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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국양제’에 접근하는 중국․홍콩 지식인들의 ‘위선’
‘일국양제’에 접근하는 중국․홍콩 지식인들의 ‘위선’
  • 조준상 선임기자
  • 승인 2019.11.22 1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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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국양제=‘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의 통합적 일부
미국보다 심각한 홍콩의 불평등 말하면서 중국 불평등 언급 없어
‘남의 나라 일 간섭 말라’ 말할 자유는 중국 본토에 없어

[이코노미21 조준상 선임기자] 아마도 역사는 홍콩 사태만큼 중국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건은 없었다고 기록할 듯하다. ‘자치’와 ‘자율’을 존중하라는, 덩샤오핑이 홍콩을 반환받으며 1997년 약속한 ‘일국양제’를 지키라는 홍콩 시민들의 요구에 대한 중국의 지식분자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철저한 ‘위선’과 ‘이중성’으로 얼룩져 있다.

이런 태도는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다. 몇 해 전 경험한 사드 사태에 대한 터무니없는 무차별한 경제보복이 그렇다. 원인은 ‘북한 핵미사일’이었다. 사드 배치의 실효성 논란을 떠나 국가안보 차원에서 한국 정부는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북한 핵미사일 문제가 해결되면 사드 배치는 되돌릴 수 있는 가역(可易)의 성질이다.

사드 배치에 수반되는 레이더가 중국의 안보를 위협한다는 게 중국의 속내지만 핑계의 성격이 강하다. 사드 레이더가 아니더라도 이미 중국을 속속들이 파악하는 성능을 갖춘, 미국의 해상 기반 X밴드 레이더는 이미 가동되고 있다. 그렇게 중국은 무차별한 경제보복을 자행했고, 이 과정에서 상당수 한국인들의 마음은 중국을 떠났다. 유커들이 얼마나 더 오는지 계산기를 두드리는 문제가 더 이상 아니라는 얘기다.

유엔을 포함한 국제기구에서는 인권과 민주주의 사안과 관련해 중국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논점을 흐리면서 회의를 공전시키는지에 대한 적나라한 증언이 수두룩하게 널려 있다. 며칠 전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의 동북아 미세먼지에 대한 보도행태만 봐도 그렇다. 한국 환경부 산하 국립환경연구원은 11월19일 ‘동북아 장거리 이동 대기오염물질 국제 공동연구’ 요약 보고서를 펴냈다. 한·중·일 첫 공동연구 결과였다. 핵심 내용은 한국에서 발생하는 초미세먼지(PM-2.5) 중 51.2%는 국내 영향에 따른 것이고, 32%는 중국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은 국내 요인이 각각 자국 오염의 91%, 55.4%를 설명했다.

이에 대해 글로벌타임스는 11월20일 ‘동북아 지역 스모그에서 중국이 비난받을 이유가 없음을 연구는 보여준다’(Study shows China not to blame for regional smog)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의 미세먼지는 실제로 ‘메이드 인 코리아’임이 드러났다”며 중국을 한국 미세먼지의 주범으로 꼽아온 “(한국의) 부정확한 보도를 강하게 반박한다”고 보도했다. 중국발 요인이 32%를 설명한다는 점은 아예 지적하지도 않으며 중국은 비난받아선 안 된다고 강변한 것이다.

중국이 미국이 배후에 있는 '색깔 혁명'으로 낙인찍고 있는 홍콩 사태의 애초 발단은 지난 6월 인권과 정치 탄압의 수단으로 악용될 위험성이 큰 송환법 개정 반대였다. 사진: CNN
중국이 미국이 배후에 있는 '색깔 혁명'으로 낙인찍고 있는
홍콩 사태의 애초 발단은 지난 6월 인권과 정치 탄압에 악용될 위험성이 큰
송환법 개정 반대였다. 사진: CNN

이런 식의 ‘논점 흐리기’나 ‘물 타기’는 홍콩 사태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시위의 폭력성과 과격성을 부각시키는 수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서도 비슷하니 생략한다. 지난 8월28일 국제적인 이슈들에 대한 논평과 의견을 모아 배포하는 비영리 미디어기구인 ‘프로젝트 신디케이트’에 게재한 ‘홍콩의 실질적 문제는 불평등’이라는 글은, 시진핑 정부가 말하는 ‘일국양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속내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홍콩국제금융연구소 소장 샤오 겅과 홍콩대학 아시아글로벌연구소 특별연구원 앤드루 셩이 공동 기고한 이 글은 “위기시에 감성이 이성을 압도하고 극적이고 기만적인 화법이 뿌리를 내리기는 쉽다”면서 홍콩 사태를 “이 경향은 독재와 민주주의 사이의 더 넓은 글로벌한 투쟁을 상징하는 문화 충돌로 소요를 틀 짓는 언론보도가 예증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화법의 문제는 “민주주의를 복지 향상과 동의어로 취급하곤 한다”는 데 있다며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언급하며 “중앙집중적 권위주의 시스템은 분권적이고 비효율적인 민주체제보다 우월한 경제적 결과를 전달할 수 있다”고 내세운다. 그러면서 “홍콩 사람들의 좌절의 근저에 있는 강력하고 종종 과과되는 요인은 불평등”이라고 지적한다. 중앙집중적 권위주의 시스템(중국)이 우월한 경제적 결과를 바탕으로 복지 향상에서 민주주의보다 나을 수 있음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독재와 민주주의의 싸움’으로 홍콩 사태를 바라보는 태도는 감성적이고 기만적인 화법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중앙집권적 권위주의 체제가 경제성과가 뛰어날 수 있다. 중국의 경제성장이 절대빈곤을 해결해 왔음도 인정할 수 있다. 문제는 이 글이 동원하는 논거의 이중성이다. 홍콩의 지니계수가 2017년 6월 0.539를 기록해 45년 만의 최고 수준을 기록했고, 이는 주요한 발전국 중 가장 높은 미국의 0.411보다 높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공식 통계가 일천하긴 하지만 중국의 불평등이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교수 토마 피케티의 분석처럼 미국를 빼박았음은 언급하지 않는다(http://www.economy21.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6368). 홍콩의 1인당 거주공간이 16㎡인 반면 상하이는 36㎡이고, 홍콩 주민의 거의 45%가 공공임대주택이나 보조금 주택에서 사는 반면 중국 가구의 90%가 적어도 집 한 채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도 든다. 중국이 낫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커우’로 불리는 농민공들이 번듯한 아파트 등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거주이전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허용받아 서남 해안 공업지대로 이동했다는 사실에 대해 이들은 침묵한다.

