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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정부에 한일관계는 평화헌법 개정의 종속변수①
아베 정부에 한일관계는 평화헌법 개정의 종속변수①
  • 조준상 선임기자
  • 승인 2020.01.28 15: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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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견제 위한 인도태평양 전략이 아베 정부의 나침반
역내 하위맹주 놓치지 않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

<특집3 – 동북아경제질서 재편 - 한일관계>

 기사는 월간지 이코노미21’ 1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기사량이 너무 많아 한번에 읽기에 부담된다는 독자들의 의견을 반영해 두 번에 걸쳐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이코노미21 윤종인 편집기획위원] 하버드대 경제학자 대니 로드릭의 분석을 빌리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는 세 가지 권리의 유기적 구성물이다. 첫째, 국가나 다른 집단의 침해로부터 자산 보유자와 투자자를 보호하는 재산권의 보장이다. 둘째,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경쟁의 보장과 경쟁의 승자가 다른 권리들이 확립하는 제약 속에서 정책을 결정하도록 허용하는 정치권의 보장이다. 셋째, 정의, 안전, 교육, 건강과 같은 공공재의 제공과 법 앞에서 평등을 뜻하는 시민권의 보장이다.

이들 권리의 조합은 사회체제를 분류하는 걸 가능하게 한다. 이를테면 고전적 자유주의 체제는 재산권과 시민권을 보호하지만 반드시 선거권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흔히들 말하는 선거민주주의는 재산권과 정치권을 보장하지만 시민권 보장에는 인색하다. 대부분의 독재국가들에서 보호되는 건 엘리트들의 재산권에 그치기 일쑤다. 로드릭에게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이들 세 권리를 모두 보장하는 체제다. 그러니 현실에서 이를 제대로 구현하는 나라를 찾기란 쉽지 않다. 희소하는 얘기다.

한국이 차지하는 동북아의 독특한 위상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차지하는 위상은 상당히 독특하다. 주변 나라들 누구와 견줘도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구축해온 과정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민주공화주의라고 불러도 무방하다)에 가장 근접해 있다. 몇 차례 위기가 있었고, 내부적인 긴장과 갈등이 여전하기는 하지만 이를 부인하기는 어렵다. 가깝고 먼 이웃나라 일본은 사실상 일당국가다. 중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일당독재 국가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교조주의 정치학의 근저에 깔린 ‘프롤레타리아 독재’ 관념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주석직 임기제 폐지가 말하듯 시진핑 체제 등장 이후 공산당 내부의 유연성까지 줄어들고 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웃나라 북한도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어떤가? ‘새로운 짜르(황제)’라고 불리는 4선 대통령이 19년째 ‘장기집권’ 하고 있다.

한국과 이들 네 나라가 펼치는 동북아시아 질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높은 불확실성과 격랑에 휩싸여 있다. 기본 축은 미국과 중국(+러시아) 사이의 강대국 정치의 부활이다. ‘도광양회’에서 ‘화평굴기’로 이동, ‘중국몽’과 ‘중국제조2025’, 일대일로의 전면화,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협력 강화, 미중 무역‧기술전쟁,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중거리핵전력협정(INF) 탈퇴와 파기 등이 이 기본 축에서 뻗어 나온다.

강대국 정치의 부활 속에서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장 견고한 동맹국인 일본이 곧바로 영향을 받는 건 자연스럽다. 경제의 장기침체와 줄어드는 인구, 중국의 발흥 등을 배경으로 일본에서는 불안한 미래에 대한 우려가 커져 왔다. 그러면서 강경 민족주의자인 아베 신조 총리 등장 이후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는 쪽으로 일찌감치 전략적 방향을 설정했다. 2010년 중국과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 영유권 갈등을 경험한 뒤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민주주의 안보 다이아몬드’ 구상을 공식화시켰다.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미국을 연결하는 전략공간을 설정한 것이다. 이는 2006년 인도와 전략적·글로벌 파트너십 구축, 2007년 태평양과 인도양을 연결하는 ‘두 바다의 교류’ 구상의 종합판 성격을 지닌다(그러면서도 경제적으로는 2018년 10월 시진핑 주석과 정상회담을 통해 중‐일관계 개선과 자유무역 증진, 금융, 무역 등의 분야에 대한 협력 강화에 합의하는 모습을 병행했다). 아베 정부의 이런 구상은 결국 지난 6월 미국 국방부가 발표한 ‘인도태평양 전략보고서’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아베의 인도태평양전략과 미국 없이 달성한 CPTPP의 자신감

트럼프 행정부는 출범하자마자 2017년 1월 제일 가장 먼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를 내던져버렸다. 아베 정부는 이를 포기하지 않고 챙기면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을 2018년 12월30일 출범시켰다. 일본이 주도하며 CPTPP를 출범시켰다는 것은 눈여겨봐야 부분이다. 미국이 빠진 상황에서 일본이 리더십을 발휘하며 전략적 구상을 진전시켰다는 점에서다. 미국이 없이도 해낼 수 있다는 일종의 자신감을 아베 정부가 갖는 계기의 측면이 강하다는 얘기다. 11개 회원국으로 이뤄진 CPTPP는 인구 5억명과 글로벌 국내총생산 10조달러를 포괄하는 무역합의다. 일단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일본, 멕시코, 뉴질랜드, 싱가포르, 베트남 등 7개국과 함께 출발했다. 브루나이, 칠레, 말레이시아, 페루 등 4개국은 협정을 비준하는 대로 합류한다.

