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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라가 다시 열어젖힌 케인스의 꿈
리브라가 다시 열어젖힌 케인스의 꿈
  • 조준상 선임기자
  • 승인 2019.10.23 1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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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 공동의 ‘스테이블 코인’으로 무역․자본거래 결제 제안 꿈틀
영국은행 총재 마이크 카니도 비슷한 제안
국제통화기금에 각국 중앙은행 스테이블 코인 계정 설정

[이코노미21 조준상 선임기자] 돈세탁과 테러자금 조달 등에 이용될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높아지면서 페이스북이 지난 6월18일 공개한 리브라 추진의 동력은 크게 떨어지고 있다. 리브라 서비스 운영을 통할하는 거버넌스인 리브라협회에서 페이팔, 비자, 마스터카드, 스트라이프, 메르카도 파고 등이 최근 탈퇴를 선언한 것은 어려운 상황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가치가 안정적인 ‘스테이블 코인’으로서 리브라의 발상을 사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움직임도 활발히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국제 무역․자본거래의 불균형을 완화시키는 데 리브라와 같은 블록체인 기반의 ‘스테이블 코인’을 새로운 글로벌 화폐로 이용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다만, 이 새3443로운 글로벌 디지털 화폐의 주역은 페이스북과 같은 사기업이 아니라 각국의 중앙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이다.

리브라와 같은 블록체인 기반의 암호화폐를 새로운 글로벌 기준통화로 이용하는 발상을 처음 내건 사람은 영국 중앙은행인 영국은행 총재 마크 카니다. 그는 지난 8월 미국 와이오밍주 잭슨홀에서 열린 세계 주요 중앙은행 총재들의 모임에서 이런 제안을 처음 내놨다. 리브라처럼 주요 국가들의 중앙은행이 뒷받침하는 블록체인 기반의 글로벌 암호화폐를 발행하면 달러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미국 경제의 부침이 환율을 통해 전 세계로 흘러넘치는 폐해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카니 총재는 지난 10월15일 주요 20개국 재무장관․중앙은행 연례회의에서도 거듭 이런 제안에 대한 적극적인 필요성을 내세웠다. 중앙은행 공동의 글로벌 암호화폐를 지급준비통화로 삼으면 미국 경제의 오르내림에 대비해 각국이 쌓고 있는 막대한 달러화 지급준비금을 쌓을 필요가 줄어들 수 있고,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에서 유로지역과 중국 등 다극 체제로 나아가는 세계경제의 변화 상황에도 부합하는 국제통화시스템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니 총재의 이런 주장은 리브라와 같은 블록체인 기반의 스테이블 코인을 페이스북과 같은 사적 기업들에 맡겨둘 게 아니라 중앙은행이 적극적으로 해야 할 역할이라는 생각에 기초를 두고 있다. 같은 연례회의에서 리브라 계획에 대해 디지털 시대를 반영하도록 중앙은행의 개혁을 촉구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폭제 역할을 한 사건”이라고 평가한 스웨덴 중앙은행도 비슷한 맥락에서 올해 안에 크로나(스웨덴 통화)의 디지털 버전을 선보이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카니의 이런 제안에 여러 학자들이 가세할 움직임도 최근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학자 겸 활동가가가 그리스 아테네 대학 교수인 야니스 바루파키스다. 전 그리스 재무장관이기도 했던 그는 최근 카니 총재의 제안에 살을 붙이는 방안을 선보였다. 리브라에 쏟아지는 사적 기업들의 새로운 중앙은행화와 이에 따르는 독점을 이유로 블록체인과 이에 기반한 핀테크의 기술혁신까지 사장시켜서는 안 된다며 각국 중앙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이 리브라 계획이 담고 있는 아이디어의 실행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브레턴우즈 체제의 주역인 영국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미국 해리 덱스터 화이트. 사진: 위키피디아
브레턴우즈 체제의 주역인 영국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미국 해리 덱스터 화이트. 사진: 위키피디아

