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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미국 일방제재 우회 위한 자체 금융결제채널 ‘인스텍스’ 구축
유럽, 미국 일방제재 우회 위한 자체 금융결제채널 ‘인스텍스’ 구축
  • 조준상 선임기자
  • 승인 2019.02.07 11: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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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의약품․의료장비 등 이란과 인도적 거래에 한정
노드스트림2 가스관 사업 제재시 대상 확대될 가능성 충분

유럽이 마침내 미국의 통제 아래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금융 청산결제시스템을 구축했다.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연합 3국은 지난 1월31일 미국의 대이란 제재를 우회하기 위한 금융 청산․결제 채널인 인스텍스(INSTEX; Instrument in Support of Trade Exchanges)를 창출했다고 발표했다.

페데리카 모데리니 유럽연합 외교․안보 고위대표와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 장 이브 르드리앙 프랑스 외무장관, 제레미 헌트 영국 외무장관은 이날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있는 브뤼셸에서 각각 기자회견을 열어 인스텍스 출범을 선언했다. 지난해 9월 우회 청산․결제를 위한 ‘특수목적기구’(SPV)를 구축하겠다고 밝힌 지 넉달 만이다.

프랑스, 영국, 독일 외무장관(왼쪽부터)이 지난 1월31일 브뤼셸에서 대이란 제재를 우회하는 결제채널인 인스텍스 구축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 유로뉴스 캡처.
프랑스, 영국, 독일 외무장관(왼쪽부터)이 지난 1월31일 브뤼셸에서
대이란 제재를 우회하는 결제채널인 인스텍스 구축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 유로뉴스 캡처.

인스텍스 구축 선언은 미국의 대이란 제재 재도입에 대해 유럽이 취한 가장 구체적인 조치를 상징한다. 미국은 2015년 이란핵합의(포괄적공동행동계획; JCPoA)에서 지난해 5월 이탈, 같은해 8월 귀금속․알루미늄․컴퓨터소프트웨어 품목 등에 대한 1차 제재, 11월 석유․가스․운송․금융 등에 대한 2차 제재 등을 재도입했다. 1차 제재와 동시에 유럽연합은 이란과 합법적으로 거래하는 유럽연합 기업들의 불이익을 회복하고, 미국의 제재에 따르는 유럽연합 기업들에 대해 역으로 제재하기 위해 1996년 미국의 대쿠바 제재 당시 마련했던 ‘대항입법’(blocking statute)을 즉시 재발동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토탈이나 머스크, 푸조, 다임러 등과 같은 유럽 기업들이 미국 지배하는 금융결제네트워크로부터 자유롭지 않을뿐더러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 자체를 차단당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미국 통제 결제네트워크 스위프트 우회…시작은 미약

미국이 금융제재를 부과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금융결제네트워크는 스위프트(SWIFT; Society for Worldwide Interbank Financial Telecommunication)이다. 전 세계 200여개 나라, 금융기관 1만1천개를 포괄하고 있는데, 본부가 벨기에에 있는 스위프트 이사회에는 미국 법의 적용을 받는 미국 금융기관들이 파견하는 이사들을 포함한다. 또한, 미국 국가안전국(NSA) 등이 스위프트를 통해 이뤄지는 유럽연합 회원국 간 거래를 가로챌 수 있다는 사실이 2012년 2월 폭로되는 등 사실상 미국의 통제 아래 놓여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스텍스 개념도
인스텍스 개념도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은 인스텍스 출범이 미국의 이탈과 대이란 제재로 위기에 놓인 이란핵합의를 유지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인스텍스는) 유럽의 전략적 안보이해에 봉사한다고 우리는 굳게 확신한다. 우리는 이란이 핵합의에서 벗어나 우라늄 농축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인스텍스는 제약회사들과 농업회사들이 미국의 제재와 보복을 두려워해 이란과 사업을 중단했거나 중단을 검토하고 있는 상황을 개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본부는 파리에 있고 영국을 의장으로 하는 감독위원회가 운영을 책임지고, 코메르츠방크 출신의 독일 금융전문가가 대표를 맡을 예정이다. 이란도 감독위원회에 참여한다.

