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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개혁 위한 사회적 논의 더 치열해야 한다!
국민연금 개혁 위한 사회적 논의 더 치열해야 한다!
  • 이재섭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사회복지위원장, 공적연금개혁대책위원장
  • 승인 2019.07.02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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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국민연금 개혁 논의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정부는 2018년 12월, 4개의 개혁 대안을 포함하는 ‘국민연금종합운영계획’을 발표하고 국회에 보고했다. 아울러 국민연금 개혁 방안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해 사회구성원 간의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우리에게 비교적 생소한 ‘사회적 대화’ 추진을 약속했다. 이에 따라 작년 11월부터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국민연금개혁과 노후소득보장특별위원회(이하 연금특위)’에서 개혁 논의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6개월로 정해진 1차 논의 시한이 4월 말에 끝나면 필요시 7월까지 3개월을 더 연장할 수 있다. 과거 정부와 달리 현 정부는 국민연금 개혁을 위해 하나의 제도 개선안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제시하지도 않았고, 예전과 같이 제도 개선 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안하는 대신에 ‘사회적 논의’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도록 하였다.

이를 두고 많은 언론과 학자들은 정부의 책임 회피성 폭탄 돌리기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필자는 견해를 달리한다. 현재 국민연금이 지니고 있는 이슈의 방대함과 폭발성, 그리고 이슈 간 이해 대립의 정도에 비추어 볼 때, 사회적 대화 방식의 연금 개혁 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산업부문의 대표적 이해집단인 노동자와 경영자 대표는 물론, 세대별, 성별, 업종별 대표들이 참여하는 심층 논의 과정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지상에 피력한 바가 있다. 하지만 사회적 논의가 하나의 절차적 요식 행위로만 끝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반드시 내실 있게 진행되어 의미 있는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연금 개혁 과정에서 사회적 대화가 갖는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 새겨보며, 지금까지의 개혁 논의 진행 사항을 평가해 보고, 성공적인 사회적 타협에 이르기 위해 보완해야 할 점들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사회적 대화와 타협, 왜 필요하고 중요한가?

