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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워런, 버니 샌더스의 뒤를 이을까?
엘리자베스 워런, 버니 샌더스의 뒤를 이을까?
  • 조준상 선임기자
  • 승인 2018.08.24 14:5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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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자본주의에 저항하며 대기업·월스트리트로부터 거리두기

 ' 샌더스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면 어땠을까?'

모든 사전 여론조사 결과를 부정한 2016년 11월 미국 대통령선거 결과를 접하고 나서 이런 생각을 한 번쯤 품어본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여기에는 힐러리로 상징되는 기성(established) 민주당 지도부의 경제노선과 정책이 서민층의 지지기반을 허물고 있다는 것을 샌더스는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 같은해 6월 브렉시트의 배경까지 감안하면, ‘후보 샌더스’는 기업 주도의 글로벌화로 인해 주변으로 밀려난 많은 근로자와 서민층이 트럼프에게 달려가는 사태를 막는 방파제였을 것이라는 희망섞인 추정이 보태진다. 허황한 추측이라고 치부하기만은 어렵다. 서민층의 소득 기반 확대와 노동기본권 강화, 노동조합의 교섭력 강화 등을 통해 기층 서민의 지지를 끌어올리려는 정책을 일관되게 내세웠던 샌더스의 이력에 눈을 감지 않는다면 말이다.

2016년 10월 뉴햄프셔 주 맨체스터에서 힐러리 선거유세를 하는 모습 - 위키피디어
2016년 10월 뉴햄프셔 주 맨체스터에서 힐러리 선거유세를 하는 모습 - 위키피디어

그런 샌더스의 뒤를 잇는 주자가 나타난 것 같다. 민국 민주당 상원의원(매사추세츠 주) 엘리자베스 워런이 그 주인공이다. 여성이다. 힐러리와 월스트리트의 향기롭지 않은 관계를 감안하면 ‘힐러리 지우기’에도 한결 유리해 보인다. 그럼 그의 경제노선과 정책은 어떨까? 아마도 미국 서민층과 중산층이 가장 궁금해 하는 부분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세력들을 포함해 갈수록 악화하는 자산과 소득의 불평등 추세에 제동을 걸기를 원하는 많은 시민들의 관심사일 것이다.

주주 자본주의에 정면 도전한 책임자본주의법

지난 8월16일 워런은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법안을 발의했다. 이름은 ‘어카운터블 캐피털리즘 액트’(Accountable Capitalism Act)다. 우리말로 옮기면 ‘책임자본주의법’이나 ‘자본주의의 책임에 관한 법률’ 정도가 될 듯하다. ‘시장경제’라는 말 대신에 ‘자본주의’라는 말을 쓴 법안 명칭 자체가 흥미롭다. 내용으로 들어가면 흥미롭다는 말보다는 ‘진지한 정면도전’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미국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한국을 포함해 점점 더 미국 자본주의를 닮아온 글로벌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핵심 문제의 하나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주 자본주의’ 또는 ‘주주 근본주의’와 관련 거버넌스 개혁이 그것이다. 물론, 한국 자본주의의 경우 자연인인 소수의 지분을 갖는 재벌총수가 입맛에 따라 때로는 다른 이해관계자의 참여를 막기 위해 주주 자본주의를 논리를 이용하고, 때로는 총수의 지배를 공고하게 하기 위해 주주 자본주의 논리를 비난하는 행태를 보이는 '악조합'의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잦다는, 부연설명이 따라야 할 것이다.

워런이 발의한 ‘책임자본주의법(안)’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 상무부 산하에 미국기업국(office)을 둔다. 연간 매출이 10억달러(약 12조원) 이상인 대기업들은 미국기업국으로부터 다음의 사항에 대한 인가(charter)를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 첫째, 이들 기업의 이사회는 노동자와 지역공동체를 포함한 모든 이해관계자의 이해를 고려하여 결정해야 한다. 둘째, 근로자가 이사의 40%를 선출한다. 셋째, 정치자금 기부와 같은 정치 지출 결정을 하려면 이사와 주주의 4분의 3이 동의해야 한다. 넷째, 경영진과 이사는 스톡옵션 등을 통해 회사로부터 주식을 받았을 경우 이를 받은 뒤 5년 안에 매각하거나, 자사주 구매 후 3년 안에 매각할 수 없다.

핵심은 연 매출 10억달러 이상의 사적 대기업에 만연된 주주 자본주의의 거버넌스를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거버넌스로 재편하는 것이다. 기업의 존재 의의와 목표를 ‘주주가치 극대화’에서 ‘이해관계자의 상생’으로 확 뜯어 고치는 것이다. 주주가치 극대화 이데올로기가 부추겨온 기업 경영의 단기주의를 극복하고, 경영진에 대한 지나친 보상 폐해를 막고자 하는 것이다. 스톡옵션 행사 기간을 5년 이상으로 하고, 자사주 매입 이후 3년 이후로 하는 것은 회사 자산을 이용해 저질러온 지대와 사익 추구를 막겠다는 목적이 깔려 있다. 경영진의 지대 추구 행위가 자산·소득 불평등의 주범의 하나임을 감안하면, 이런 정책은 자산·소득 불평등의 완화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거의 모든 나라에서 자산·소득 불평등의 또 다른 핵심 주범은 어느 곳에 자리하고 있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위치재’(positional goods)의 셩격을 갖는 부동산이다).

워런, 민주당에서 힐러리의 그늘을 지울 수 있을까?

