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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인수협상에 비춰본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
기업 인수협상에 비춰본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
  • 조준상 선임기자
  • 승인 2019.03.06 1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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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강 핵시설=숨겨놓은 부채…핵 포기 않겠다는 게 아닌 전술적 협상카드 성격
미국의 모든 탄도미사일 폐기 요구, 북한 미사일 사거리까지 의제라는 얘기?

기업을 인수하려는 쪽과 매각하려는 쪽의 줄다리기는 팽팽하다. 인수하려는 쪽은 가격을 깎기 위해 철저하게 대상 기업을 실사한다. 재무제표를 샅샅이 검토하고 현장을 방문해 살펴본다. 매출채권은 정확한지, 매출액이 부풀려 있는 건 아닌지 등을 점검한다. 특히 숨겨놓은 부채가 있는지, 현실화 가능성이 높은 우발채무는 없는지 등을 면밀히 따진다. 이를 통해 인수가격을 최대한 낮추려고 한다. 파는 쪽에서는 인수자의 질문과 물음에 정확하게 답변해야 한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숨겨놓은 부채가 들통이라도 나는 날에는 제값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걸 각오해야 한다.

‘빈손’으로 끝난 지난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제2차 정상회담을 보며 기업 인수를 둘러싼 팽팽한 줄다리기가 생각났다. 미국이 영변 이외의 분강 핵시설을 찾아낸 것은 파는 쪽에서 숨겨둔 부채를 추적해 발견한 것에 해당한다. 트럼프의 말처럼 북한이 매우 놀란 것은 당연했다. 이에 비춰보면 스티브 비건 국무부 북핵특사와 김혁철 국무위 대미특별대표 간의 실무회담에서 이런 얘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던 듯하다.

하노이 회담에서 미국과 북한 정상 사이에서 정확하게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 파악하는 게 한국에게 매우 중요해 보인다.

하노이 회담에서 미국과 북한 정상 사이에서
정확하게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 파악하는 게
한국에게 매우 중요해 보인다.

어쨌든 이번 북미 정상회담은 일괄타결이든 점진적 타결이든 지난해 6․12 싱가포르 선언을 기반으로 한반도 비핵화의 로드맵에 합의하는 게 목표였다. 당연히 북한이 보유한 핵에 대해 그것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든, 전략핵과 전술핵으로 나누든 범주를 구분하고, 그것의 폐기에 상응하는 보상과 대가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얼개를 짜는 게 핵심이었다.

굳이 범주를 적용하자면 영변 이외의 분강 핵시설은 미래 핵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이것을 뒷주머니에 숨겨두고 있던 게다. 그걸 샅샅이 뒤져서 미국은 찾아냈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의 완전 폐기를 대가로 사실상 대부분의 제재 해제를 요구했다는 미국 쪽 설명을 들으면, 협상이 더 이상 진전될 가능성은 없다. 영변 핵시설은 미래 핵의 상징이었는데, 이것 이외에 미래 핵이 더 있다는 게 들킨 이상 북한의 협상전략은 산통이 깨진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의 제재 해제 요구 강도가 너무 지나쳤다는 것은 곁가지다. 오히려 핵심은 숨겨둔 미래 핵이 추가 발견된 데 있다. ‘솔직히 다 말해라, 숨겨서는 안 된다’는 트럼프의 말이 정곡을 찌르고 있는 셈이다. 숨겨진 부채가 발견되면서 북한이 내세운 가격은 수용될 수 없게 돼버렸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인수 협상 자체가 완전히 깨지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이다. 미국으로서나 북한으로서나 서로 사발을 깨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 이란 핵합의 파기에 이어 북한 핵 협상까지 깨지면 트럼프는 거래의 기술을 지닌 ‘협상의 달인’이 아니라 ‘판 깨기 달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 핵-경제 병진노선의 폐기와 ‘경제 올인’을 여러 차례 되풀이해 천명한 북한으로서도 과거로 돌아가기는 매우 어렵다. 서로가 놓인 상황과 조건을 알고 있기에 사발이 깨지는 데까지 가지는 않았던 듯싶다.

여기에 더해 미국이 북한의 ‘경제 올인’에 대한 의지와 진정성을 의심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았을 수 있다. 분강 핵시설이 상징하는 또 하나의 미래 핵을 감춰놓은 것은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전략적’ 의도가 아니라 협상용 카드로 사용하겠다는 ‘전술적’ 의도로 미국이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실제로 김정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도 시험하지도 않고 사용하지도 전파하지 않을 것”이라는 ‘4불 선언’까지 이미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상태다. 결과적으로 지금 상황은 기업 인수 협상에서 새로 발견된 부채는 의도적으로 숨기려 한 게 아니라 어떤 실수나 내부비리에 따른 것이라는 설명을 받아들여 인수 협상이 깨지지 않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하지만 존 볼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하노이 정상회담 이후 밝히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매우 당황스러운 지점이 있다. 그는 북한에 일괄타결 문서를 전달했다며 여러 차례에 걸쳐 ‘생화학무기를 포함한 모든 대량살상무기와 모든 탄도미사일을 포기하라’고 북한에 요구했다고 말했다. 냉정히 말해 로켓을 추진력으로 하는 탄도미사일은 사정거리 6400㎞ 이상의 대륙간탄도탄(ICBM)에서부터 800㎞ 이하의 단거리탄도탄까지 천차만별이다. 우리나라의 ‘현무’도 탄도미사일이다. 생화학무기는 그 자체로 또 다른 범주다.

사실상 볼튼의 이런 식의 얘기는 북한의 미사일 사거리를 얼마로 해야 할지까지 의제로 올려야 한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북한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모르겠다. 문제의 핵심은 핵탄두의 해체이다. 핵탄두와 여기에 필요한 핵물질을 근원적으로 제거하면 로켓은 그저 로켓일 뿐이다. 북한이 비군사용 로켓을 만드는 산업을 육성해 남한 등에 수출하겠다고 한다면 이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우주시대를 준비하며 비군사용 로켓 개발에 공을 들이고 있다.

미국이 하노이 회담에서 북한에 제시했다는 일괄타결 제안이 미사일 사거리까지 사실상 제한하는 식의 이런 내용까지 담는 것이었다면, 비핵화 협상은 상당한 기간 동안 장기표류가 불가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하노이에서 어떤 얘기가 서로 오갔는지에 대한 정확한 실상 파악이 중요한 대목이다. 김혁철 대미특별대표와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을 판문점에서 만나 설명을 들어야 한다는 제안이 중요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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