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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미국 흑인 역사의 달] 미국 노예 무역 이야기
[2월 미국 흑인 역사의 달] 미국 노예 무역 이야기
  • 허유진 미국 통신원
  • 승인 2020.09.02 16: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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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역사의 달, 1926년 2월 둘째주에 첫 개최된 후 1976년에 한달로 확대돼
보험금을 노린 ‘종(Zong)호 학살’ 사건은 흑인 노예무역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줘
노예제도는 사라졌지만 사람들을 다양한 위계 구조 속에 희생시키는 형태로 저변화해
노예제도 반대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겪는 다양한 착취를 문제 삼는 계기가 될 수 있어

미국 흑인 역사의 달기획연재는 3번에 걸쳐 게재됩니다. 미국의 아픈 역사로 새겨진 흑인 노예제도.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인종차별 문제의 출발점인 흑인 이민사와 그들의 삶과 애환을 통해 오늘의 시점에서 차별 문제를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연재 순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 편집자 주

[2월 미국 흑인 역사의 달] 미국 노예 무역 이야기

[2월 미국 흑인 역사의 달] 미국 노예 해방 운동가 프레더릭 더글러스

[2월 미국 흑인 역사의 달] 흑인 민권 운동 이야기

 

흑인 역사의 달 (Black History Month)

미국에서는 매년 2흑인 역사의 달을 기념한다. 2월 한 달 동안 진행되는 이 행사는 미국의 아프리카계 흑인 구성원들이 사회 전반에 이룩한 업적을 기억하고 인종적 편견이 만들어내는 부정적인 영향을 드러내는데 목표를 둔다. 이 행사는 1926년 흑인 역사학자인 카터 G. 우드슨과 그가 창립한 연구협회(아프리카 미국인의 삶과 역사 연구협회)의 회원들이 고안했다. 처음에는 2월 둘째 주에 니그로 역사의 주’(Negro History Week)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 그리고 1976년 한 달로 확대되어 흑인 역사의 달’(Black History Month)로 공식 제정되었다.

따라서 매년 2월 흑인 역사의 달이 돌아오면 미국 전역에서 다채로운 행사들이 열린다. 학교에서는 평등 선서식이 열리고 지역 기관에서는 학술회나 예술 전시회 그리고 흑인 역사 영화제까지 다양한 행사들이 폭넓게 진행된다.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역사, 노예무역

디아스포라

흑인 역사의 달은 아프리카인들의 디아스포라 역사의 아픔을 기억하는 달이기도 하다. 디아스포라(Diaspora)란 고대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로 본래 살던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이 용어는 팔레스타인을 떠난 유대인들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그들의 관습을 지키며 사는 것을 의미했다. 이후에 이 용어는 집단의 이동과 정착이라는 광범위한 의미로 거듭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아프리카의 집단 이동은 자발적인 이주가 아닌 무력을 통해 강제로 이루어진 대규모 디아스포라였다. 16세기경부터 유럽계 백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대서양 노예무역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대거 이동시켰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아주 오래전 신대륙이 발견되면서 아메리카는 유럽인들에게 기름진 풍요를 약속하는 땅이었다. 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만들어 금과 은을 캐내었고 수많은 담뱃잎을 땅에서 얻어냈으며, 사탕수수를 심어 유럽인들이 그토록 열광했던 설탕을 만들어냈다.

위와 같은 일들이 처음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강제 노동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염병으로 원주민들이 사라지자 그 자리를 채울 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을 납치해 아메리카로 보내어 농장의 노예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일명 노예무역이 시작된 것이다.

아프리카로 진출하다

아프리카를 향한 유럽인들의 뚜렷한 목적의식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유럽인들의 배가 아프리카 서쪽 해변에 닻을 내리면 상대적으로 불충분한 무기를 가진 아프리카인들은 그들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유럽인들의 거침없는 노예사냥이 시작되면 정박한 배에 납치된 아프리카 사람들이 하나 둘씩 태워졌다.

불행하게도 아프리카의 여러 부족들은 자기 자신이 노예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붙잡아다가 유럽인들에게 바쳤다. 그렇게 유럽인들은 그들의 배에 총이나 보석 같은 물건을 실어다가 아프리카로 와서 같은 아프리카인들로부터 붙잡힌 포로들과 바꾸었다. 그리고 그 포로들을 배에 태워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노예로 판 뒤 설탕 같은 자원을 챙겨 유럽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인신매매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는 삼각 무역이다. 이는 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라는 세 개의 대륙을 빙빙 왕래했던 유럽인들이 황홀한 이윤을 맛볼 수 있었던 찬란한 시기였다. 때문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삶이 물건으로 맞바꾸어졌다. 이렇게 300년이 동안 지속된 노예무역을 통해 약 1500만명에서 최대 4000만명에 달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이나 서인도제도의 노예로 팔려 나갔다.

노예선, 생명의 존엄이 사라진 곳

영국 '브룩스 (Brookes) ' 노예선의 설계도 (1788년) : 가장 큰 노예선 중 하나인 브룩스 노예선, 1인 허용 공간은 높이 약 180cm과 폭 40cm이다. 여성과 아이들에게는 이보다 더 적은 공간이 주어졌다.
영국 '브룩스 (Brookes) ' 노예선의 설계도 (1788년) : 가장 큰 노예선 중 하나인 브룩스 노예선, 1인 허용 공간은 높이 약 180cm과 폭 40cm이다. 여성과 아이들에게는 이보다 더 적은 공간이 주어졌다.

