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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정’으로 전락하는 ‘사회유럽(Social Europe)’
'당의정’으로 전락하는 ‘사회유럽(Social Europe)’
  • 조준상 선임기자
  • 승인 2018.11.07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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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 집행위, 남부 유럽에는 긴축 일변도의 ‘사회 불도저’ 정책
유럽사법재판소, 단체행동권 제한과 주소 이전만으로 법인 형태 변경 허용

“독일에게 중요한 난민, 방위, 대외무역 관련 정책들에 대해서는 회원국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이와 동시에 유럽통화동맹을 정치적으로 완수하는 중추적 문제에 대해서는 벽창호 태도를 보이는 독일 정부의 철면피(chutzpah)를 보면서 나는 놀란다.”

우파 포퓰리즘의 발흥의 원인, 이민이 아닌 잘못된 긴축정책

'사회유럽 주변화의 삼두마차'의 하나로 꼽히는 유럽연합 집행위의 벨기에 브뤼셀 본부의 모습. 2007년 슬로베니아의 유로화 가입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선명하다. 위키피디아
'사회유럽 주변화의 삼두마차'의 하나로 꼽히는
유럽연합 집행위의 벨기에 브뤼셀 본부의 모습.
2007년 슬로베니아의 유로화 가입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선명하다.
위키피디아

독일의 석학 위르겐 하버마스가 진 9월21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에서 ‘유럽을 위한 새로운 전망들’이란 주제의 강연에서 쏟아낸 독설이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를 좌우해온 독일 정부가 2008년 대금융위기 이후 이탈리아․스페인 등 남부유럽 국가들에 보여 온 가혹한 긴축 정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하버마스는 유럽에서 부는 우파 포퓰리즘 바람의 원인은 이민 문제에 있지 않다고 본다. “유럽 전체를 조망한다면, 특히 유로존(유럽연합 28개 회원국 중 1999년 도입된 유로화를 채택한 19개 회원국)의 완결성을 살펴본다면, 점증하는 이민은 우파 포퓰리즘의 발흥을 설명한 우선적 요인이 될 수 없다. 독일 이외의 다른 나라들에서 여론의 반전은 훨씬 더 일찌감치 일어났고, (2008년) 은행 부문의 위기가 일으킨 국가채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논란 많은 정책의 시행 이후 실제로 가속화했다.”

1958년 1월 유럽경제공동체(유럽연합의 모태) 창립멤버 6개국의 하나인 이탈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최근의 사태는 단적인 증거에 해당한다. 지난 5월 출범한 이탈리아 정부는 반기성 정치를 내건 좌파 포퓰리즘 정당의 성격일 지닌 ‘오성운동’과 애초 이탈리아 북부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던 극우 분리주의 정당인 ‘동맹’의 연립정부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바로 집행위와 유럽중앙은행(ECB)과 같은 유럽연합 상층부의 편협한 행태가 불러온 ‘유럽연합 회의론’(Euroscepticism)에서 찾을 수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의 지침을 거부하고 2019년 예산안의 재정적자 규모를 국내총생산의 2.4%로 짠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집행위가 수용을 거부하면서 깊어지고 있는 이탈리아 예산 사태는 유로존 집단이탈이라는 양상으로 번질 가능성도 높은 편이다. 집행위는 경기침체의 상황에서 이탈리아 재정적자를 되레 국내총생산의 3.0% 이내에서 0.8%로 가혹하게 제한했다.

신화로 전락하는 ‘사회 유럽’

이탈리아 사태는 ‘경제통합이 경제와 이웃하는 정치의 영역으로 흘러넘쳐 궁극적으로 사회 유럽을 낳을 것이라는 믿음’이 배반당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노동조합들이 경제통합을 일관되게 지지했던 근거가 무너지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11월 유럽연합 집행위의 ‘유럽 사회권 기둥(the European Pillar of Social Rights)’ 선포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노동시장에 대한 동등한 기회와 접근, 공정한 노동조건, 사회적 보호와 통합을 위한 20개 원칙과 공정한 임금과 건강 돌봄, 평생학습과 일과 삶의 균형, 성평등, 최저소득 등 각종 권리가 담겨 있다.

‘사회 유럽은 신화’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장본인에는 가혹한 긴축을 강요하는 집행위와 유럽중앙은행만 있는 게 아니다. 유럽사법재판소(ECJ)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 세 기구에는 ‘사회 유럽을 경제적 자유화에 종속시키는 삼두마차(트로이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을 정도다. 사회 유럽의 주변화는 공공인프라 부문을 유럽 경쟁법의 적용을 받게 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국가 지원의 금지를 포함하는 유럽 경쟁법은 공공사업자와 민간사업자가 모두 있는 부문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예를 들어 독일 니더작센 주에서는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사업자에 대한 국가 지원이 민간사업자의 경쟁적 불이익을 낳기 때문에 유럽 경쟁법 위반이라고 소송이 제기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유럽 경쟁법이 민간사업자들이 자신의 이해를 관철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유럽의 주변화’를 이끄는 삼두마차

'사회유럽의 주변화'를 이끄는 장본인의 하나로 꼽히는, 룩셈부르크 키르히베르에 있는 유럽사법재판소 쌍둥이 건물의 모습
'사회유럽의 주변화'를 이끄는 장본인의 하나로 꼽히는,
룩셈부르크 키르히베르에 있는 유럽사법재판소 쌍둥이 건물의 모습.
위키피디아