사회적 대화의 성공을 담보하려면 먼저 ‘우리나라 국민연금 개혁에서 왜 사회적 논의 과정이 절실히 필요한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적 논의 참여자들의 경각심과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관심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연금 개혁 과정에서 사회적 논의가 왜 필요한지는 첫째, 개혁 논의에서 다뤄야할 이슈들의 방대성, 둘째, 개혁 전략의 다양성, 셋째, 이해관계의 복잡성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개혁 이슈들이 얼마나 방대한지 살펴보자. 하나하나 열거해보면, ‘지나치게 넓은 연금 사각지대 문제’, ‘용돈 수준의 불충분한 연금 문제’, ‘세대 간의 형평성 문제’, ‘재정 불안정성 문제’, ‘연금기금 보유 수준과 운용 방법의 문제’,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간의 역할 중복 문제’, ‘사적연금의 부실 문제’, ‘공적연금 제도 간의 차별 문제’ 등 무수히 많다. 더 큰 어려움은 이런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개혁 전략들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전략 선택의 어려움을 가늠해 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 연금 개혁 전략으로는 모수(某數) 개혁과 근본(根本) 개혁을 꼽을 수 있다. 모수 개혁은 보험료율이나 소득대체율, 연금 개시 연령 같은 변수들을 조정하는 개혁 방식이다. 근본 개혁은 지난 제도의 구조를 바꾸거나 급여 결정 방식 또는 재정 운영 방식 등 핵심 운영 원리를 바꾸는 개혁 방식이다. 예를 들어 2007년 연금 개혁에서 ‘국민연금’ 단층 제도를 ‘국민연금’과 ‘기초노령연금’의 복층 체제로 바꾼 것은 구조 개혁을 수행한 것이다. 또한 확정급여 방식(급여 수준을 정해놓고 보험료를 걷는 방식)을 확정기여 방식(보험료 수준을 정해놓고 보험료 운영 실적에 따라 급여가 정해지는 방식)으로 바꾸거나, 재정운영 방식에서 적립 방식을 부과 방식으로 바꾸는 것도 중요한 운영 원리를 바꾸는 근본 개혁에 해당한다. 만약에 국민연금과 공무원연금을 통합하는 방식의 개혁을 추진한다면, 이는 구조적 개혁을 통한 근본 개혁 전략을 채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연금 제도 간의 형평성을 추구하는 전략, 제도의 보편성을 높이는 전략, 저소득자들의 최소연금을 보장하는 전략, 사적연금을 강화하는 전략 등도 개혁의 유용한 전략들이다. 어떤 개혁이 더 효과적이고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할 전략인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국민들의 집단 간, 계층 간 이해가 복잡하게 대립되는 상황을 살펴보면 개혁 논의 과정이 어떤 모습으로 진행돼야 하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가장 우선시되는 것이 경제 운영의 핵심 주체인 경영자(고용주)와 근로자(피고용자)간 비용부담에 대한 이해 충돌이다. 같은 경영자이지만 소상공인(영세자영업자)들의 이해는 경영자보다는 피용자 측에 가깝다. 또한 공적연금 제도는 현 근로 세대가 노인 세대를 부양하면서 향후에는 미래 세대로부터 부양을 받는 세대 간 부양 원리로 운영된다. 따라서 세대 간에 이해가 충돌할 소지가 많다.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 제도를 운영하느냐에 따라 갈등 요인이 되기도 하고 연대 의식을 높이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또한 공적연금 상호 간 급여 수준의 차이에 따른 형평성과 차별 논란은 우리나라 공적연금 개혁 논의에서 반복되는 가장 심각한 갈등 요인 중의 하나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공적연금 개혁에 부과된 이슈들이 얼마나 다루기 어려운 문제들로 가득 차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문제는 이렇게 방대한 의제들과 복잡한 이해관계들을 단칼에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는 자칫 문제를 더 심화시키고 사회갈등을 크게 유발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여러 중한 질병들을 함께 앓고 있는 환자를 수술 한번으로 완치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의사가 있다면 그는 사이비 의사일 것이다. 그런 시도는 자칫 귀중한 생명을 해칠 우려가 있다. 어려운 과제는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빠른 길이다. 다시 말하면 국민연금 개혁 같은 갈등적 이슈들은 제대로 된 사회적 대화와 타협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의 문제 분석과 대안에만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정파적 이해가 앞서는 정치인들에게 과도하게 의존하다가는 중요한 논의 과정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의 연구 분석 자료와 개혁 대안들을 기초로 하되 다양한 이해집단들이 충분히 의견을 발표하고, 학습하고, 토론하여 이견을 좁혀나가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주요 쟁점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개혁 방향과 원칙에 접근할 수 있도록 타협해야 한다. 그 과정이 사회적 대화이고 그렇게 이루어진 합의가 사회적 타협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적 타협안을 사회구성원들 모두가 존중하여 입법을 하게 될 때, 최선의 개혁이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년부터 지금까지 국민연금 개혁 논의는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살펴보자.

과거 사례에 비춰본 ‘이번 국민연금 개혁 논의’의 진행 과정에 대한 평가

왜 이번 개혁에서는 정부가 ‘국민연금제도발전위원회’의 건의를 바로 정부입법으로 만들어 국회에 제출하지 않았을까? 한마디로 ‘국민연금제도발전위원회(이하 제도발전위원회)’의 제도 개선 건의안은 그 내용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바로 정부의 개혁 대안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태생적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도발전위원회가 여러 공사연금 중 국민연금과 기초연금만을 관장하는 보건복지부 장관 산하의 한시적 비상설기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도발전위원회의 구성이나 의제 선정, 토의 방식, 허용된 논의 시간, 의사 결정이나 회의 내용의 투명성 확보 등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번에 다루어야 할 개혁 논의의 범위는 보건복지부 장관의 관할을 넘는 영역이어야 한다는 게 문재인 정부의 기본 시각으로 보인다.

지속되는 심각한 노후빈곤과 노인 자살 실태를 직시한다면 연금개혁 논의가 국민연금에 한정되지 않고 다른 공적연금을 포함한 노후소득보장 제도 전반을 포괄해야 하는 것이 맞다. 제 공적연금들은 물론 퇴직연금 등 사적연금까지 포괄한 폭넓은 개혁 논의를 해야 지속가능한 노후소득보장 제도를 마련할 수가 있게 된다. 그런데 보건복지부 장관 산하의 제도발전위원회는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을 넘어서는 영역까지 다룰 책임이나 권한이 없다. 따라서 대통령 직속 상설 자문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연금특위’에 사회적 논의를 부친 것은 국민연금 개혁에 국한하지 말고 의제와 전략에 제한 없이 노후소득보장 논의를 하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게 옳을 것이다.