핵심은 지금의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을 탄생시킨 1944년 브레턴우즈에서 거부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국제청산동맹’(International Clearing Union)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국제통화시스템을 재탄생시키는 데 글로벌 암호화폐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요는 이렇다. 각국 중앙은행은 블록체인 기반의 리브라 형태의 토큰 발행(그는 이 통화를 ‘코스모스’라고 부른다)을 국제통화기금에 위탁한다. 각국 중앙은행은 국제통화기금에 계정을 개설한다. 국제통화기금은 이 토큰을 발행한다. 각국의 국내 통화들도 물론 사용된다. 이 토큰과 각국의 국내 통화들의 환율을 자유롭게 변동한다. 다만 조건이 있다. 모든 국경 간 거래와 자본 이전은 코스모스로 표시되고 국제통화기금에 개설된 중앙은행 계정을 거쳐야 한다. 케인스의 제안처럼, 무역적자만이 아니라 무역흑자에 대해서도 무역불균형 시정을 위한 일정한 부과금을 적용한다. 자본거래의 경우 유출이나 유입에 비례해 수수료를 부과한다. 이렇게 모인 재원은 글로벌 국부편드로 편입해 국제통화기금이 운영한다.

새로운 준비통화로 중앙은행 공동의 글로벌 암호화폐를 이용하자는 이런 제안은 결국 현재 국제통화기금이 내부 계산단위로 운영하고 있는 특별인출권(SDRs)을 블록체인 기반의 무역․자본거래 표시화폐로 전환하자는 것에 해당한다. 1970년 도입된 세계화폐 특별인출권은 ‘종이금’(paper gold)이라고 불리는데, 달러화, 유로화, 파운드화, 엔화, 위안화 등 5대 통화가 일정한 비율로 바스켓에 편입되는 방식으로 가치가 결정된다. 페이스북이 제안한 리브라 계획의 밑바탕에는 이런 특별인출권 아이디어가 깔려 있다.

물론 이런 제안이 성공을 거두려면 미국의 달러 패권을 극복하는 ‘정치’와 ‘글로벌 합의’가 필요하다. 1944년 브레턴우즈회의에서 글로벌 화폐 ‘방코르’에 기초해 무역흑자국에 대해서도 불균형 시정의 책무를 부과하는 내용의 케인스의 계획이 무산된 것은 결국 미국의 반대였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두 가지 사정이 달라졌다. 하나는, 그때는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였다면 지금은 세계경제가 다극 체제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 경제의 쇠락에도 미국 달러화의 절반 이상이 미국 경제의 부침에 대비한 지급준비자산으로 미국 이외의 나라들에서 외환보유고로 보유되며 미국 달러화의 “과도한 특권”(exorbitant pprivilege)이 남용되고 있고 이에 대한 다른 나라들의 불만이 쌓이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준비통화로서 블록체인 기반의 글로벌 암호화폐를 제안하는 배경에는 100년 전 국제금융시장에서 영국 파운드화의 지배가 끝나가는 상황과 지금이 유사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미국 달러화의 지배가 대금융위기 이후 지속가능한 경기회복의 걸림돌이 되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세계 70여개국 중앙은행들이 디지털화폐 발행 여부를 검토하는 상황에서, 카니 총재의 제안이 본격적인 논의와 검토를 거치기는 것은 시간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그 과정에는 달러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과 나머지 나라들 사이의 치열한 글로벌 화폐정치가 있을 것이다. 이 싸움은 국제통화로서 달러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따른 책임을 미국은 부담하지 않겠다는 “과도한 특권”의 정상화를 둘러싼 것이다. 이 특권은 1971년 12월 미국이 달러화의 금태환을 일방 정지시킨 뒤 열린 서방선진10개국(G10) 재무장관관 회의에서 당시 미국 재무장관 존 코널리가 “(달러는) 우리의 통화지만 당신들의 문제”(is our currency, but your problem)이라는 웃지 못할 재담이 상징한다.

미국계 글로벌 테크기업 페이스북이 주창한 리브라가 이 싸움을 위한 상상과 기회의 창을 열어젖혔다는 것은 분명히 역설처럼 다가온다. 그 중심에 블록체인 기반의 스테이블 코인 발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코노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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