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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만리] 홍콩 문제의 본질
[천지만리] 홍콩 문제의 본질
  • 강준영 한국외대 교수/중국학
  • 승인 2019.08.03 16: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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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문제의 본질은 '기존 홍콩 질서의 유지' vs. '홍콩의 중국화'의 대립
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에서 공산당에 의한 홍콩 통치와 관상(官商)통치로 바꾸어

홍콩 정부의 범죄인 송환법 개정 시도로 촉발된 항의 시위가 2개월째 지속되면서 사태가 일파만파다. 지난 2월 이 법의 수정안을 마련한 홍콩정부는 6월 초 의회격인 입법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개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법이 홍콩의 민주·시민운동가들에 대한 탄압과 중국 송환에 악용될 수 있음을 우려한 100만 명이 넘는 홍콩 시민들은 6월 9일 민주주의의 빛을 밝힌다는 의미로 흰 옷을 입고 송환법 페지 집회를 열었다. 홍콩 경찰이 강제 진압으로 응수하자, 일주일 후 2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민주주의는 끝났다면서 검은 옷을 입고 송환법 개정 완전 폐지, 케리람 행정장관 사퇴, 폭력 경찰 처벌 등을 주장하며 다시 거리로 나섰다.

홍콩특별행정구의 수장인 캐리 람 행정장관은 결국 더 이상 송환법의 개정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며 송환법은 이미 죽었다고 선포하고 시민들에게도 사과했다. 그러나 홍콩 시민들은 송환법 완전 폐기에 대한 언급도 없고 자신의 거취 및 강제진압 조사 등 자신들의 요구를 반영하지 않았다며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일부 급진세력들은 7월 1일 초유의 입법회 폭력 점거를 단행했고, 홍콩 경찰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의심되는 폭력조직원들이 심야에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백색 테러를 자행함으로써 정부의 통치권과 공권력은 물론 시민사회의 여론이 분열되는 공전의 위기를 맞고 있다. 급기야 중국의 홍콩 정책을 총괄하는 국무원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HKMAO)은 7월 29일, 반환 22년 만에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홍콩 시위가 한 국가 두 체제, 즉 일국양제(一國兩制) 원칙의 마지노선을 건드렸다며 좌시할 수 없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결국 송환법 개정 시도로 시작된 이번 사건은 홍콩 정부의 위기관리 부재 속에서 정치질서 위기를 초래했고 대만 통일을 염두에 둔 일국양제라는 중국적 실험에 타격을 입히기에 충분했다. 그만큼 중국 당국이 이번 시위 사태를 엄중하게 볼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홍콩은 영국이 청나라와의 아편전쟁에서 승리하면서 1842년 난징(南京)조약에 의해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841년 이미 군대를 홍콩섬에 진주시킨 영국은 홍콩을 자유무역항으로 선포하고 원동의 무역기지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유럽의 인원과 물자 그리고 대량의 자금이 유입되었고, 작은 어촌이었던 홍콩은 자연스럽게 금융과 무역의 중심지로 도약을 시작하게 된다. 2차 대전 이후에는 최저관세의 자유무역항으로써 정부의 시장 간섭이 최소화 된 자유방임 경제의 교두보가 되었다.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천명하자 홍콩은 중국에 진출하고자하는 전 세계 자본과 기술·인력의 교량은 물론 각 다국적 기업의 아시아 본부가 설치되면서 제조업위주의 도시에서 국제금융과 무역의 중심지로 우뚝 섰다. 그러나 1997년 7월 1일 0시를 기해 중국에 반환되면서 중화인민공화국 특별행정구로서 중국의 일부분이 된 홍콩의 지위는 달라졌고 변화가 불가피해 졌다.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홍콩인들과 홍콩의 중국화를 추구하는 중국 정부와의 줄다리기가 홍콩에서 발생하는 대부분 사태의 근원이며 본질이다.

1984년 영국과 중국은 홍콩 반환 협상을 시작한다. 이때 당시 중국의 실권자였던 떵샤오핑(鄧小平)은 일국양제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영국에 제시했고 양국은 현행 자본주의 체제 및 생활양식이 50년간 변하지 않는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고, 1990년 4월에는 홍콩의 향후 지위를 규정한 홍콩기본법(The Basic Law of Hongkong)이 제정되었다. 1997년 중국으로 돌아간 홍콩은 중국에게 있어 중국을 유린한 제국주의시대의 종언이며 대만까지 포함하는 통일 대업을 완수해 위대한 중국을 건설하는 기점이었다. 홍콩기본법은 외교와 군사 영역을 제외하고 홍콩이 일국양제와 홍콩인에 의한 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港人治港), 법률적 종심권을 포함하는 고도의 자치(高度自治)를 향유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는 ‘공산당에 의한 홍콩 통치’와 ‘정부와 기업 간의 결탁에 의한 관상(官商)통치로 바뀌었으며, 이 과정에서 일반 홍콩 시민들은 철저히 배제 당했고 경제적 약자로 전락하였다. 게다가 중국은 부단히 홍콩의 중국화를 추구하고 있다. 2003년 홍콩기본법 23조 입법화 즉 보안법을 추진하고자 하였고, 2012년에는 중국식 국민교육 의무화를 시도하다가 저항에 부딪혔다. 2016년에는 경찰의 노점상 강제 철거에 항의하는 폭력사태가 발생하는 등 저항형태도 대규모화하고 폭력화하고 있다. 헌법격인 홍콩 기본법 역시 종심권 보장에도 불구하고 최종 해석권이 중국의 전국인민대표 상무위원회에 귀속되어 중국 중앙이 홍콩에 대한 전면적 관할권을 갖도록 되어 있다. 반환 20년 후 시행하기로 한 직선제에 의한 행정 수장 및 입법의원 선출 방식도 지켜지지 않았다. 홍콩의 행정수장은 여전히 베이징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어려운 간접선거 방식으로 선출된다. 2014년, 79일간이나 지속됐던 우산혁명은 바로 이에 대한 항의였지만 그 뜻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중국 내부의 시각은 홍콩은 이제 중국의 일원이므로 더 이상 맹목적인 특수지위를 주장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홍콩도 자체적인 내부 동력으로 과거와 같은 경제지위를 향유하기는 어렵다. 홍콩 내부의 시민사회도 일국양제 하에서 법제화를 통해 지위를 확보하자는 제도 건설파(建制派)에서부터 독립을 강조하는 자주파 등으로 분열되어 일관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서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하고 있다. 중국의 시진핑 체제는 홍콩 문제의 국제화를 철저히 경계하면서 쉽지 않겠지만 강압적 개입 의사를 흘리는 중이다. 강압적 중국화를 꾀하는 중국정부와 중국을 대변하는 홍콩 정부, 그리고 항의에 의존하는 민주 홍콩·자유 홍콩의 요구는 홍콩의 미래를 더욱 암울하게 한다.

지난 6월 17일 홍콩시위대 모습. 사진=이강원 제공
지난 6월 17일 홍콩시위대 모습. 사진=이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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