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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이전의 ‘자유주의 국제질서’, 있기는 했나?
트럼프 이전의 ‘자유주의 국제질서’, 있기는 했나?
  • 조준상 선임기자
  • 승인 2019.01.11 16: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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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 충돌 없는 70년 평화, 냉전 세력 균형의 산물일 뿐
‘다양성’과 ‘상호성’에 기초한 국제무역질서는 새롭게 창출돼야
강제기술이전 폐지, 서방 주주자본주의 폐해 바로잡는 성격도 지녀

위대한 민주주의의 세련된 전통 속에서 우리는 전쟁을 예방하고 위대한 번영을 성취하는 새로운 자유주의(리버럴) 질서를 구축하는 데 고귀한 나라들을 소집하고 있다 … 트럼프 행정부는 우리의 주권적 이해나 우리 동맹국의 이해에 봉사하지 않는 낡거나 해로운 조약, 무역협정, 기타 국제협정들을 합법적으로 종료하거나 재협상하고 있다 … 우리는 주권국가들의 개방되고 투명하며 자유로운 세계를 보존, 보호, 전진시키기 위해 행동하고 있다.”

2018년 12월1일 미국과 중국의 부에노스아이레스 90일 휴전 합의 장면
2018년 12월1일 미국과 중국의 부에노스아이레스 90일 휴전 합의 장면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지난해 12월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비영리단체 ‘독일을 위한 미국의 마셜펀드'(GMF)가 주관한 회의에서 한 말이다. 그는 '준칙에 기반한 국제질서의 개혁'이란 주제로 강연하며 트럼프가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지금과 같은 무역협정 등에서 중국이 혜택을 보는 것은 “미국 퇴각에 따른 독이 든 사과”의 한 사례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폼페이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개혁한다면서 트럼프가 그동안 보인 모습은 혼돈 그 자체이기도 하거니와, 국제기구들이 ‘미국 일방주의’를 실행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매우 단순한 이해만을 드러내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폼페이오의 주장을 그대로 내던져 버리기는 어렵다. 트럼프가 훼손하고 있다고 전제된 지난 70년의 ‘준칙 기반의 자유주의 국제질서’로 복귀하는 것은 어렵다는 점을 폼페이오는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동의하게 되는 한 가지 이유는 트럼프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전제하는 그런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없었다고 보는 게 정확하기 때문이다.

강대국 충돌 없는 70년 세계평화, 자유주의 국제질서 아닌 냉전 세력균형의 산물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전 미국 국방부 국제안보담당 차관보)는 지난 70년 간의 ‘준칙 기반의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역설하는 대표적인 논자다. 하지만 이런 질서는 미국의 입맛에 맞는 '희망 사고'(whihful thinking)이자 일종의 환상이라는 비판은 수두룩하다. 그라햄 앨리슨 하버드대 케네디대학원 교수에 따르면,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합의는 세 가지 축으로 이뤄져 있다. 첫째, 자유주의 질서는 지난 70년 동안 강대국 속에서 유지되는 이른바 오랜 평화의 주요한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둘째, 이 질서의 구성이 지난 70년에 걸쳐 세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의 주요한 추동력이었다는 것이다. 조지프 나이가 “과거 70년에 걸쳐 세계의 안보를 유지하고 안정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데서 증명할 수 있는 이 질서의 성공은 이 시스템의 방어, 심화, 확대가 미국 외교정책의 중심 과제였고 계속 그럴 것이라는 강력한 합의로 이끌었다”고 주장하는 게 바로 이런 맥락이다. 셋째, 트럼프가 자유주의 질서와 세계평화의 으뜸 위협이라는 것이다. 이는 “나는 중국의 부상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트럼프의 부상이 더 두렵다”는 나이의 단언이 상징한다.

'강대국=예외'에 기초한 전후 냉전질서의 개막을 알린 1945년 얄타회담. 위키피디아
'강대국=예외'에 기초한 전후 냉전질서의 개막을 알린 1945년 얄타회담.
위키피디아

우리가 아는 경험과 상식은 이런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내세우는 명제와는 다르다. 적어도 1990년 옛 소련 붕괴 때까지 강대국 충돌이 없는 세계평화는 자유주의 질서의 결과가 아니라 냉전 45년 동안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이뤄진 ‘공포의 균형’으로 불리는 위험한 권력 균형의 결과라고 보는 게 상식이다. 이 시기 동안 강대국 전쟁을 예방한 국제 시스템은 소련과 미국 간 투쟁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는 얘기다. 미국의 일극 지배에서 이뤄지는 평화는 그 이후 짧은 시기에 한정된다.

