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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칠레 재무장관이 보는 칠레 산티아고 시위의 배경
전 칠레 재무장관이 보는 칠레 산티아고 시위의 배경
  • 조준상 선임기자
  • 승인 2019.10.31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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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교통․의료 등 필수서비스 가격에 깃든 독과점 담합
사회이동성 저해하는 교육의 신분제화…취업자의 33% 불안정 고용 상태
민주화의 역설…정치적 영향력 있는 내부자들에 의한 필요한 개혁의 방해
칠레 대통령 "칠레는 전쟁 중", 30년 전 민주화 이행 이후 최대 위기 되나

[이코노미21 조준상 선임기자] 다음달 수도 산티아고에서 열려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제(에이펙) 정상회의 개최를 칠레 정부가 10월31일 취소할 정도로 지하철 요금인상을 계기로 촉발된 칠레의 대규모 항의시위가 10월18일부터 계속되고 있다. 칠레 시위의 배경에 대한 공통된 설명은 ‘지하철 요금 3% 인상이 인플레이션 증가와 높은 불평등과 맞물려 대중의 분노를 들끓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2012년 5월 칠레 중도좌파 선거연합인 ‘민주주의정당연합’의 대통령후보 경선에도 나선 정치인이자 2006년 3월~2010년 3월 칠레 재무장관을 역임한, 현 런던정치경제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학장인 안드레스 벨라스코는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비영리 국제미디어조직인 ‘프로젝트 신디케이트’에 10월28일 기고한 글 '포위된 산티아고'에는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다. 먼저 그는 정말로 상승하는 물가가 배경인지를 따진다. 칠레는 인플레이션의 역사를 갖고 있고 좀 더 번성하는 도시인 산티아고 물가가 다른 남미 도시들보다 높다는 것은 맞지만 “지난 9월까지 1년 동안 칠레의 인플레이션은 겨우 2.1%였고 칠레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이 목표치를 밑돌기 때문에 금리를 인하해 왔다”고 지적한다.

칠레의 소득불평등이 매우 심한 편이라는 데도 동의한다. 상위 중간소득 수준의 나라로서 칠레의 지니계수는 지니계수는 2017년 46.6(100이면 완전 불평등)이다. 하지만 그는 세계은행 통계를 이용해 칠레의 지니계수가 피노체트 독재정권에서 민주주의로 이행이 시작된 1990년 57.2에서 꾸준히 하락해 왔다며 “소득불평등 증가가 시민 불만의 배후에 있다는 관념은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광범위한 일상생활 영역으로 시장과 이윤추구가 너무 침투한 데 대해 칠레인들의 염증이 표출된 것이라는 분석과도 거리를 둔다. 각종 칠레 여론조사는 “물과 전기의 공급에서 건강보험과 연기금 행정에 이르기까지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적 기업들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을 보여준다”면서도 동시에 “병원, 보건소, 돌봄시설 등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열악한 질에 대한 공중의 분노도 드러내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칠레 부모의 절반 이상이 무료 국립학교에 들여보낼 수 있음에도 수업료를 동반하는 민간 운영 학교에 자녀를 보낸다는 것이다. 이런 평가를 뒷받침하는 사례로 2017년 대선에서 이념적 스펙트럼을 가로질러 많은 칠레인들이 억만장자 사업가이자 성장을 자본주의의 열렬한 전도사인 현 대통령 세바스티안 피녜라에게 투표한 것을 꼽는다.

칠레 수도 산티아고 바케다노 광장의 시위대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칠레 수도 산티아고 바케다노 광장의 시위대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그는 “하필이면 왜 지금, 그리고 칠레인가?”라고 물으며 몇 가지 배경을 거론한다. 첫째, 영국, 브라질, 홍콩, 에콰도르 등에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는데, 시위의 촉발 요인이 무엇이든 급속한 사회적 변화가 이미 깔려있는 긴장과 모순에 군불을 지핀다는 것이다.

둘째, 전반적인 낮은 물가에도 전기, 의약, 화장지, 닭, 장거리 버스회사 등 가계에 민감한 일부 품목들의 가격은 높고 상승하고 있는데, 그 배경에 바로 독점이 있음을 강조한다. 칠레에서 담합과 높은 가격 설정이 새로운 일은 아니지만, 강력한 규제와 처벌로 몇 달에 한 번씩 관련 추문이 터지면서 시민의 의식과 분노가 고양됐다는 것이다.

