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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형 일자리, 노동조건 하향평준화의 ‘트로이목마’?
광주형 일자리, 노동조건 하향평준화의 ‘트로이목마’?
  • 조준상 선임기자
  • 승인 2018.12.19 13: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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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간 노동기본권 발목 잡겠다는 자본의 탐욕과 철학의 빈곤
완만하게 우상향 하는 임금곡선 도출하는 사회적 타협 망각

좀 이상하게 돌아가는 듯하다. ‘광주형 일자리’가 제조업 노동조건 하향평준화를 위한 ‘트로이 목’로 변질되는 듯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어서다.

애초 기자가 이해하고 공감했던 ‘광주형 일자리’의 문제의식은 하나다.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곡선이 너무 가파르게 우상향 하는 기존 제조업 정규직의 임금체계가 갖는 부작용을 개선해보자는 것이었다. 이런 문제의식을 ‘중규직’이라는 말로 표현해보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불필요한 오해를 낳을 수 있어 쓰이지 않았다. 그나마 적합한 용어는 근속연수가 아닌 직무를 중심으로 임금체계를 설정한다는 측면에서 ‘직무형 일자리’나 ‘직무형 정규직’이라고 생각하지만 쓰임 범위는 넓지 못하다. 이런 제안이 처음 나온 지역의 이름을 넣어 ‘광주형 일자리’로 불려온 것도 이런 사정이 작용한 걸로 알고 있다.

사회적 타협 봉쇄하는 노동기본권 제한

광주형 일자리 공장이 들어설 예정이던 광주빛그린산업단지 전경. 사진 SBS 보도 탭처
광주형 일자리 공장이 들어설 예정이던 광주빛그린산업단지 전경.
사진 SBS 보도 탭처

‘광주형 일자리’에서 노동자는 동일한 노동시간을 전제로 할 때 같은 직무에 종사하는 동종업계의 노동자보다 임금을 양보한다. 양보의 형태는 상대적으로 낮은 초임, 그리고 직무별로 근속연수에 따른 임금곡선이 완만하게 우상향하는 모습이다. 상대적으로 낮은 초임은 ‘광주형 일자리’ 도입을 위한 1단계 합의에서 결정되는 게 맞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완만하게 우상향 하는 임금곡선을 낳는 임금체계는 노사정, 시민사회와 학계가 함께 찾아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광주형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적 타협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지난 12월5일 노동계가 거부한 광주시와 현대자동차의 ‘잠정합의(안)’을 보면, 한 마디로 우려스럽기 짝이 없다. 초임 3500만원, 근로시간 주 44시간, 광주시가 제공하는 교육․주거 등 복지혜택 형태의 ‘사회임금’ 등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16년 6월 발표한 전 산업 사무관리직 사원의 중위임금이 연 3590만원이다. ‘광주형 일자리’에서는 생산직과 사무관리직의 차이를 축소한다는 가치를 싣는다면, 수용 가능하다.

경악할 만한 내용은 그 다음이다. 1만2천명의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작성된 잠정합의안에는 생산되는 경차형 스포츠 유틸리티 비히클(SUV) 누적 생산대수가 35만대에 이를 때까지 단체교섭권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광주형 일자리’를 마뜩찮아 하던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을 포함해 노동계가 거부한 것은 당연하기까지 하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잠정합의안에 드러난 철학의 빈곤과 자본의 탐욕

잠정합의안은 일종의 적나라한 ‘속내’와 ‘바닥’을 드러냈다. 엿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노동기본권을 볼모로 잡는 데 동의하는 경제관료 출신 이용섭 광주시장의 저열한 철학의 빈곤, 상대적 저임금을 악용하려는 현대자동차의 완강한 탐욕이다. 이 속에서 ‘광주형 일자리’ 모델의 핵심, 완만하게 우상향 하는 임금곡선을 도출하기 위한 노사정, 시민사회와 학계의 2단계 타협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사회에 근로자 대표 이사가 1명 포함된다고 하지만, 노동기본권이 없는 상황에서 무슨 소용이 있을지 의아스럽다.

이렇게 ‘바닥’과 ‘속내’가 드러난 상황에서 산업자원부가 지난 12월18일 발표한 ‘제조업 활력 회복 및 혁신 전략’에는 광주형 일자리 모델을 전국으로 확산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내년 1분기까지 구체적인 모델, 인센티브 패키지, 참여 주체들의 역할이 마련된다. 사업모델은 기업 신설이나 휴·폐업공장 재가동, 합작회사, 위탁생산, 유턴 등 다양하다고 한다. 산자부가 할 일은 명확하게 나와 있다. 이번에 드러난 ‘바닥’과 ‘속내’를 냉혹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그래야 시행착오가 되풀이되지 않는다.

이럴 바엔 노동기본권 존중하는 해외 자동차업체 유치가 더 낫다!

모델에서 현대자동차의 탐욕, 아니 자본의 탐욕을 견제하는 것이 으뜸이다. 광주에 만들어질 공장은 냉정하게 말해 현대자동차 것이 아니었다. 법인 설립에 필요한 자금 7천억원 중 4200억원은 산업은행 대출, 나머지 2800억원 중 광주시가 21%인 590억원, 현대차가 19%인 530억원, 협력업체들이 20%인 560억원, 그리고 나머지 40%인 1120억원 중 15%인 420억원을 산업은행이 투자하기로 돼 있었다. 산업은행과 광주시 투자분이 74.4%인 5210억원이나 된다. 현대자동차의 탐욕에 손을 들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현대자동차가 고집을 부릴 경우 차라리 노동기본권을 존중하는 해외 자동차 제조업체를 유치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유럽연합은 지난 12월18일 한국이 결사의 자유와 강제노동 금지 등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8개 가운데 4개를 비준하지 않고 있어 한국‏‐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 분쟁해결 절차에 들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지난 8년 간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는데 통하지 않아서 절차에 따라 이행을 촉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유럽연합의 이런 문제제기가 ‘광주형 일자리’ 모델과 무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정합의안에서 드러난 ‘바닥’과 ‘속내’는 투자자의 권리와 동등하게 노동자의 권리를 무역협정에 담으려는 국제적 움직임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 ‘광주형 일자리’를 국내시장이 아닌 수출시장에 적용하려는 시도는 아예 꿈도 꾸지 않는 게 좋다. 돌아오는 건 국제적 망신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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