이들은 홍콩에서 불평등 해결의 실패는 중국 본토와는 관계가 없는, 선거제 민주주의에 기초한 홍콩 자치정부의 실패라고 주장한다. “중국 정부가 본토에서 하는 것처럼 기득권을 가라앉힐 강력한 개혁을 추진할 수 없기 때문에, (홍콩 의회인) 입법위원회는 더 많은 공공주택을 위한 토지 할당과 같은, 가격을 낮추는 조처들을 봉쇄시키고자 하는 부동산 개발업자의 영향력에도 취약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중국의 공식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고유한 중국공산당 내부의 엘리트 계층의 엄청난 부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권력투쟁을 위해 독재적 기술관료제에 기초한 법치의 선택적 적용이 낳는 ‘이중잣대’와 암투는 언급하지 않는다. '일국양제'는 다른 체제를 인정하며 이런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다.

글은 스쳐지나가듯이 ‘국제무대에서 자유롭게 중국을 비판할 수 있음’은 홍콩이 갖는 가치의 하나라고 언급한다. 하지만 “일부 시위대가 미국과 같은 외부자에 개입을 호소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중미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장기적이고 파괴적인 미국 주도의 ‘민주주의 형성’ 노력의 기록을 평가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동시대국제관계중국연구소’ 연구원 후징시앙처럼 “홍콩에서 일어나는 일은 미국 정부가 조직적, 계획적 지원을 통해 지원을 제공하는 ‘색깔혁명’의 교본”이라고 원색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이런 판단에 은근히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시진핑 정부는 일종의 미사여구로 내세우면서도 ‘일국양제’의 의미를 정확히 밝힌 바 없다. “영국 통치 아래에서 일부 중국인들이 총독부의 공무원이 됐지만 그들은 단지 정책도구였을 뿐이다 … 영국 통치 아래에 있을 때보다 홍콩은 더 많은 권리를 누리고 있고, 홍콩 사람들이 고도의 자율성을 가지고 홍콩을 관장하고 있다”(리후안 동시대국제관계중국연구소 연구원)고 변죽을 울릴 뿐이다. 하지만 시진핑 체제가 말하는 ‘일국양제’는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의 통합적 일부”라는 것으로 사실상 공식화해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중국적 특색의 핵심은 정치에서는 공산당 일당체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배타적 권력을 갖는 기술관료제이고, 경제에서는 국영기업이 사적기업과 양날개처럼 시장경제의 지주이자 기반으로 촘촘히 박혀 있는 체제다. 그걸 사회주의라고 부르지만 자본주의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의 통합적 일부”이기에 홍콩특별행정장관 직선제 같은 것은 터무니없는 소리다. 공산당과 배타적 권력을 갖는 기술관료제의 통제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진다는 얘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홍콩특별행정장관에 대한 직선제를 수용한다면, 아마도 친중국계가 지배적인 다수가 됐거나 많은 홍콩인들이 일자리를 얻기 위해 본토로 빠져나가는 상황일 것이다.

한국에 있는 중국 유학생들은 ‘왜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하느냐?’고 말한다. 그러면서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한국내 목소리를 훼손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시민으로서 ‘권리’와 ‘의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에 물든 나머지 민주공화주의에 대한 의미가 우리와는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중국 유학생들이 홍콩 시위 지지 움직임을 방해하는 일이 벌어져 왔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중국 유학생들을 비난하지만은 말자는 성찰도 있다. 2013년 미국 예일대 연구자들의 연구는 미국 캠퍼스에 있는 중국 학생들의 45%가 우울증 증세를, 29%가 불안 징후를 경험했다고 보고했다. 전체 학생의 13%만이 우울증과 불안 증세를 보인 점에 비춰보면 놀라운 수치였다. 중국 유학생들끼리만 어울리도록 방치하는 미국 교육문화가 이런 결과가 나오는 데 일조한 게 아닌지 돌아보자는 제안이다. 본국에서 누리지 못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중국 유학생의 ‘방종’을 보며 이런 돌아봄도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젊은층도 힘들지만 타인에 대한 관심도 지금보다 더 가져보자는 얘기다. 학교 당국들이 중국 유학생들이 내는 수업료에 목을 매는 태도만을 보여서는 안될 것이다. 그만큼 중국 옆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한 한국의 자존감도 튼실해질 것이다. [이코노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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