게다가 앨리슨은 “자유주의를 해외로 진전시키거나 국제질서를 확립하려는 바람”에 따라 미국이 세계에 개입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추동력은 “미국 국내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보존”이었다. 국내 필요성에 따라 세계에 개입한 것이지 자유주의 국제질서 구축이라는 고귀한 사명을 위해 나선 게 아니라는 얘기다. 또한, 트럼프가 현재 질서의 주요한 요소들을 훼손하고는 있지만, 글로벌 평화와 안정의 최대 위협인지는 논란거리다. 어떠한 국제법적 권위도 없이 2003년 3월 이라크 침략 등을 자행한 장본인은 트럼프가 아니라 자유주의 질서의 지도자를 자칭한 부시 등 기성 정치권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이 질서에서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 5개국이 상징하듯이, 초강대국들은 언제나 ‘예외'였다. ’예외 없는 준칙은 없다‘고 할 테지만, 그 예외에 기초한 준칙이 일상이라면 자유주의 질서라고 하기는 어렵다.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아니라 결함투성이 앙샹레짐(구체제)이었다

국제무역을 관장해온 세계무역기구 체제도 결함투성이다. 특히 상품과 서비스의 자유무역을 넘어 지식재산권과 투자자 권리, 환경과 노동까지 포괄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관세를 넘어 비관세 장벽까지 포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문제점을 낳았다. 국민국가의 정당한 규제권한과 산업정책을 제한하는가 하면, 자유무역의 확대가 아니라 오히려 이에 역행하는 거대기업과 자본의 기득권 보호에 치우치고, 더 낮은 조세와 더 낮은 규제를 찾아 기업들이 전 세계를 순회하는 조세․규제 재정거래(arbitrage)에 몰두하는 것을 부추겨 왔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라기보다 세계무역기구는 앙샹레짐(구체제)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이런 맥락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이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유지․강화시키자는 주장은 현실에서는 냉전질서로 돌아가자는 것이거나, 냉전 이후 짤막했던 미국 일극 지배로 돌아가자는 것이거나 둘 중의 하나다. 이 지점에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주창하는 나이는 미국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중국과 ‘전략적 경쟁관계’가 아니라 ‘협력적 경쟁관계’에 서자고 내세운다. 중국의 부상을 막을 수는 없지만 미국은 중국을 관리할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을 가지고 있음을 내세운다. 신냉전은 거부하면서도, 중국을 관리하면서 사실상 미국 일극 지배를 유지하자는 게 나이의 구상이다. 부상하는 중국을 관리하는 강력한 축의 하나가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 유지․보존’이다. 일례를 들면, 2001년 중국을 세계무역기구에 가입시키기는 했지만 비시장경제(NME)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중국을 관리하는 게 여기에 속한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그 나머지는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세계무역기구를 해체하겠다고 나서는 트럼프가 나이에게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최대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다.

2017년 1월 다보스포럼의 역설, ‘시진핑 주석=자유주의 국제질서 옹호자’

아마도, 이른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옹호자들에게 가장 큰 실수는 2017년 1월 ‘소통과 책임의 리더십’이란 주제로 열린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기조연설을 맡기며 그에게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지도자라는 왕관을 씌워준 점일지도 모른다. 불과 1년만에 시진핑이 국가주석 임기를 폐지하며 영구집권을 꾀했으니 ‘자유주의’라는 개념을 그들 스스로 모욕한 꼴이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트럼프의 일방주의와 중상주의가 이런 구체제를 개혁하는 것도 아니다. 실상은 미국의 우세한 협상력을 바탕으로 양자협정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오프쇼어링이 아닌 리쇼어링, 투자자 권리와 노동자 권리를 동등한 지평에 놓기 위한 시도 등 일부의 개혁이 있기는 하지만, 기존 구체제에서 횡행한 거대 기업과 자본의 특권과 기득권 보호는 오히려 더 강화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지난해 9월 합의된 북미자유무역협정의 후신인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은 트럼프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무역합의”라고 치켜세웠음에도, 여전히 결함투성이다. 이를테면 캐나다와 멕시코는 미국 기준에 부합하도록 생물의약품의 데이터 보호 조건을 포함해 특허 조건을 더 엄격하게 해야 했다. 글로벌 디지털 기업들이 컴퓨터 설비를 현지에 두도록 하는 규제를 도입하지 못하게 했고, 데이터와 개인정보의 국경 간 이전에 개입하지 못하는 조항도 들어갔다. 이들 모두 국민국가 권한에 대한 과도한 침해에 해당한다.

비시장경제 포괄하는 ‘다양성’과 ‘상호성’에 입각한 새로운 무역비전 필요

'결함투성이 다자주의' 상징하는 1995년 1월 출범한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 장면. 위키피디아
'결함투성이 다자주의' 상징하는 1995년 1월 출범한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
위키피디아