워런의 책임자본주의법(안)이 제기하는 도전과 힐러리가 내세웠던 정책을 비교해 보는 건 흥미롭다. 힐러리가 주주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시야를 외면한 건은 아니다. 2016년 대통령선거에서 “분기별 자본주의”라는 말로 주주 자본주의의 협소한 단기주의를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세운 건 ‘주식을 오래 보유하면 할수록 세금을 깎아준다’는 거였다. 예를 들어, 현재 보유기간이 1년 이상인 주식을 매각할 경우 장기투자로 간주해 자본이득세율은 일반 세율보다 낮은 15%가, 1년 미만이면 일반소득세율(최고세울 39.6%)가 부과되는데 이를 강화시키자는 게 힐러리 공약의 전부였다. 월스트리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민주당의 진보층을 만족시키려는 잔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에 견줘보면, 워런의 정책 비전은 분명히 훨씬 깊고도 넓다.

워런의 책임자본주의법(안)에 담긴 노선과 철학은 향후 미국 민주당의 경제노선이 주주가치 극대화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논쟁 속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높음을 내비친다. 워런이 2020년 대통령선거에 출사표를 던질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기에 더욱 그렇다. 워런이 지난 8월22일 전국언론클럽(NPC) 연설에서 ‘정부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 정치인과 정부 관리들의 주식 소유와 거래를 금지하고 위반할 경우 평생 동안 로비스트로 고용되지 못하도록 하자’고 제안한 것도 책임자본주의법(안)과 일맥상통한다.

2017년 4월 발행된 '우리의 싸움 -  미국 중산층을 위한 구하기 위한 투쟁'의 표지
워런이 2017년 4월 발행한 책의 표지

이런 일련의 행보를 미국 민주당의 경제·정치 노선을 바로잡기 위한 워런의 투쟁이라고 한다면, 이미 시작됐다. 주주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는 논리적으로도, 경험적으로 정당하지 않다고 보는 필자로서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논리적인 측면에서, 이 이데올로기는 ‘잔여 청구권자’(residual claimant)로서의 주주라는, 따라서 사전에 어떠한 수익률의 보장도 없이 가장 큰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이라는 관념에 뿌리를 둔다. 하지만 이 주장은 기업을 둘러싼 다른 주체들, 이를테면 납세자(정부가 기업에 제공하는 온갖 혜택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라든가 노동자가 사전에 보장된 수익률을 갖고 있다는 부당전제에 기초한다. 이는 분명히 잘못이다. 정부가 기업에 제공하는 온갖 지원에 대해 사전에 고정된 수익률을 보장받는다는 전제는 분명히 잘못이다. 근로자나 경영진, 채권자들 역시 급여가 체불되거나 채권이 떼이는 위험을 논리적으로 갖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회사를 청산할 때 주주에게 마지막 남은 청산금을 나눠준다는 의미의 ‘잔여청구권’이라는 말은 사실 무의미하다. 존속가치가 청산가치보다 높거나 인수나 합병이 아닌 형태로 청산에 몰리는 상황까지 가게 되면 어차피 남는 게 별로 없으니 그걸 주주의 '권리'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기 때문이다. ‘망할 권리’도 권리냐는 물음이다.

이론과 현실에서 주주는 이해당사자의 하나일 뿐

경험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일반주주는 단지 주식을 매매할 뿐이다. 해당 회사의 사업장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도 없다. '내가 이 회사 주주'라고 아무리 외쳐봤자, 경비원들에게 쫓겨나기 쉬운 신세다. 주식을 ‘소유’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배제하거나 매일매일 벌어지는 것을 결정할 수도 없다. '기업의 주인은 주주'라고 하기에는 너무 민망하다. 주식 '소유'처럼 따지자면, 채권 보유자도 자신의 채권을 '소유'하고, 납풉업자도 자신의 재고를 '소유'하며, 근로자도 자신의 노동력을 ‘소유’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채권자나 납품업자나 근로자가 '이 기업은 주인은 나'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주주를 포함해 이들 각 소유자는 기부 행위를 하는 게 아니다. 각자가 어떤 수익성 있는 보상을 기대하는 투자로서 자신이 '소유'한 자산을 기업에 기여하는 것이다. 결국 기업은 이윤을 창출하고,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이런 다양한 투자를 한 데 모으는 기제이며, 계약의 그물망의 성격이 강하다. 기업은 이렇게 이해하는 게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실상에 부합한다. 아마도, 책임자본주의법(안)의 근저에 깔린 기업관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 있지 않을까 싶다.

워런의 책임자본주의법(안)에 대해 이미 미국 <폭스뉴스>에는 "좌파 포퓰리즘의 가장 최근 형태"라는 비난성 보도가 등장했다.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법'이라고 주장하는 전문가까지 나왔다. 책임자본주의법(안)의 내용이 '대중에 영합하는 무책임한 정책을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를 뜻하는 포퓰리즘이라면, 포퓰리즘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해 보인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것 같다. 글로벌 자본주의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인 이른바 ‘신자유주의’로 불리는 시장만능 자본주의에 유일하게 저항한 것이 있다면, 이념적 스펙트럼의 어느 쪽에 있느냐를 떠나 포퓰리즘이었다고 긍정하는 내용이었다. 수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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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섭 2018-08-25 06:06:42
책임자본주의! 조준상 기자의 기사를 읽고 여러모로 고민을 많이 하게 됩니다. 더불어자본주의를 모색하는 법적, 제도적 노력, 민주당의 진로문제등. 매우 유익한 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