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9-08-22 11:36 (목)
YH무역이 ‘하이모’가 될 수는 없었을까?
YH무역이 ‘하이모’가 될 수는 없었을까?
  • 조준상 선임기자
  • 승인 2019.08.12 15: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YH노조 투쟁 40주년에 생각해 보는 상상

지난 8월10일 오후 2시부터 서울 중랑구 사가정로 49길53(옛 면목3동)에 자리한 녹색병원에서 박정희 정권 몰락의 도화선이 된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4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40년 전 YH무역이 있던 바로 그곳이다. 병원 주차장이 있는 자리는 당시 21살로 YH노조 대의원이던 김경숙 열사을 포함해 한때 4천명에 이른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이 공동생활 한 기숙사가 있는 터였다(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6살 김 열사는 신민당사 농성에 대한 경찰의 강제해산 과정에서 추락사했는데 경찰은 자살로 조작했으나 2008년 과거사정리를위한진실과화해위원회에서 진상이 규명됐다).

지난 8월10일 녹색병원에서 열린 YH노조 40주년 행사에 참여한 이들이 활짝 웃고 있다. 사진: 이코노미21
지난 8월10일 녹색병원에서 열린
YH노조 40주년 행사에 참여한 이들이 활짝 웃고 있다. 사진: 이코노미21

행사에는 당시 최순영 지부장, 권순갑 부지부장 등 YH노조를 이끌던 ‘큰누나’들이 4명이나 참석했다. 분위기는 마치 동문회나 반창회 같았다. 웃음과 회한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으리라. 개인적으로는 정당득표율 10%를 넘으며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진출하던 2004년 4월 총선 이후 처음으로 최순영 전 의원을 만날 수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건강한 모습을 보니 반가웠다.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은 없다.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라는 바람은 한갓 관념의 푸념일 경우가 많아서다. 하지만 도움이 될 때도 많다. ‘만약’을 충족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어서일 것이다. ‘YH무역이 하이모가 될 수는 없었을까?’라는, 좀 뜬금없는 상상을 해본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특히 YH노조가 1979년 8월9일 신민당사 농성에 들어가기까지 핵심 요구는 밀린 임금의 지급도 있지만 폐업 철회와 회사 회생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개인적인 이런 ‘역사의 가정’에 대해 물어볼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4시30분부터 시작된 큰누나 4명들과 참석자들 사이의 자유로운 대화 시간에서였다. 하지만 ‘2019 여성노동을 말하다’는 행사주제에도 맞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데다 참석자들이 오해할지도 모르겠다는 시선을 의식한 소심함에 결국 물어보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이렇게 몇 자 적어본다.

1965년 미국의 중국 머리카락 금수가 만든 기회의 창

모두가 아는 대로 젊은 시절 오토바이 사고로 큰 수술을 한 탤런트 이덕화씨는 가발을 써 왔다. ‘모발모발’이라는 그의 유행어와 함께 어느 순간부터 그는 ‘하이모’라는 이름의 가발회사의 광고모델이 되면서 가발광고의 대명사가 됐다. 하이모는 1987년 3월 설립됐다. 30여년이 흐른 지금은 종업원 700여명, 매출액 800억원대의 국내 종합모발관리그룹의 선두기업으로 성장했다. YH무역 창업자인 장용호씨가 애초 폐업하겠다고 공고한 때가 1979년 3월 말이다. 시간으로 치면 8년이다.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긴 시간도 아니다.

YH무역은 1966년 자본금 100만원, 종업원 10명으로 시작해 1970년 종업원 3천명, 수출 순위 15위의 최대 가발업체로 성장했다. 가발산업은 1970년 총수출의 9.3%를 차지하며 1970년대 섬유와 합판에 이어 제3의 수출산업이 됐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미스트(2017년 7월27일치) ‘가발이 들려주는 현대 한국 이야기’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1970년대 미국인이 쓰는 가발의 3분의 1이 한국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1960년대 미국 여성의 40% 이상이 한 개 이상의 가발을 갖고 있었고, 1960년 연간 1천만달러 미만이던 미국의 가발시장은 1970년 10억달러로 100배 이상이 커졌다. 최고 절정기에는 한 달 100만개가 수입됐다고 한다.

탄광업의 전성시절 태백 탄광지대의 월급날이면 서울 다음으로 돈이 많이 풀린다는 말이 나왔던 것처럼, YH무역의 월급날에는 전체 면목동이 들썩거릴 정도로 이 지역경제의 심장이었다. 그랬던 YH무역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자신의 이름을 따 회사명을 만든 설립자 장용호는 미국에 백화점 사업체를 설립해 외화를 빼돌리는가 하면, 은행 빚을 얻어 얻어진 무리한 사업 확장을 했고, 1978년 제2차 석유파동 이후 수출수요 감소 등을 이유로 종업원을 500명으로 줄이더니 일방적인 공장폐업, 노조의 반발과 저항 등을 초래하며 회사를 몰락으로 자초했다.

결국 기업으로서 YH무역은 설립한 지 13년 만에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설립까지는 괜찮아 보인다. 장용호가 냉전의 흐름 속에서 기회를 포착한 것은 분명하다. 북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강화시키는 중국에 대한 견제 차원에서 미국은 1965년 중국산 머리카락의 수입을 금지했다. 중국산 머리카락에 의존하던 홍콩의 가발업체는 직격탄을 맞았다. 기회의 창은 한국을 향해 열렸다. 같은해 코트라 뉴욕무역관의 부관장이던 36살의 장용호는 사표를 내고 1년 뒤 YH무역을 세웠다. 그리고 승승장구했다. 서울 왕십리의 콩나물 공장을 빌려 시작해 1969년 건평 2천평의 면목동으로 확장 이전했다. 1970년엔 김우중, 구자경, 신현확씨와 함께 산업훈장을 받기까지 했다. 정경유착을 통한 엄청난 세제상의 특혜, 근로기준법도 지키지 않고 김경숙 열사처럼 초등학교를 졸업한 10대 중반의 여성노동력에 대한 착취 등이 결부돼 가능했던 일이다. 정부 지원과 권장을 통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가발의 원재료인 국민들의 머리카락에 대한 껌 값 수탈도 빼놓을 수 없다. 디지털시대인 현재, 플랫폼 기업들이 공짜로 국민들의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과 꼭 빼박았다.