아울러 문재인 대통령은 작년 8월 청와대 수석회의에서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국민과 함께 충분히 논의하여 기초연금과 퇴직연금까지 포함한 개혁 논의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와 함께 대통령의 관련 지시들을 살펴보면, 국민연금 개혁 논의의 방향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정부 관료들과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는 모든 논의의 주체들이 여기에 걸 맞는 방향성과 책임 의식을 가지고 사회적 대화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선행돼야 할 것은 논의의 주제와 개혁 전략에 어떤 제약도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개혁 논의의 범위에 공무원연금 등 특수직역연금을 포함하는 것, 개혁 전략에 제도 간 통합을 포함한 구조 개혁이나 근본 개혁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노후빈곤과 연금격차, 그리고 세대 간 갈등의 엄혹한 실상을 해소하고 사회적 연대라는 공적연금 본래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근본 개혁과 구조 개혁을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것만이 풀리지 않는 문제들의 실마리를 풀어 재조합하여 난제들을 해결해나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제, 사회적 논의 기구를 설치한 곳의 위치가 갖는 의미를 살펴보자. 문재인 정부는 국민연금 개혁의 사회적 대화 기구를 2015년 공무원연금 개혁의 경우와 달리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 설치하지 않았다.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에 설치하였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사회적 대 타협을 이룬다 해도 나중에 국회에서 다시 논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복잡한 개혁의 경로를 선택했다. 왜일까? 그것은 사회적 논의 기구가 이미 대통령 직속에 상설로 설치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개혁 과정과 대통령 지시 사항 등을 반추해 보면, 대통령이 직접 관심을 가지고 노후소득보장 문제를 제대로 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2015년 공무원연금 개혁의 현장에서 국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논의를 지켜보며, 그것의 장·단점과 한계를 잘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지난 2015년의 공무원연금 개혁 논의는 국회에 두 개의 특별 논의 기구를 설치하여 수행했다. 초기의 개혁 논의는 정부가 주도했지만 본격적인 개혁 논의는 국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국회 내에 여·야 국회의원 14명으로 ‘공무원연금개혁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와 동시에 여·야 국회의원, 시민단체, 공무원단체, 정부부처 대표 및 연금전문가 등 20명으로 구성된 ‘공무원연금 개혁을 위한 대타협기구’를 구성하여 사회적 논의를 시도하였다.

당시 국회에서 개혁 논의를 주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과거 정부 주도의 공무원연금 개혁들이 연금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공무원들의 셀프 개혁으로 왜곡되었다는 비판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회를 중심으로 한 논의 역시 한계를 보였다. 정부·여당의 과도한 성과 욕심과 국회 정치 일정에 개혁 논의를 맞추려는 정치인들의 시도 때문에 120일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논의를 마치고 개혁안을 도출하려는 무리를 두었다. 개혁 작업이 끝나자 관계자들은 우리나라 연금 개혁의 역사에 기록될 ‘사회적 대타협에 의한 개혁’을 이뤘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극히 짧은 기간에 정치인들의 힘으로 밀어붙인 타결을 ‘사회적 논의에 의한 타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이다.

충분한 사회적 논의를 거치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를 살펴보자. 공무원단체에서 강력히 요구해서 관철한 ‘공무원연금 삭감비용을 국민연금 사각지대 해소에 지원한다’는 합의와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로 상향 조정’한다는 합의는 합의 주체들 간 해석이 분분한 채 이행이 되지 않거나 아직도 혼선만 빚고 있다. 더 과거로 돌아가 국회를 중심으로 논의되고 종결된 2007년 국민연금 개혁도 지금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예를 들면, 기초노령연금의 소득대체율을 점진적으로 2028년까지 10%까지 인상한다는 합의와 ‘연금제도개선위원회’를 국회에 설치해서 다양한 후속 논의를 추진한다는 합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민연금 가입기간에 따른 기초연금 삭감도 이 합의에 따른 것이라고 아전인수 격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국회를 중심으로 진행하는 연금개혁 논의는 정치적 일정에 휘둘려 충분한 사회적 논의를 진행하기 어렵거나 정당과 정치인들의 이해에 휘둘려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나라 현실이다.

