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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헛한 웃음 속에서 내 안의 모순을 마주한다. 영화 “더 스퀘어”
헛헛한 웃음 속에서 내 안의 모순을 마주한다. 영화 “더 스퀘어”
  • 박수영 영화평론가
  • 승인 2019.07.17 16: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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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제7회 무주산골영화제에서 상영된 “더 스퀘어”는 지난 70회 칸 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의 <옥자>, 홍상수 감독의 <그 후>,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킬링 디어>, 프랑수아 오종의 <두 개의 사랑> 등 쟁쟁한 경쟁작들을 제치고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스웨덴, 독일, 덴마크, 프랑스 합작 영화이다. 2018년 8월 2일 국내에서도 개봉하였지만 16,715명이라는 아쉬운 성적을 남긴 작품이기도 하다.

<옥자>를 제치고 70회 황금종려상 수상…개봉 당시에는 아쉬운 성적

잘 나가는 스톡홀름 현대 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크리스티앙은 <더 스퀘어>라는 새로운 전시의 기자발표회 당일 황당한 수법으로 지갑과 휴대폰을 소매치기 당한다. 그는 휴대폰 위치추적기능을 통해 소매치기가 사는 것으로 보이는 아파트를 찾아내고, 미술관 직원 미카엘의 조언에 따라 훔친 물건을 중앙역 세븐일레븐으로 보내라는 내용의 협박 편지를 작성하여 아파트 모든 우편물 함에 집어넣는다. 다음날 물건은 무사히 돌아오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발생하며 크리스티앙은 "친절하고 배려심 많은" 외향 속에 감춰진 자신의 위선된 모습을 낱낱이 전시해야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영국 경제학자 베버리지가 1942년에 발간한 <베버리지보고서>의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목표를 표현한 구호인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오늘날 스웨덴 등 북유럽 3국의 복지체제를 가리킬 때 자주 등장한다. 단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모든 국민을 국가와 사회가 나서서 그야말로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복지를 제공한다는 이 구호는, 적어도 이 영화 내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듯 보인다. 거리에는 거지들이 곳곳에 보이며, 이민자들이 주로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는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을 한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졸린 눈으로 손님을 맞는다. 거리에 주차한 고급 승용차에 앉아 있는 흑인에게 괜히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으며, 틱 장애가 있는 장애인을 비웃는 기자도 등장한다. ‘신뢰와 돌봄의 영역으로, 여기서는 모두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고 하는 <더 스퀘어>는 다양한 편견과 모순에 이리저리 잠식당하여 말 그대로 사방 4m의 좁은 공간 속에 갇혀 버린 듯하다.

전시물이 되어버린 가치, 주목만을 위한 폭력의 전시는 어디까지 허용되야 할까?

“지상 최고의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낯선 환경을 마주한 크리스티앙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며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자기 안의 위선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소매치기에게 ”점잖게“ 경고하고자 하는 의도로 쓴 편지는 한 이민자 가정의 어린아이에게 도둑이라는 누명을 씌우게 되고, 돈을 구걸하는 거지에게 ”현금은 없지만 먹을거리는 사줄 수 있다.“고 나름 품위 있게 대응해 보지만 양파는 빼 달라는 거지의 요구에 ”양파는 알아서 빼 먹으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내비치고 만다. 도둑 누명에 항의하는 편지를 수령하는 자리에 자신이 아닌 부하 직원을 대신 내보내 자신이 들어야 할 항의를 부하 직원에게 전가시키는가 하면, 집에까지 찾아와 사과를 요구한 누명을 쓴 아이를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리는 등, 초반에 멋진 연설로 설명한 ”더 스퀘어“ 전시의 의미를 스스로 부정하는 행동을 연속해서 벌이며 스스로도 당혹해한다.

이러한 모순된 행동은 크리스티앙만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다. 기자회견장에 자리한 틱 장애인의 돌발적 발언을 마주한 기자와 예술가들은 말로는 이해해야 한다면서도 불쾌함을 감추질 못하는가 하면 직후 벌어진 디너 파티에서 농담의 소재로 쓰기까지 한다. 전시회 홍보를 맡긴 외주제작사와의 미팅에 참석한 이사장은 제작사가 어떤 콘셉트로 홍보영상을 제작하려 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는 듯 행동하다 그들이 제작한 어린 소녀를 폭파하는 영상이 공개되자 미팅에 거의 참석하지 않은 크리스티앙에게 책임지고 사퇴할 것을 강권한다. 심지어 이런 영상을 제작한 홍보사는 자신들이 만든 영상이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했다며 크리스티앙에게 자랑하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파티 장면에서는 지금까지 드러내어 보인 모든 위선의 총합을 여지없이 전시한다. 관심끌기만을 위한 과도한 폭력의 전시와 그 폭력에 노출된 누군가를 보며 나는 아니라는 안도감을 은연중에 내비치는 참석자들, 도움을 요청하는 희생자의 호소에 대해 내가 아닌 주위에 다른 누군가가 나서주기를 기대하는 방관자 심리까지, 영화는 오로지 주목도로만 모든 것이 평가되는 현대 대중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그 속에서 “신뢰와 돌봄, 모두에게 동등한 권리와 의무”라는 가치가 사방 4m밖에 안 되는 전시물로 전락해 버린 상황에 대한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이 질문은 특히 한국 상황에서 더욱 유효할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황당하고 비일상적인 경험”들은 사실 한국 사회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운행이 끝난 역사에 가득한 노숙자들과 한계상황에 근접한 삶을 살고 있는 외국인노동자들, 농담을 넘어 조롱의 소재로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장애인에 대한 묘사와 본래 의미와 상관없이 오직 자극적 요소로만 소비되는 미디어까지,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보니 이러한 것을 접한 크리스티앙이 당황해하는 모습이 오히려 낯설게 보이기까지 한다. 물신화된 전시물로 전락한 “신뢰와 돌봄, 모두에게 동등한 권리와 의무”라는 가치는, 어쩌면 우리들에게는 전시물조차도 되지 못하고 폐기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잘 만든 좋은 영화를 보았다는 만족감 뒤에 느껴지는 일말의 씁쓸함은 여기에서 기인했을지도 모른다.

재기발랄한 유머 속에 통렬한 메시지를 감추고 있는 영화 ‘더 스퀘어’는 IPTV 및 스트리밍 서비스, 주요 포털의 영화 다운로드 서비스 등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ps) 영화 속의 전시인 “더 스퀘어”는 2014년 스웨덴 남부에 자리한 미술관 반달로럼에서 실제 있었던 전시다. 미술관 방문객은 ‘나는 다른 사람을 믿는다’, ‘나는 다른 사람을 믿지 않는다’라는 두 가지 문 사이에서 선택을 한다. ‘나는 다른 사람을 믿는다’를 선택하면 큰 방 한가운데 설치된 “더 스퀘어”에 핸드폰과 지갑을 두고 가야 하는데,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상황이 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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