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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 수빅조선소 기업회생에 깃든 필리핀의 고민
한진중공업 수빅조선소 기업회생에 깃든 필리핀의 고민
  • 조준상 선임기자
  • 승인 2019.02.28 14: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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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업체 2곳 인수 타진에 필리핀 채권은행 5곳 출자전환 참여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등 국가안보적 우려 크게 작용한 듯

앞으로 한진중공업 지분의 20% 남짓은 필리핀 은행들의 몫이다. 지난 2월14일 국내․외 채권단 사이에서 합의된 한진중공업 기업회생 내용을 보면, 리잘상업은행그룹, 랜드뱅크오브필리핀 등 필리핀 채권은행 5곳은 한진중공업 자회사인 수빅 조선소에 대한 보증채무 4억1200만 달러(약 4600억원) 중 1억5천만 달러(약 1670억원)를 한진중공업 지분으로 대체하고 나머지 금액은 수빅 조선소 지분가치로 돌렸다.

기업회생 방안이 모두 적용되면 약 20%에 해당하는 지분률이다. 적용되는 내용은 △조남호 한진중공업홀딩스 회장 및 특수관계자(지난해 3·4분기 기준 31.67%) 지분의 전부 무상감자 △소액주주 지분의 60% 이상 무상감자 △산업은행을 비롯한 국내 채권단 전체 채권 중 70% 출자전환-30%(약 2천억원) 채권 유지 등이다.

한진중공업 현지법인 수빅조선소를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자료: https://www.shipyards.gr/shipyards/new-buildings/newbuilding-farest-pacific-ocean/newbuilding-Far-East-China/philippines/hanjin-heavy-industries-subic-bay-shipyard-hhic-phil)
한진중공업 현지법인 수빅조선소를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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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의 필리핀 현지법인 겸 자회사인 수빅 조선소는 조선업 불황 등으로 3년 연속 적자 누적됐다. 줄어들고는 있었지만 2016년 1820억원, 2017년 2335억원에 이어 지난해에도 약 1천억원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지난 1월8일 현지 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법원은 일주일 뒤인 15일 법정관리 개시를 결정했다. 한진중공업은 2월13일 수빅 조선소 부실을 연결재무제표에 반영하면서 완전자본잠식 상태에 빠졌다고 공시했고, 한국거래소는 즉시 주식거래를 정지시켰다.

한진중공업의 국내․외 채권단 간 합의가 이뤄진 것은 수빅 조선소 법정관리가 결정되고 나서 한 달 만이다. 속도로 치면 꽤 빠른 편이다. 그럴 만하다. 채권단 간 합의 지연으로 주식거래 정지 상태가 오래 계속되면 기업가치는 계속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정도 한 몫 한다. 게다가 화물선과 컨테이너선, 탱커(원유 운반선), 액화천연가스 운반선 등 초대형 선박을 주로 건조하던 수빅 조선소를 빼면 한진중공업의 경영 정상화가 상당히 진전돼 왔던 터다. 한진중공업은 2016년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맺고 2500억원의 신규자금, 2000억원의 보증지원을 받은 뒤 지난해 729억원 등 3년 연속 흑자를 기록해 왔다.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겪는 속에서 중국 조선업체 인수 움직임 부담

하지만 이런 요인에 더해 한때 미국 세계 최대의 미군 해군기지가 있었던 수빅 조선소가 상징하는 필리핀의 국가안보적 측면을 빼놓기는 어려울 듯하다. 특히 수빅 조선소가 법정관리를 신청한 직후 중국 조선업체 2곳에서 수빅 조선소 인수 의향을 밝혀 왔다. 이름이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1곳은 중국 굴지의 국영 조선업체였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필리핀에 알려진 시기는 1월11일이다. 수빅 조선소에서 필리핀 정부에 투자자 물색을 요청했고, 이미 중국 조선업체들이 인수에 관심을 보였다고 수빅 조선소 이사회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필리핀과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스프래틀리 제도의 팡가니방 산호초와 스카보로 숄(중국명 황옌다오) 등을 둘러싸고 영유권 분쟁을 겪고 있고 있다. 2016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필리핀 정부가 남중국해 대부분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 주장이 법적 근거가 없다는 승소 판결을 이끌어냈음에도, 중국은 이를 무시해 왔다. 그 뒤 친중국 성향을 보여 온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이 문제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잠복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조선업체가 수빅 조선소 인수에 나섰다고 하니 파장은 상당했다. 대통령의 소극적인 태도가 못 미더워서였는지 필리핀 국방장관 델핀 로렌자나는 1월25일 대통령을 만나 필리핀 해군이 수빅 조선소를 인수하는 방안을 논의했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수빅 조선소 부지의 소유권이 필리핀 정부에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중국 조선업체가 수빅 조선소를 인수하는 것에 대한 경계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로렌자나 장관은 지난해 기자회견에서 1951년 체결한 미국‐필리핀 상호방위조약을 재검토할 수 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중국과 영유권 분쟁 상황에서 미국이 동맹국으로서 유사시에 헌신할 것인지가 매우 모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중국기업, 호주 중북부 다윈항 운영…영유권 분쟁 없어 필리핀과 사정 달라

수빅 조선소를 중국 조선업체가 인수하는 것에 대한 필리핀의 국가안보적 우려가 과장됐다는 지적도 있다. 중국 기업이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중앙에 있는 다윈 항구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것이 중국 함정이 여기에 기항할 수 있다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국과 호주가 영유권 분쟁을 겪고 있지 않다는 사정을 감안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필리핀의 사정으로서는 안보적 측면을 제쳐놓고 상업적 거래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얘기다.

필리핀 은행 5곳이 보증채무의 출자전환을 통해 한진중공업 지분 약 20%, 수빅 조선소에 대한 지분을 확보하는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필리핀 정부의 이런 국가안보적 우려가 상당 부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채권단의 출자전환 합의 직후 로렌자나 국방장관은 “수빅 조선소를 인수하면 필리핀도 대형선박 건조가 가능해진다. 수빅을 필리핀 해군 소속으로 둘 것이며 대통령과 이에 대해 공감을 이뤘다”고 말한 것도 이런 상황과 관련된다. 한진중공업과 수빅 조선소에 대한 필리핀 채권은행들의 지분은 결국 필리핀 정부의 지분과 같다고 봐도 무방한 대목이다.

1992년까지 미국 해군기지가 있었던 수빅 조선소는 필리핀 수빅만 경제구역 90만평 부지에 2004년 건립됐다. 2006년부터 선박 건조를 본격화해 600t 규모 골리안 크레인 4기와 자동화시설 등 최첨단 설비를 갖췄고 조립량은 연간 약 60만톤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소다. 지금까지 설비투자액은 23억달러에 이르고 현재 직원은 4천명 정도다. 화물선과 컨테이너선, 버크 운반선, 액화천연가스 운반선, 초대형 원유 운반선(VLCC), 초대형 원석 운반선(VLOC) 등 대형, 초대형 선박을 건조했다. 2016년 말 수주잔량은 25척, 2017년 말 16척, 2018년 말 10척이었다. 반면 부산 영도조선소는 첨단기술이 적용된 연구선이나 군함 등 특수선을 주로 건조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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