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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소미아 종료, 자존, 그리고 건강한 나르시시즘(자기애)
지소미아 종료, 자존, 그리고 건강한 나르시시즘(자기애)
  • 조준상 선임기자
  • 승인 2019.08.23 1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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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뺨 맞고 다른 쪽 뺨까지 내놓아야 하나?

[이코노미21] 정부가 자동연장 시한을 이틀 앞두고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을 종료하기로 8월22일 결정했다. 이유는 “일본 정부가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한일간 신뢰훼손으로 안보상의 문제가 발생했다는 이유를 들어 백색국가 리스트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함으로써 양국 간 안보협력 환경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 …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안보상 민감한 군사정보 교류를 목적으로 체결한 협정을 지속시키는 것이 우리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 결정에 대해 갑론을박이 많다. 제1야당이라는 곳에서는 항간에 떠들썩한 ‘조씨 구하기’ 프레임을 덧씌워 맹렬한 비난을 퍼붓고 있다. 그동안의 경험상 솔직히 이런 식의 ‘음모론’ 프레임에는 ‘음모론’으로 맞서는 것 이외에 달리 뾰족한 해법이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 정당에 ‘토착왜구’라는 오명이 따라붙는다고 하니, ‘이쯤 되면 자민당 2중대 아니냐?’고 비아냥이 나올 법도 하다. 지소미아 문제와 조씨 문제를 동렬에 놓는 저열함에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어서다.

대한민국에서 진보를 내세우는 이들의 도덕성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스스로를 보수라고 생각하는 이들에 적용하는 기준보다 훨씬 더 높은 편이다. 불편한 현실이다. ‘진보는 불편한 것’이라는 어느 선배의 말이 가리키는 실체는 바로 이것일 게다. 그리고 진보가 이에 부응하지 못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강남좌파’니 ‘패션좌파’니 하는 말들이 그 상징이다. 투신으로 생을 마감한 노회찬 전 민주노동당 의원의 비극이 ‘편평한 운동장’에 대한 갈구와 엇갈리는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한다.

‘반공애국주의’ 앞에 번번이 좌절된, 원하지 않은 선거결과를 두고 심심찮게 튀어나왔던 ‘이 땅의 50대 후반이 모두 물리적 생을 마감해야 변화한다’는 감정적 언사는 이런 현실의 부정하고픈 심정의 산물일 게다. 이런 식의 ‘국민 개조론’으로 있는 현실을 없는 것처럼 부정한다면 오롯한 진보가 되기는 어렵다. 어느 여류 소설가는 촛불까지 들먹이며 그를 옹호하고 나섰지만, 조씨 문제도 여기서 예외가 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김유근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장이 8월22일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김유근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장이
8월22일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두고 보통사람들 사이에서는 ‘미국한테 미움 사면 어떻게 하나?’, ‘일본 애들 바라는 대로 놀아나는 거 아닌가?’라는 걱정의 목소리들이 많이 들린다.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질기고 질긴 반도국의 숙명이 짙게 배어 있는 문제의식들이다. ‘이웃나라’ 북한이 대륙간탄도탄에 전술핵까지 개발해 놓고 동맹관계에 있는 ‘한미 연합훈련’을 핑계로 입에 담지 못할 막말을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내며 미사일과 방사포를 쏴대고 있으니 불안감은 더 클지도 모른다.

그럴 만도 하다. 최근 북한의 태도는 ‘단계적․병행적’ 해법의 추구가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의 의미를 북한과 남한(그리고 미국)은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남한과 미국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구상하는 반면, 북한은 남한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을 포함해 한반도의 비핵화를 구상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니 ‘일본에 대응하는 것의 반만이라도 북한에 할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반응은 응당 나올 법한 것이다. 오히려 이런 반응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좀 이상한 사회라는 방증일 게다. 이는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논의에서 남한 내부에서 여전히 비어있는, 근본적이고 차분한 해법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평화협정 체제에서 남과 북은 엄연히 다른 두 개의 국가라는 점을 법과 제도로 확립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헌법상의 영토조항 삭제를 포함하는 이런 문제에 대한 남한 내부의 논의는 여전히 비어 있다. 이 공백을 메우는 논의의 활성화가 북한이 트럼프의 묵인 아래 마구 쏴대는 미사일이나 막말보다 훨씬 더 무게감 있게 북한에게 전달되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북한으로부터는 ‘두 개의 조선 책동’이니 ‘영구분단 획책’이니 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올 테지만 말이다.

지소미아로 돌아가 보자. 사람에게는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국가 간 관계도 마찬가지다. 나의 자존을 짓밟는 사람에게 한 뺨을 맞았다고 다른 뺨을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랑이를 기면서 복수를 다짐하는’ 와신상담 류의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힘을 키워서 미래로 전쟁을 늦추는 것에 해당한다. 무엇이 나은 대응인지는 시대와 상황에 따르다. 거함과 대포를 앞세워 약소국을 마구 침략하던, 대포의 사거리로 영해를 결정하던 고전적인 제국주의 시대에는 와신상담 류의 대응이 바람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럴 듯한 명분과 논리가 없으면 아무리 약소국이라도 그 자존과 주권을 마음대로 짓밟기는 어렵다. 하물며 어느 정도 국력이 커지고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산업기반을 가진 상황이라면, 그래서 더 이상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와신상담 류의 대응보다는 정당하게 응전해 주는 것이 맞다.

혹자는 이를 나르시시즘(자기애)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르시시즘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건강한 나르시시즘과 치명적 나르시시즘이다. <나르시시즘의 심리학>이란 책에서는 긍정적인 자기인식에 도움을 두고 자기계발의 원동력으로 긍정적인 나르시시즘을 소개한다. 치명적 나르시시즘의 특징으로는 수치심을 모르는 뻔뻔함, 나와 남의 경계를 함부로 침범하는 이기심, 타인을 무조건 깎아내리는 오만함, 근거 없는 멸시로 나타나는 시기심, 현실을 왜곡하는 마법적 사고, 끝없는 착취, 제멋대로 자격 부여하기 등을 꼽는다. 개인적으로는, 트럼프나 아베에게서 이런 치명적 나르시시즘의 일부 특징들이 엿보인다.

근대 심리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미국의 의사 겸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가 처음으로 사용한 ‘자존감’은 긍정적 나르시시즘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사용한 의미는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긍정”이다. 반면 자존심은 “타인과의 경쟁 속에서 얻는 긍정”이다. 자존심은 끝없이 타인과 경쟁해야 존재할 수 있고 패배할 경우 무한정 곤두박질치는 반면, 자존감은 자신에 대한 확고한 사랑과 믿음이기에 경쟁 상황에 따라 급격히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인간이 실패하는 이유는 단 하나, 자신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소미아 종료는 대한민국이 일본과 경쟁이 아닌 대한민국 자신과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표현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일본이 한국을 우방으로 대우하지 않는데 한국이 일본을 우방으로 대우하기는 어렵다는, 왼쪽 뺨 맞았지만 오른 쪽 뺨까지 내줄 수는 없다는, 최소한의 자존감의 표현이자 긍정적 나르시시즘이라는 얘기다. 관계가 회복되면, 그리고 일본이 원한다면 지소미아는 언제든지 복원할 수 있는 성질의 사안이다. “사요나라, 지소미아!”다.

[이코노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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