의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엔 어디든 여전한 긴 행렬이 있어 모든 것을 다 보는 것은 힘겨웠다. 게다가 선배의 사진에 대한 열정은 많은 시간을 빼앗은 또 다른 이유였다.

언젠가 다시 한번 찾아오리라. 그리고 그때는 차분하게 역사와 현장을 살펴보리라. 많은 기록의 책중에 적어도 한 권은 읽고 올 것이다. 그리고 차분하게 역사의 기록과 현장을 새겨볼 계획이다.

이곳을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던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이 든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폴란드는 근대 역사에 사라져 있었다. 우리처럼 주변 강대국들 탓이다.  

그러던 중 우리가 일본 속국으로 있을 때 다시 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때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면서 1918년 독립국가로 재등장했다. 그러나 독일의 침공으로 1939년, 다시 역사에서 사라졌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피우스트스키정권은 1932년 독일과 불가침 협정을 맺고 발버둥쳤다. 그러나 파시스트화한 오욕의 보람(?)도 없이 1939년, 독일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폴란드 역사의 이 뼈아픈 현장을 대표하는 곳이 바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다.

아우슈비츠수용소가 있었던 곳의 폴란드 지명은 오슈비엥침이다.

독일 히틀러의 나찌 부대는 이 오슈비엥침에 3개의 수용소를 만들었다.

1940년 1호, 1942년 10월에 3호, 아우슈비츠(모노비츠)가 세워졌다.

아우슈비츠 제1 수용소는 1940년 5월부터 버려진 폴란드 포병 막사에서 시작되었다. 독일군은수감자들을 이때부터 강제 노동에 투입했다. 초기 수용자들은 독일의 독일 죄수들과 폴란드 정치범들이었다. 이때부터 대학살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미 이때부터 가스실이 만들어졌고 시체소각장도 건설되었다.

여기에 나찌의 잔혹성을 대표하는 인체실험도 진행되었던 흔적도 있다고 한다. 이중 가장 유명한 의사가 바로 대위 요제프 멩겔레박사(Dr. Josef Mengele)다. 그는 신생아들까지도 실험대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제2호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는 규모도 커지고 전기 철조망이 만들어졌으며 유대인과 집시들의 집단수용이 시작되었다. 특히 집단 학살, 유럽 전역의 유태인들을 말살하고자 하는 계획의 중심이 된 수용소다.

제3호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폴란드 모노비체 외곽, 합성 고무 공장에서 일할 수감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1942년 10월, 가장 늦게 건설되었다. 공장인력을 위한 이 수용소엔 당시 무려 7억 마르크가 투자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부디, 라스코, 체코비츠, 하멘스, 바비츠를 포함 39개의 장소에 보조 수용소가 만들어졌는데 이들은 대부분 강제노동을 위한 수용소였다.

제1호, 제2호 아우슈비츠 수용소엔 독일군이 점령한 곳에서 체포된 유태인들이 집중적으로 수감됐다. 히틀러의 반유태정책은 전쟁이 불리해지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고 이는 1944년 여름, 전쟁이 막을 내릴 무렵까지 이어졌다. 당시 각국으로부터 수송되어 온 사람들의 수는 헝가리 426,000명, 폴란드 300,000명, 프랑스 69,000명, 네덜란드60,000명, 그리스 55,000명,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46,000명, 슬로바키아 27,000명, 벨기에 25,000명, 유고슬라비아 10,000명, 이탈리아 7,500명, 노르웨이 690명 등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 막바지 엄청난 학살이 자행된 아우슈비츠 수용소 시체 소각장.
전쟁 막바지 엄청난 학살이 자행된 아우슈비츠 수용소 시체 소각장.

엄청난 숫자다.

또한 뒤늦게 수용소로 수감된 상당수는 바로 가스실로 보내 졌다고 한다.

수감이 힘든 이후에도 그해 겨울까지 가스실 학살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이견이 많다.

가장 적은 수자를 가리키는 경우에도 결코 적지 않다.

일부 연구에선 사망 유태인의 수를 약 960,000명으로 추정한다. 4백만명으로 기록된 자료도 있으니 4배 정도 차이가 나는 셈이다.

아우슈비츠가 해방된 것은 전쟁 막바지인 1945년 1월 중순에 이르러 였다.

소련군이 수용소 방면으로 진격해 오자 독일군은 수감자들을 마구 사살하였다고 한다.

홀로코스트산업”이란 표현으로 이후 유대인들의 아우슈비츠 활용을 비난한 내용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역사상 가장 악랄한 학살행위로 기록될 것이다.

 

 

폴란드 여행 TIP

일반적인 여행팁은 여행전문서적에 많이 나와있다. 인터넷에도 상세한 정보가 있다.