그가 세 번째로 꼽는 요인은 칠레 노동력의 3분의 1이 자영업이나 가사노동 등 비공식 부문에 종사한다는 점이다. 공식 직업을 가진 이들도 대부분이 단기간 계약노동에 종사한다. “여성과 청년의 고용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가장 낮다. 차별은 만연해 있다. 가계의 생계를 책임지는 수십 만 명의 여성이 일자리가 없고, 현재 일자리가 있는 수백 만 명의 노동자들도 내일 소득을 벌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업률은 약 7%이고 임금이 물가보다 높게 오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고용구조의 빈약한 속살이 불만이 터지는 비옥한 환경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네 번째 배경은, 한국에도 시사적이다.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역설이다. 맞춤형 일자리 계획, 실제적 제재를 갖춘 차별금지법, 해고수당의 현대화 등 필요한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내부자들이 가로막았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불안정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시장 외부자들은 대표되지 않았고, 두 자녀를 두고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둔 실업 상태의 청년 여성을 대변하는 정치권의 목소리는 없었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빈약한 연금으로 인해 삶의 취약성을 느끼는 시민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시장이 잘 기능하지 못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칠레인들은 자신들의 계정에 20년 미만 저축한 채 은퇴한다 … 기대수명의 급증으로 인해 은퇴 이후 20년 이상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저축 수익률은 글로벌 실질금리의 하락과 함께 지금까지 계속 줄고 있다 … 칠레의 베이비붐 세대가 사적연금 시스템 아래에서 중산층이 옥죔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벨라스코가 지적하는 여섯째 요인도 한국에 매우 시사적이다. 최순실씨의 딸에 이어 조국 사태에서도 드러난 엘리트층의 ‘타락한 능력주의’의 문제다. 특히 부모의 부와 지위, 영향력이 자식의 교육을 좌우하면서 교육 세습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은 칠레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기업 지도자들과 정부 각료들은 산티아고에 있는 한 줌의 중학교 출신인 경향이 있다. 특히 현재처럼 우파 정당이 집권했을 때 더욱 그렇다”고 꼬집었다. 대학 졸업 뒤 좋은 일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많은 청년들이 성적보다 집안 배경과 연줄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엘리트들이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사는 상징적인 사례로서 그는 대통령 영부인인 세실리아 모렐이 시위대의 약탈을 “외계인의 침략”으로 묘사한 사건을 꼽았다.

당연히 엘리트에 대한 분노는 칠레에 만연해 있다고 한다. 특히 정치권에 대한 조소가 깊다고 한다. 이 역시 한국과 비슷하다. 2018년 여론조사를 보면, 칠레 국민의 70%가 소수의 권력집단의 혜택을 위해 이 나라가 통치되고 있다고 믿었다. 국회와 정당에 대한 신뢰는 각각 17%, 14%에 그쳤다. “30년 전 민주주의로 이행기 동안 민간 정치인에 대한 높은 존경심은 편협성과 선거자금 추문에 자리를 내줬다.” 국회의원 임기제한 부재와 남미에서 손꼽힐 정도로 높은 의원 세비는 공중의 분노를 끌어들이는 “거대한 자석”이라고 한다.

벨라스코는 “지금은 사회계약을 다시 작성하고 시민들의 분노의 원천을 단호하게 해결할 기회가 있는 때”라고 말한다. 하지만 “두려움과 분열로 얼룩진 지금의 환경이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에서처럼 포퓰리스트에게 권력을 가져다줄” 위험을 경계한다.

벨라스코의 분석은 칠레의 시위가 홍콩의 민주화 시위와는 다른 종류의 것임을 보여준다. 어쩌면 칠레의 시위는 또 다른 전문가의 분석처럼 ‘실패한 글로벌화’(‘칠레 모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칠레는 남미에서 기업 편향적인 글로벌화의 수혜자였다)와 이것이 낳은 부작용에 대한 대안 부재 또는 개혁의 실패가 경제적 좌절을 증폭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사소한 계기로 촉발된 항의시위에 대한 정부의 과잉대응이 시위의 양상을 바꿔버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미 적어도 19명이 사망하고 헤아릴 수 없는 칠레 시민들이 부상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칠레 정부가 중국공산당 식 전술로 대응하고 있다고 비꼰다. 제복을 착용한 군 장교들에 둘러싸인 채 “칠레는 전쟁 중”이라는 현 대통령 세바스티안 피녜라의 언급은 매우 불길하다.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해서 불거진 경제적 문제에 대해 이미 비상사태를 선포한 피녜라 정부가 ‘폭도’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나서는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다면, 이는 30년 전 피노체트르 몰아내고 민주주의로 이행한 이래 칠레가 겪을지도 모르는 최대 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코노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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