이렇게 볼 때, 2007년 국민연금 개혁처럼 국회를 중심으로 한 정당 간의 협상이나 2015년 공무원연금 개혁처럼 국회의 특별 기구를 통한 논의 형식을 ‘사회적 대화’나 ‘사회적 타협’의 바람직한 모델로 여기는 데는 문제가 있다. 오히려 그런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지금처럼 독립적인 대타협기구에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자율적인 논의 과정을 거친다면 매우 의미 있는 타협의 성과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번처럼 독립성이 강한 사회적 대타협기구를 통해 사회적 대화를 진행하기만 하면 국민연금의 제반 현안들을 해결할 좋은 개혁안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일까? ‘사회적 논의’가 실질적으로 좋은 성과를 내려면 어떤 조건들이 필요할까?

사회적 대화의 성공을 담보하려면 먼저 ‘우리나라 국민연금 개혁에서 왜 사회적 논의 과정이 절실히 필요한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2018년 8월 17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앞에서 열린 ‘국민연금 제도 개선 방향에 관한 공청회’. 사진=보건복지부
사회적 대화의 성공을 담보하려면 먼저 ‘우리나라 국민연금 개혁에서 왜 사회적 논의 과정이 절실히 필요한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2018년 8월 17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앞에서 열린 ‘국민연금 제도 개선 방향에 관한 공청회’. 사진=보건복지부

선진국에서 연금 개혁 성공의 열쇄였던 ‘인내하는 사회적 대화’

선진국들의 예를 들어보자. 필자는 ‘국민연금 개혁의 정치’를 주제로 논문을 쓰면서 선진복지국가 공적연금 개혁의 성공과 실패의 사례를 많이 접하였다. 복지국가의 황금기를 거친 서구 복지국가들은 과도한 복지에 대한 위기를 느껴 1980년대 이후 너도나도 급여 삭감 개혁을 추진하였다. 제도 가입자들은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그 와중에 정년을 1~2년 연장하는 정도의 연금 개혁을 시도하다가 좌초한 경우들도 있고, 새로운 제도 도입 등 어려운 구조 개혁을 국민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성공시킨 사례들도 있다. 연금 개혁에 실패한 경우를 보면 대개 개혁의 당위성만 믿고 정치적 힘에 의지하여 조급하고 일방적인 개혁을 시도한 경우였다. 반면에 어려운 개혁을 성공시킨 이면에는 정부가 인내를 갖고 정치, 사회, 경제의 사회적 파트너들과 진지하게 대화하고 타협을 시도한 결과였다.

여기서 근본적 개혁을 성공시킨 사례 하나만 들어보자. 1980년대 후반, 스웨덴은 국민들의 노후소득을 보장하면서도 재정적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겠다는 비전을 세우고, 이를 관찰하기 위해 이념과 이해를 초월한 개혁 노력을 지속하였다. 개혁의 준비 시점부터 따져보면, 13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정당 대표들을 중심으로 한 논의기구에서 대화와 타협을 이어갔다.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1998년에 ‘명목확정기여 제도(NDC)’와 ‘최소연금보장 제도’를 동시에 도입하는 연금 역사에 획을 긋는 좋은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유럽과 같은 ‘민주적 코포라티즘(democratic corporatism)’, 즉 노동계와 경영계가 대화의 주체가 되고 정부가 적절히 개입하여 사회정책을 결정하는 전통이 없다. 따라서 이번 국민연금 개혁에서 ‘사회적 대화’를 성공시키게 된다면, 우리나라 사회정책의 역사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는 우리의 국민연금 개혁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이 부분을 살펴보자.

연금 개혁의 사회적 대화, 문제 분석과 쟁점 토의에서 더 치열해야

연금특위는 지금까지 12차에 걸쳐 각종 회의와 워크숍을 진행하였다. 필자가 예상하는 대부분의 이슈들이 전문가들(공익대표)과 이해집단 대표들에 의해 발표되고 심도 있게 토의되고 있어 일견 안심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진행되는 논의를 지면으로 살펴보면서 몇 가지 아쉽고 우려되는 점들이 있다. 어쩌면 필자의 이런 과분한 지적이 이번 사회적 논의가 성공으로 이어지는 촉진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먼저,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에 대한 각 이해단체 대표 상호 간, 그리고 전문가들 간에 집요하고도 치열한 쟁점 토론이 부족한 것 같다. 토론의 모습들이 너무 젠틀하다.