인스텍스의 전망에 대해서는 엇갈린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용하려는 기업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많은 편이다. 미국이 ‘미국이냐 이란이냐?’는 식의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는 상황에서 거대한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기업이 많겠냐는 이유에서다.

달러 패권 붕괴의 시작을 알리는 ‘작은 시도’ 가능성 배제 어려워

하지만 인스텍스는 점점 확대될 가능성이 높은, 미국 트럼프 행정부 아래에서 점점 확대가 불가피한 ‘작은 한 걸음’이라는 분석도 만만찮게 나오고 있다. 초반에는 미국 시장에 크게 노출돼 있는 대기업들의 참여가 저조할 수 있지만, 미국 시장과 관계가 없는 중소기업들은 충분히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이를테면 이란에 대한 의료장비․기기 수출에 관심이 많은 폴란드 중소기업들이 여기에 속한다.

나아가, 식량․의약품․의료장비와 의료기기 등 인도적 거래에만 한정돼 있는 제약을 유럽연합 스스로 벗어나는 건 시간문제라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값싸게 들여오는 노르드스트림2 가스관 건설사업에 대한 미국의 반발 등 지정학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르드스트림2 사업에 참여하는 유럽 기업들에 대해 미국이 제재를 가하면 이에 대한 반발로 인스텍스 확대가 탄력을 받을 가능성은 충분하다(http://www.economy21.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5938). 이는 인스텍스가 달러 패권 붕괴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시각과 관련된다. 인스텍스 출범에 대한 이란의 공식 반응은 “유럽 쪽이 취한 최초의 조치 … 우리는 모든 재화와 품목을 포괄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중동부 유럽국들의 경우 이란산 원유의 수입은 러시아에 대한 지나친 에너지 의존을 줄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스위프트를 우회하려는 움직임은 인스텍스에만 그치지 않고 있다. 지난 1월23일 스위스와 이란은 두 나라의 무역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금융 청산․결제소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이는 인스텍스와는 별개라고 설명했다. 이란 국영통신사인 IRNA에 따르면, 두 나라 공동상공회의소 의장인 샤리프 네잠 마피는 인도, 중국, 한국 등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는 나라들과 거래를 원활하게 위한 별도 청산․결제소를 준비하고 있다.

인스텍스의 출범은 미국이 베네수엘라에 가한 초법적인 금융제재와 시기적으로 묘하게 맞물려 있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는 대통령 선거 결과 불복 사태를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에서 현 권력에 대한 쿠데타를 공개적으로 사주하는 한편,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의 금 지급준비금을 합법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차단하려고 시도했다.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은 2012년 12월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 은행과 다른 중앙은행들에 보관된 금 준비금 12억달러 중 일부를 결제에 충당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운송할 것을 요청했다. 용도는 베네수엘라 외환보유액 80억달러의 일부인 금 준비금으로 식량 구입, 칠레와 러시아 등 채권 보유자에 대한 상환 등으로 알려졌다. 베네수엘라의 금 수출을 봉쇄한 미국의 제재를 우회하기 위해 식량 구입 등과 금 준비금을 맞교환하려는 것이었다.

블룸버그통신의 보도를 보면, 백악관 존 볼튼과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는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에 압력을 넣어 잉글랜드 은행과 접촉하지 말라고 압박했다. 은행으로 따지면 결제에 충당하기 위한 합법적 예금 인출의 봉쇄에 해당하는 셈이다. 로이터통신이 확인한 바로는,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은 12억2천만달러 상당의 금 29톤을 맞교환하려고 했는데, 아랍에미리리트연합에 3톤을 운송했고 또 다른 15톤이 결제를 위해 2월1일 선박에 실려 다른 나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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