기업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유럽사법재판소의 결정이 잇따르고 있는 것도 ‘사회 유럽'을 주변으로 밀어내고 있다. 이는 유럽사법재판소가 ‘삼두마차’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7년 10월 유럽사법재판소는 ‘본사의 이전 또는 실질적 사업활동의 이전이 없는 회사 주소의 이동’을 승인하는 엄청난 파장을 낳는 판결을 내렸다. ‘폴부드(Polbud) 판결’로 통하는 이 사건의 핵심은 폴란드에 회사 주소가 등록된 회사인 폴부드가 조세피난처로 알려진 룩셈부르크로 회사 주소만 옮기면서 법인의 형태를 바꾸는 게 가능하느냐였다. 폴란드 국내법은 다른 나라로 회사 주소를 변경하여 폴란드 법인 등기부에서 삭제되려면 본사의 이전이나 실질적인 사업활동의 이전과 같은 실질적인 청산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정하고 있는데, 유럽사법재판소는 유럽연합기능에관한조약(TFEU) 제49조와 제54조에서 보장하는 ‘회사설립의 자유’를 근거로 폴부드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로 인해 ‘우편함 회사(letterbox company)’ 설립을 통해 탈세와 최저임금과 같은 사회적 의무 회피, 종업원 공동결정제도 무력화 등을 꾀하는 행태가 유럽연합 전역에서 만연할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유럽노동조합연맹(ETUC)에 따르면, 지난해 룩셈부르크와 네덜란드에 대한 해외직접투자의 각 96%, 83%가 이런 식의 우편함 회사 방식이었다.

기업에 날개를 달아주는 결정을 내리면서 유럽사법재판소는 쟁의행위의 합법성을 좁고 엄격하게 해석하는 방식으로 노동조합의 단체행동권을 제한했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판결 두 가지다. 바이킹(Viking) 사건과 라바(Lava) 사건이다. 전자는 에스토니아의 저임금을 활용하기 위해 핀란드와 에스토니아를 오가는 라인의 여객선 국적을 핀란드에서 에스토니아로 바꾸려는 과정에서 빚어진 파업 등이 계기가 됐다. 후자는 라트비아 건설회사가 스웨덴에 있는 자회사에 라트비아 직원 30여명을 파견하면서 해당산업의 스웨덴 노동조합과 교섭이 결렬되자 벌어진 사업장 봉쇄 등과 같은 쟁의행위에 대한 것이었다.

두 사건 모두에 대해 유럽사법재판소는 쟁의행위를 벌일 권리를 ‘보편적 권리’로 인정하기는 했다. 하지만 해당 쟁의행위가 거주이전의 자유와 회사설립의 자유를 제한하기에 충분할 만큼 ‘정당하고’, “회사설립의 자유를 덜 제한하는” 다른 쟁의수단을 확보하고 이를 모두 소진하는 ‘비례적’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는 어떤 쟁의행위를 할지에 대한 선택권을 노동조합에게서 빼앗고, 단체행동의 정당성을 회사설립의 자유에 연계하겠다는 노골적인 선언에 해당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단체행동권을 영업방해와 연계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유럽사법재판소의 이런 일련의 판결들이 ‘사회 유럽의 주변화’에 해당한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유럽 전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데 걸림돌이 되는 법과 제도들을 걷어낼 수 있는 개별 청구권을 기업들에 보장하면서, 노동조합의 손발은 한층 더 옥죄는 결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 유럽’ 부활을 향한 노력들

‘더 많은 유럽’이 ‘사회 유럽’으로 이어지지 않는 현실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은 여러 가지 방향에서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이탈리아 2019년 예산 거부사태를 유럽 차원의 인프라 투자 시행과 연계하려는 연대 움직임이다. 그리스 등 긴축 정책의 폐해를 당한 나라들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이런 모습은 유럽연합 정상들의 모임인 이사회가 유럽연합 차원의 인프라 투자계획을 마련․발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지 않는 한 이탈리아는 국내총생산의 2.4%까지 재정적자 예산을 독자적으로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움직임은 회사설립의 자유 등과 같은 단일시장의 자유, 유럽 경쟁법, 이에 수반되는 제재 등과 같은 영역으로부터 일과 복지와 관련된 개별 회원국의 규제를 제외하려는 노력이다. 특히, 이런 제외 조항들을 각 회원국들이 구체적인 산업별로 마련해 나가자는 접근법이 특징이다. 더 많은 유럽이 사회 유럽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 상황에서, ‘너무 많은 유럽으로부터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인식에서다. 비슷한 맥락이기는 하지만, 유럽노동조합연맹과 같은 단체들은 유럽연합 기본조약에 (가칭)‘사회진보 프로토콜’을 부속서로 채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단일시장의 자유들에 언제나 우위를 갖는 근본적인 사회권들을 명확히 하자는 것이다. 유럽 차원에서 ‘사회 유럽’ 틀을 마련하라는 요구인 셈이다.

주변화하며 ‘신화’로 전락한 ‘사회 유럽’의 비전을 다시 살리기 위한 이런 다양한 움직임들은 내년 5월 치러지는 유럽의회 선거로 향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좌우했던 유럽연합 이사회와 집행위, 유럽중앙은행, 유럽사법재판소라는 트로이카의 노선이 바뀔지는 이 선거 결과에 달려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 유럽연합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장 클로드 융커 집행위원장이 말한 미국에 맞선 ‘유럽연합 주권의 시간’이라기보다 ‘사회 유럽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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