앙샹레짐도 트럼프도 아니라면, 세계무역의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 ‘다양성’과 ‘상호성’이 핵심이다. 2016년 11월 트럼프가 당선됐을 때 기존 글로벌화에 대한 진지한 반성의 목소리가 도처에서 쏟아졌다. 그런데 지금은 완벽히 사라졌다. 이런 맥락에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옹호 운운은 완벽히 반동(反動)에 해당한다. 그때 시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차분히 생각해 보자. 글로벌 수요는 재화에서 서비스로 이동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서비스는 재화보다 교역의 대상이 되기가 좀 더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서비스 시장의 개방을 확대하라는 것은 서비스의 본질에 역행하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제조업에 필요한 숙련의 강도를 높이면서 기존 오프쇼링(offshoring) 동기를 약화시킨다. 자동화가 여기에 더해질 경우 공급사슬의 리쇼어링(reshoring)이 강화할 수 있다. 트럼프는 이미 나타나고 있던 이런 흐름을 강화시켜 리쇼어링을 촉발하면서 글로벌 가치사슬의 변화를 낳을 것이란 기대를 낳았다. 여기에 더해 중국이 수출 주도에서 국내수요 주도 성장으로 이행할 것이라는 전망됐다. 세계무역의 새로운 비전은 흐름들을 놓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게다가 기존 세계무역기구 규정들은 중국과 같은 나라들을 수용하는 도전적인 과제를 풀어나가는 데 적합하지 않다. 중국의 경제 관행들은 미국이나 유럽 등 서방과는 매우 다르다. 미국과 중국은 지난 1월7~9일 베이징에서 중국의 불공정 무역에 대한 차관급 협상을 벌였다.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 세실리아 말롬스트롬 유럽연합 통상담당 집행위원, 세코 히로시게 일본 경제산업상 등 서방경제 3인방도 1월9일 관련 공동대응 방안을 협의했다. 여기에 논의된 사안에는, 외국기업의 중국 진출 때 중국 합작기업과 기술을 공유하도록 의무화시킨 중국 정부의 규제가 포함된다. 이 규제에 대해 '불공정한 강제기술이전'이라고 부르는 서방경제권의 자극적인 규정과 달리, 세계무역기구의 기존 규정은 이 사안의 정당성을 논하는 데 비집고 들어가지 못한다.

물론 엄청난 연구개발 투자를 하고 있는 중국이 이런 규제를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이를 논외로 치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중국 기업이라면 이런 식의 규제를 받으며 외국에 진출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래의 강력한 경쟁자를 출현시키는 우를 저지르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서방경제권의 경우 사정이 다르다. 실제로 그런 기업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안은 두 측면이 섞여 있다. 핵심 기술을 불법적으로 탈취하려는, 언론에 심심찮게 보도된 중국의 시도들의 연장선에 있다는 인식의 측면이 하나다. 다른 하나는 단기적 이해에 치우친 주주자본주의의 근시안과 관련된다. 여기에 대해선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 이런 강제기술이전 규제에도 중국에 투자하는 외국기업들이 있다면 그것 자체가 자신에게 이롭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리하면 안하면 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미래의 강력한 경쟁자를 스스로 창출하는 어리석은 잘못을 저지르는 기업은 상식적으로 없지 않느냐는 논리다.

강제기술이전 의무 폐지, 중국 불공정무역 개선이 아닌 서방 주주자본주의 폐해 바로잡는 성격도 지녀

하지만 기업 간 경쟁, 단기적 이익에 치중하는 주주자본주의 문제가 걸리면 얘기 달라진다. 경쟁의 문제는, 미국 항공사인 보잉이 중국에 투자를 하지 않더라도 유럽의 에어버스가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제공하는 수요측 요인, 기업들의 단기적인 실적 극대화 추구라는 공급측 요인이 작동한다. 서방 기업에 널리 퍼진 관행이자 제도인 주주자본주의는 공급측 요인에 속한다. 주주자본주의가 낳는 폐해는 단기이익에 치중하는 주주들과 이로부터 본인들의 이득도 챙기는 경영진들에서 비롯한다. 이런 단기적 이해가 미래의 경쟁자를 창출하는, 결국 기업의 장기적 이익을 희생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렇게 보면, 결국 강제기술이전 의무규정 폐지는 규제와 제도를 통해 주주자본주의의 근본 문제에 칼을 대는 성격을 지닌다. 금융기관으로부터 지나친 빚을 내는 것을 방지하는 규제와 비슷한 성격을 지닐 수 있다는 얘기다. 중국의 비시장경제(NME) 문제를 개선하는 것이기는커녕 역으로 서방의 주주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개입이라는 성격을 띠는 셈이다. 상당한 역설이다.

다자협정이든 양자협정이든 현재의 세계무역 시스템은 선진경제의 높은 노동기준을 유지하기 위한 안전판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덤핑(social dumping)’을 예방하거나 발생했을 때 이로부터 구제하는 조치가 없다. 핵심 노동권의 심각한 위반을 통해 생산된 상품의 수입이 급증하는 ‘사회적 덤핑’에 대한 무역구제 장치를 제대로 설계해야 하는 과제가 있는 것이다. 낮은 조세와 약한 규제를 찾아다니는 조세․규제 재정거래를 막는 예방책들도 현재의 세계무역 시스템은 제공하지 못한다. 투자자와 노동자 권리를 동등한 기반 위에 올려놓고 있지도 못함은 물론이다. 새로운 시스템은 투자자의 권리 침해에 대한 판정처럼 ‘권리’ 그 자체에 대한 침해 여부를 기준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라는 개념을 논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의 새로운 비전은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채 울려퍼지는 자유주의 국제질서 유지는 앙샹레짐을 보존하자는 외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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