좁아지는 기회의 창, 개인 미래 먹거리 준비에 열중한 YH무역 설립자

정격유착은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장용호가 1960년대 말부터 진행되고 있던 미래의 변화에 충실히 대비하지 못했던 것은 기업가로서 치명적인 실수이자 과오인 것은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사후시각이 2.0’임을 경계한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미국의 중국산 머리카락 수입금지라는 기회의 창이 조금씩 닫힐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69년 냉전 체제를 해체하자는 ‘닉슥 독트린’ 선언, 1971년 4월 핑퐁외교, 같은해 10월 중국의 유엔 가입과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선임 등을 거치며 중국산 머리카락 수입 금지는 1971년 해제된다. 미국과 중국은 1973년 상호 연락사무소 개설을 거쳐 1979년 1월 국교수립을 한다. 미국과 중국이 국교 수립을 하는 그해 장용호는 YH무역에 대한 일방적 공장폐쇄 결정을 내린다.

40주년 기념식장에서 회한을 말하는 최순영 당시 YH노조 지부장. 'YH무역이 하이모가 됐더라면' 그는 지금 세계적인 가발 디자이너가 돼 있을지도 모른다. 사진: 이코노미21
40주년 기념식장에서 회한을 말하는 최순영 당시 YH노조 지부장.
'YH무역이 하이모가 됐더라면'
그는 지금 세계적인 가발 디자이너가 돼 있을지도 모른다.
사진: 이코노미21

주거래은행인 조흥은행의 빚을 얻어 무리한 사업 확장에 나선 조용호의 결정은 이런 맥락에서 치명적인 패착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주안점은 수출시장 다변화, 새로운 제품 개발, 인조 머리카락에 대한 연구개발 등이었을 것이다. 결국 1975년 결성된 YH노조는 이런 맥락에 놓여 있는 게 아닐까 한다. 닥쳐올 어려운 시기에 대비해 회사의 ‘미래 먹거리’ 준비에 집중해야 할 조용호는 자신만의 미래 먹거리를 위해 해외로 자금을 빼돌리면서 근로기준법도 지키지 않는 저임금, 이것만으로 대량의 감원을 하는 식의 ‘폭력적인 수량적 유연성’에만 의지하다 아예 공장을 청산해버린 것이다. 김경숙 열사가 1979년 8월7일 어머니에게 쓴 편지 형식의 일기에는 "이곳 YH무역은 큰 회사랍니다. 돈 많은 회장은 미국으로 도망가고 없고, 사장들은 자기들만 잘살겠다며 지금 우리 근로자들을 버렸습니다…특히 엄마가 꼭 알아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회사의 사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나쁜 사람이어서 어떤 일을 꾸밀지 모르니 내 편지가 아니면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는 구절이 있다. 기대 난망의 기업주였던 셈이다.

이렇게 보면 ‘YH무역이 하이모가 될 수는 없었을까?’라는 가정은 어불성설인지도 모른다. 자신만의 미래 먹거리를 준비하는 데 열중하는 기업인에게 맡겨진 회사의 미래는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YH노조가 만들어진 1975년부터라도 장용호를 교체하고, 새로운 경영진을 들어서서 채권단과 채무를 재조정하고, YH노조와 경영정상화를 위한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무리하게 확장된 사업을 재조정하고 남아 있는 자원을 연구개발과 시장다변화에 투입할 수 있었다면 ‘YH'가 아닌 ’큰누나‘들의 무역은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어쩌면 ’하이모‘가 될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희망 섞인 고집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랬다면 최순영 지부장은 세계 최고의 가발 디자이너가 돼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역시 어불성설일 수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수출 목표치를 직접 설정하고 이 달성을 직접 독려하던 유신체제의 제왕 박정희를 설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역사의 가정에 대한 유혹은 사라지지 않는다. 외세의 개입이 없었다면 해방공간에서 당시 한국민이 무엇을 선택했을지에 대한 방법론이 주는 매력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듯이.

미국 출신의 홍콩대학 역사학자 제이슨 페투르리스(Jason Petrulis)가 ‘머리카락의 나라 한국 - 한국 가발, 한국계 미국인 사업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헤어스타일, 냉전 산업화의 글로벌한 이야기’라는 논문에서 썼듯이, 가발은 냉전 상품의 상징이었다. 1969년부터 시작해 1979년 중일 수교로 정점을 이룬 미국과 중국의 데탕트는 한국 가발산업에 활짝 열렸던 기회의 창을 조금씩 좁혔다. 좁아지는 기회의 창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은 폭력적인 유신체제와 정경유착, 노동배제적 노사관계 속에서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이 속에서 “살기 위해 싸웠다”는 YH노조 큰누나들의 투쟁이 박정희 정권의 몰락의 도화선으로 흘러간 것은 역사의 물길이 제 길을 잡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YH무역이 하이모가 될 수 없었을까?’라는 가정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근저에 바로 박정희 체제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럴 것이다.

YH노조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40주년을 축하드리며 ‘큰 누나’들의 건강과 건승을 기원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