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진‐하산 프로젝트는 원래 러시아, 남한, 북한의 공동사업이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러시아, 중국, 북한의 공동사업이 돼가고 있어요. 현지에서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이 사업은 북핵 사태로 인한 유엔의 대북 제재 대상에 포함되지도 않는데 왜 이렇게 돼 가는지 모르겠어요.”
동북아 평화․번영을 위한 남북 경제협력, 나아가 동북아 경제협력의 시간이 ‘킬링 타임’이 되고 있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올레그 키리야노프 모스크바대 아시아․아프리카연구소 연구원은 '이코노미21'이 동북아평화협력특별위원장을 맡고 있는 송영길 의원실과 함께 1월10일 주최한 제1회 동북아경협평화포럼에서 한국이 ‘패싱’돼가는 나진‐하산 프로젝트를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프로젝트는 러시아 극동의 국경역인 하산과 북한 나진항을 잇는 54km 구간의 철도 개․보수와 나진항 현대화 등을 통한 물류협력사업이다.
킬링 타임 속에서 커지는 중국의 역할, 작아지는 한국의 역할
‘한국’ 이 ‘중국’으로 대체되고 있는 ‘패싱’의 우려는 임을출 극동문제연구소 북한개발국제협력센터장의 입에서도 나왔다. “단순한 식량 지원만이 아니라 중국은 과학기술 협력을 통해 북한 경제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게다가 최근 9개월 사이에 북한과 중국은 무려 네 차례 정상회담을 했다. 어제 열린 4차 북중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정세관리와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공동 연구․조종에 대한 심도깊은 논의”라는 말까지 나왔다. 북한의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경제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안보 측면에서도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박종철 국제지역연구원장도 ‘투키디데스의 함정과 한반도 평화’라는 제목의 발제문에서 “현재 북‐중 관계는 두 나라가 수교한 이래 최상의 상태에 있다”며 “올해 10월 북‐중 수교 70년을 맞아 중국은 철도와 도로 등 인프라 투자와 이익공유 등 북한에 상당한 경제적 선물을 제공할 것”으로 분석했다. 북한에서 중국의 경제적 역할이 점점 더 커질 것이라는 진단인 셈이다.
한국의 역할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흘러온 경협의 시간 속에서 관심과 기대는 조만간 열릴 예정인 북미 제2차 정상회담기대에 쏠렸다. 임 센터장은 “북핵 사태는 물론 경협의 측면에서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은 분수령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대북제재 완화가 전제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회담이다. 두 나라가 사전조율 했을 것”이라는 진단에서는 ‘분수령이 돼야 한다’는 바람마저 짙게 묻어 있다. 그동안 잃어버린 시간, 지금도 잃어버리고 있는 경협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되찾기 위한 전기가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도 패싱할 수 없어…일본도 관리의 대상
포럼에서 나온 경협을 둘러싼 향후 전망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가장 큰 환경적 변수는 미‐중 무역마찰이 신냉전으로 흘러갈 가능성이다. 특히 올해 하반기 이후 재선에 도전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 견제론을 한층 강하게 내세울 수 있다는 점이 제기됐다. 북핵 사태 협상에서 제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본이 어떻게 나올지도 예의주시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동아시아평화연구원장)는 “일본으로서는 패싱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최근 불거진 광개토함 레이더의 일본 초계기 겨냥 논란 역시 이런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광개토함 대공무기가 일본 초계기를 겨냥하지 않았다는 조종사들의 증언에도 일본이 이런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은 패싱을 간과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한국에게 일본은 ‘패싱’이 아닌 ‘관리’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호사카 교수는 설명했다.
동북아 경제협력의 구체적 전망과 경로에 대한 냉철한 논의도 이어졌다. 정영록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경제학)는 국가 중심의 협력이 아닌 지역 중심의 동북아 경제협력 구상을 밝혔다. 서울을 중심으로 1천㎞ 전후의 동심원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중국 동북3성,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 극동지역을 아우르는 경제협력의 상을 그리는 시즌2를 기획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요 고리는 에너지, 석탄, 철강만이 아니라 이 지역의 소비 수요(여행․관광 등의 서비스)를 한 데 묶는 것이다. 정 교수가 정의하는 동북아 경협 시즌1은 1990년 옛 소련 붕괴 이후 평화 분위기 속에서 일본 주도로 무역과 투자 중심의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성격이 강했다..
단일한 지역협력체 불가능…주도성 확보는 다양한 프로젝트 식 경협 비전과 사업 마련에서
박이택 고려대 경제연구소 연구교수는 “동북아에서 열강의 대립구도를 감안할 때 하나의 유럽연합과 같은 하나의 경제협력체나 단일시장이 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항구적이고 포괄적인 경협이 아니라 국가 대 국가만이 아니라 국가 대 지역(동북3성), 지역 대 지역 차원의 다양한 프로젝트 식 경협을 추진할 필요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 속에서 한국의 주도성은 누구도 자기중심의 통합적인 경제협력체를 창출할 수 없는 동북아 구도를 활용하여 경협의 비전과 다양한 협력사업을 개발하고 창출하는 역량을 발휘하면서 확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를 위해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10개국이 이 지역의 경협에서 주도성을 발휘하는 사례를 차분히 분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북아 평화와 경협의 주도성에 김상순 동아시아평화연구원 이사장은 “사실 여부를 떠나 우리는 2017년 ‘코리아 패싱’의 강박관념이 2018년 ‘차이나 패싱’으로 바뀌는 상황을 경험하기도 했다”며 “어느 나라를 실제로 패싱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패싱론이 나오는 것은 역할론 부재의 방증일 뿐”이라고 밝혔다. 한국이 수행하는 역할을 상황에 맞게 끊임없이 장교하게 가다듬는 과정에서 주도성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코노미21의 병설 연구원인 동아시아평화연구원 창립 기념을 겸하여 열린 이번 포럼의 주관자로서 김 이사장은 이번 포럼을 시작으로 “동북아 각 지역에서 초국경포럼을 열어 각국과 지역의 공동의 이해와 공감을 넓힐 것”이라며 “이를 통해 국가 대 국가, 국가 대 지역, 지역 대 지역 차원의 구체적 프로젝트로서의 경협 방안 개발, 현재 진행 중인 경협 프로젝트들의 진전을 위한 제안 등을 벌여나가겠다”고 향후 활동방향을 밝혔다. 이번 창립기념 포럼에는 100여명의 전문가와 시민들이 참여했다. 현재 동평원은 약 80명의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몽고, 인도, 베트남, 타이, 싱가포르, 말레이시, 대만 출신 학자와 전문가들이 회원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