지금까지는 문제와 대안들을 학습하고 서로의 입장과 주장을 이해하는 시간들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쟁점을 부각시키고 치열하게 대안 경쟁을 해야 한다. 주요 이슈별 논의의 우선순위를 확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쟁점들을 하나하나를 구체적으로 치열하게 토론해서 합의점을 찾아나가야 한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보자.

첫째, 보험료 수준의 적정성에 대한 판단과 처방이다. 보험료 수준이 낮다고 판단하기에 앞서 왜 20년 이상이나 되는 긴 기간 동안 보험료율이 9%에서 머물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명확히 나와야 한다. 단순히 정치인들의 포퓰리즘 때문인가? 아니면 보험료율을 올릴 경우 영세자영업자들이 제도권 밖으로 쫓겨나 국민연금 존립의 정당성마저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실제로 우려되기 때문인가? 만약 후자라면 재정안정화라는 명목으로 보험료를 대책 없이 올려서 노후소득의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켜야 하는가? 아니면 영세자영자들의 보험료 지원이나 최소연금 제도 등의 보완적 장치를 도입하면서 점진적으로 보험료율을 올려야 하는가? 끝장 토론을 해서라도 답을 얻어야 한다.

둘째, 개혁 논의의 범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명확히 해야 한다. 국민연금과 특수직역연금 간의 연금 격차를 그대로 두어도 좋은가? 공무원연금이 귀족연금이라 비난을 받는 것이 과연 불가피하고 이런 상황을 방치해도 된다는 것인가? 내년이면 공무원연금 재정 계산의 해인데, 또 다시 연금 차별 논란에 휩쓸려 사회적 갈등과 국력 소진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셋째, 국가의 재정 책임에 대한 논의는 왜 진행하지 않는가? 국민연금은 사회보험 연금임에도 그 속에 강력한 소득재분배 기능을 담고 있다. 그런데 소득재분배의 부담을 제도 가입자인 고용주와 피고용자들에게 모두 전가하고 있다. 국가가 재정 책임의 주체가 아닌 시혜자로 물러나 있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사회보험 연금 국가에서 연금 제도에 재분배 요소를 도입한 나라들은 거의 모든 국가가 재정 책임을 무겁게 이행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왜 공적연금 개혁 논의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배제하고 있는가? 국가의 재정 책임을 배제하면서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적정 소득을 보장하고 장기적 재정안정화까지 이룰 수 있는 비법이 과연 있다고 보는가? 독일은 어떤 논리로 과거부터 연간 연금급여의 25%에 상당하는 비용을 국가 예산으로 지급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분명한 답을 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충분한 논의 기간을 확보하기를 요청한다. 사회적 논의를 조급하게 마무리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쟁점토론의 본격적인 시작일 뿐이다. 한 달 남은 기간에 모든 쟁점을 충분히 토론하여 타협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과도한 욕심이고 매우 잘못된 시각이다. 추가 연장 3달의 기간을 반드시 확보하여 최대한 쟁점토론과 타협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개혁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 그래도 시간이 부족하다면 해를 넘겨서라도 논의를 이어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어렵다면 정부나 국회에서 구체적 논의를 이어갈 수 있도록 중요한 정책 방향과 이행 기준만이라도 합의를 해야 한다. 아울러 정부는 연구 인력과 재원 등 모든 역량을 사회적 논의의 지원에 투입해야 한다. 또한 타협이 가시화되어 최종 타결이 이루어지기 전에 국민에게 중간보고를 하고 공청회를 거쳐 피드백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잠정 개혁안이 나온 배경, 경과, 이유, 제도 개선 효과 등을 상세하게 보고하고 전문가 집단과 국민의 의견을 듣는 절차를 거치도록 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다듬어진 개혁안은 명실 공히 전문성과 함께 각계각층 국민들의 이해가 반영된 정당성을 갖춘 개혁안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부도, 국회도 이 타협안을 존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이렇게 개혁 법안이 완성됨으로써 역사적인 사회 발전의 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며, 또 이런 과정과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우리나라도 선진 복지국가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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