우리네가 하는 여행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다. 그냥 서술이다.

 

- 도로: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많이 좋지 않다. 특히 대도시를 연결하는 동서남북의 고속도로를 제외하면 2차선 도로가 많다. 국도는 2차선 도로가 꽤 많고 오래된 탓인지 차선의 외곽쪽이 많이 허물어져 버렸다. 차바퀴가 도로 끝자락의 모래나 흙에 의해 미끌어지는 경우가 쫴 있다.  그래서 밤 늦게까지 운전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다. 초행길이니 부담스러운데 도로 사정이 부담을 가중시킨다. 지방이나 시골로 갈수록 포장되지 않은 도로도 많다. 따라서 추월이 쉽지 않다. 그런데도 폴란드 사람들중 급한 사람들은 꽤 추월을 한다.

- 국경: 국경이 없다? 유럽에서 차로 이동중 국경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핸드폰으로 날라 오는 외무부의 메시지가 아니면 국경선이 어디인지도 알 길이 없다. 최근 국가이기주의에 의해 말이 많지만 EU의 실체를 느낄 수 있는 지점이다. 센겐조약 덕이다. 지난 1985년 체결된 이조약에 따라 EU국가들은 여권없이 국경을 넘을 수 있으며 국경 통제를 풀어 버렸다.  

- 렌터카: 아주 좋은 여행수단이다. 특히 여러 국가와 도시들을 이용할 때 유리하다. 유럽국가들은 크지 않다. 따라서 자동차를 렌트하면 인근지역을 중심으로 여행하기가 수월하다. 렌터카를 권하는 이유중 하나는 가격이 저렴하다. 많은 렌트카 회사들이 온라인서비스를 매우 쉽게 하고 있어 이용도 편하다. 작은 차는 5만원에서 10만원 사이다. 다만 왠만하면 한곳에서 빌리고 반납하는 것이 좋다. 같은 렌트회사라도 실제로 다른 곳에서 차를 반납하는 서비스가 쉽지 않다.

- 내비게이션: 구글을 이용하면 된다. 한국에서 구글이 네비게이션 서비스를 하지 않는데 다른 나라에선 왠만하면 한다. 한국처럼 그대로 쓰면 된다. 당연히 한글 서비스도 된다. 통신사 하루 종일 데이터서비스가 만원이니까 두루 활용도가 높다. 요즘엔 매우 저렴한 데이터서비스도 많다.   

- 면적: 폴란드의 면적은 유럽에서 6위다. 유럽에서 가장 넓은 나라는 프랑스(643,427km. 세계43위)다. 스페인이 다음, 스웨덴이 3위다. 독일이 357,022km로 4위고 핀란드 (338,145km)가 5위, 폴란드(312,685km)가 6위(세계 70위)다. 프랑스의 절반 정도지만 남북한 합친 면적의 1.5배가 조금 넘는다.

- 폴란드: 인구는 약 3천8백만명, 1인당 GNP는 약 1만5천달러로 동유럽에선 체크와 슬로바키아 다음 수준이다. 실제 체감 경제력은 더 높은 듯하다. 국민들은 여유가 있고 예술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다. 새로 짓는 건물들은 대부분 멋지다. 식당의 쉐프들도 자부심이 강하다. 그래서 메뉴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좋은 식당도 많다.

- 화폐: 대부분 유로와 폴란드 즈워티를 같이 쓴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폴란드즈워티를 쓰는 곳이 대부분이다. 대형호텔 등에선 유로도 쓸 수 있다. 그렇지만 환전하면 된다. 독일은 마르크화를 없애고 유로화를 쓰는데 아쉬운 대목이다. 유로존 이어도 나라마다 다르다. 물가는 싸다. 독일에 가면 비싸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폴란드는 우리보다 확실히 싸다. 택시비는 비슷한 것 같다. 신용카드는 대부분 된다. 현금은 약간만 가져가도 될 것 같다. 치안은 말은 많은데 내 느낌엔 안전했다. 폴란드 친구들도 그렇게 말한다.

- 호텔: 다른 나라에 비하면 많이 싸다. 미국계 호텔체인이나 유럽의 호텔 체인도 많다. 그런데 특별한 국제회의 등이 없으면 아주 싼 편이다. 수도인 바르샤바나 여행지인 그단스크 정도가 조금 비싼데 그래도 유럽계 노보텔은 조식 포함 100달러를 넘지 않는다. 포즈난의 노보텔은 70달러 정도면 조식까지 먹을 수 있다. 쉐라톤, 힐튼, 메리어트 등 미국계 호텔도 150달러 안팎이면 대개 조식까지 해결한다. 침대가 좀 작지만 노보텔 정도면 훌륭하다. 노보텔은 어느 곳이든 위치도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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