아베 정부에게 CPTPP는 트럼프가 재선될 경우 2기 트럼프 행정부 또는 재선에 실패할 경우 민주당 행정부 등 향후 미국을 끌어들이는 일종의 지렛대로 작용할 수도 있다. 대중국 견제는 미국 정치권 모두가 공감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안보 다이아몬드’ 완성을 위해 인도를 끌이들이는 작업도 시간문제다. 당연히 한국에게도 지렛대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아베 정부가 ‘한국이 동맹을 버리고 중국과 가까워지려 한다’는 식의 얘기를 끊임없이 흘리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 있다. 한국이 CPTPP보다 중국이 주도하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가입하려 한다는 얘기를 이런 식으로 에둘러 하는 것이다. 여차하면 CPTPP에서 한국을 배제하겠다는 엄포이기도 하다.

RCEP는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한 TPP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것으로 인도, 일본, 한국, 동남아국가연합 등 역내 16개국을 포괄하려는 구상이다. 2012년 11월부터 협상이 시작돼 2015년부터 해마다 연내 타결을 목표로 내세웠지만 좀처럼 진전되지 못했다. 18개분야 중 합의점을 찾은 부문은 중소기업, 세관수속 등 7개 분야뿐이다.

올해 6월 G20 오사카 정상회의에서 만난 아베와 트럼프. 아베는 미국 견고한 동맹국 위상 유지와 국내 전후헌법 개정 추진의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진=G20
올해 6월 G20 오사카 정상회의에서 만난 아베와 트럼프. 아베는 미국 견고한 동맹국 위상 유지와 국내 전후헌법 개정 추진의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진=G20

한국이나 일본에게 미국은 과거에나 지금이나 안보의 핵심 기둥이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다. 다른 패전국인 독일과 이탈리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유럽연합을 갖고 있다. 이와 달리 일본은 1960년 미국과 체결한 상호협력방위조약이 유일하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경제적‧군사적 발흥은 일본을 존재적으로 불안하게 만든다. 새롭게 강대국 정치에 나서는 러시아는 여전히 미국과 어깨를 겨루는 군사강국이다. 게다가 한국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일본 추월을 거의 목전에 두고 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한국은 안보협력 측면에서 일본의 말을 순순히 듣지 않는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은 언제든 일본 전역을 사정권에 두는 상황에 이르렀다. 동북아 지정학에서 일본이 뒷전으로 밀려날 위험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커지고 있다.

아베의 상수는 전후헌법 개정, 한일관계는 종속변수일 뿐

이런 배경에서 아베 정부는 미국의 강고한 동맹국으로 위상을 강화시키면서 내부적으로는 헌법 개정을 다그치고 있다. 트럼프 당선 이후 영국 총리 테레사 메이에 이어 외국 정상으로서는 두 번째로 개인적 축사를 전한 것은 이를 상징한다. 동맹의 강화와 평화헌법 개정은 겉으로 보기에 모순된다. 동맹이 한층 더 굳건해지면 굳이 평화헌법을 바꿀 유인은 약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은, 아베가 대표하는 일본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미국에 대한 감정은 양가적(ambivalent)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양가적 감정은 일본의 쇠락과 함께 점점 강화하고 있다. 반면 비슷한 양가적 감정이 있었던 한국에서는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 정치의 부활, 중국의 사드 사태에 대한 무차별한 보복 등을 겪으며 점진적으로 약화해 왔다.

한편으로, 일본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미국에 고마워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에서 미국이 작성한 전후 평화헌법에서 많은 혜택을 입었다는 점을 기억한다. 방어 목적에 한정해 군사력 형성과 사용을 제안하는 평화헌법의 울타리 안에서 일본은 서유럽 나라들처럼 경제재건에 힘을 집중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전쟁이 기폭제 구실을 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서유럽에서 이탈리아처럼 일본도 냉전의 최전선에 있었다. 좌파 정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미국은 이탈리아 기민당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다. 마찬가지로 일본 자민당에게도 그렇게 했다. 일본이 사실상 일당국가가 된 건 바로 이런 미국의 개입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일본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헌법이 외국에 의해 부과됐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여기에 과거사를 진지하게 반성하지 않는다는 것이 맞물린다. ‘정치의 연장’으로서 전쟁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권의 훼손이자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보통국가’를 내세워 이를 탈환하고자 한다. 문제는 전후 헌법이 평화적일 뿐 아니라 개인의 권리, 완전한 참정권, 표현의 자유를 담은, 일본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헌법이라는 사실이다. 아베 정부가 추진하는 헌법 개정이 제9조 평화조항만을 바꾸려는 게 아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개헌 추진 과정에서 아베 정부는 이미 중요한 승리를 거뒀다. 특히 교육 부분에서 그렇다. 학교교육의 공식 목표에 ‘애국주의’와 ‘도덕교육’가 포함됐다. 전후 헌법에 간직된 개인의 권리와 자유로운 사고가 아니라 국가에 대한 충성이 어렸을 때부터 일본 국민들에게 주입된다는 뜻이다.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것이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이 일본 청년들에게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역사로 가르치는 것으로 번역되는 건 시간문제에 가깝다. ‘보통국가’라는 아베 정부의 표현은 ‘비민주국가’를 은폐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코노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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