노예제도가 얼마나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역사였는지를 돌아볼 때 그 중심에는 노예선이 있다. 노예선이란 아프리카에서 잡아들인 사람을 태워 나르던 무역선이다. 이는 노예제도의 극단적인 잔인함과 졸렬한 인간 본성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성을 지닌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배에 태울 것!” 잡아들인 노예가 많을수록 더 큰 대가를 얻을 수 있다는 단순 명확한 경제관념은 그들을 실어 나르던 배 안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윤의 최대화를 위해 배에는 언제나 선박이 수용할 수 있는 인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태워졌고 그들의 손과 발에는 쇠사슬이 채워졌다.

그렇게 배에 태워진 사람들은 배의 공간을 절약하기 위해 갑판 아래 바닥에 일렬로 누워서 생활해야 했다. 때문에 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공간의 너비는 몸만 간신히 뒤척일 정도로 그 폭이 50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심한 경우에는 사람들이 차곡차곡 위아래로 포개어져 탑을 쌓듯 누워야 했다. 때문에 이동이 자유롭지 않아 누운 상태로 용변을 봐야 했고 배설물은 그대로 다른 사람의 몸을 향해 떨어졌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배는 언제나 멀미와 구토를 유발했고 열악한 위생 시설은 배설물 처리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그들은 갑판 아래에서 지내면서 산소 부족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악취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배에는 언제나 노예들이 가득 태워졌기 때문에 그만큼 물과 식량이 부족했다. 식사는 하루 한 끼에서 두 끼 정도 옥수수를 쑨 죽과 같은 음식이 주어졌고 이마저도 상태가 매우 부실해서 영양실조를 불러왔다. 물 부족은 탈수증을 유발했고 밀폐된 공간은 전염병을 불러왔다. 질식이나 병으로 죽은 사람은 다음날 바다에 던져졌는데 이로 인해 노예선이 지나가는 항로에는 상어들이 항상 모여들었다. 노예선은 말 그대로 바다 한가운데 놓여있는 죽음의 장소였다.

이러한 상황을 견디기 힘든 나머지 목숨을 끊기 위해 음식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도구를 통해 강제로 입이 벌려져 음식을 먹어야 했다. 반란을 일으키는 사람은 철저하게 고문당했으며 그들의 손과 발이 잘려나갔다. 이러한 방식은 이를 지켜보는 다른 노예들에게 극도의 두려움을 주었기 때문에 그들의 반항을 잠재우는 수단이 되곤 했다.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까지 도착하려면 기본 한 달부터 수개월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 위와 같은 반복적인 상황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배에서 죽음을 당했다. 노예에 관한 논문을 쓴 알론소 드 산도발(Alonso de Sandoval) (1577-1652)은 그 당시 일어난 노예선의 가혹한 실상을 연구했던 사람이다. 노예들과 직접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그의 연구는 노예선에서 이루어진 잔인한 학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되었다.

그림으로 만나는 고통스러운 역사

노예선 (The Slave Ship) (1840, William Turner
노예선 (The Slave Ship) (1840, William Turner

(Zong)호 학살이라 부르는 사건은 우리에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을 안겨 준다. 17819월 영국의 노예선 종(Zong)호는 아프리카에서 노예 470여명을 배에 태워 카리브해의 자메이카 섬으로 향한다. 보통의 노예선들이 그러하듯 종호의 선장 콜링우드 역시 정원이 훨씬 넘는 인원을 배에 태웠다. 그런데 항해 도중 배에 질병이 발생하며 수십 명의 노예가 죽고 수많은 인원이 영양실조와 병에 걸리게 된다. 이에 선장과 선원들은 3일 동안 133명의 병든 노예들을 산 채로 배 밖으로 던진다.

기막힐 정도로 참담하기 그지없는 이 사건은 다름 아닌 보험금 수령을 노린 선택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노예가 배에서 죽으면 보험금을 받을 수 없지만 노예가 바다에 빠져 사라질 경우에는 재산 손실로 인한 배상금을 탄다는 계약 조건 때문이었다. 이는 일종의 화물 보험과 거의 다름없었다. 이에 사람이 아닌 화물로 취급되었던 노예들은 손발이 묶인 채 바다에 떠밀려져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 배가 자메이카의 블랙 리버 항구에 도착하자 선장은 보험 회사에 보험금을 청구했고 이 과정에서 선장과 선원들이 노예들을 바다에 버린 증거들이 드러나게 된다. 이에 한 때 노예였지만 자유인이 된 영국의 노예제도 반대 운동가 우다 에키 아노는 노예제 폐지론자인 영국인 그랜빌 샤프에게 이러한 학살 소식을 전한다. 이에 그랜빌 샤프는 종 호 선원들을 살인 혐의로 고발하지만 결국 법원은 선원들의 행위를 살인죄로 인정하지 않는다. 때문에 초기에 종 호 학살 사건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그랜빌은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분투했고 결국 이 일은 18세기 후반 노예제 폐지의 대중 운동을 자극하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2007, 자메이카의 블랙 리버 항구에는 종 호에서 살해된 사람들을 위한 기념비가 설치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60여 년이 지나고 1840년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는 당시의 상황을 그려낸 작품 노예선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림에는 폭풍우 치는 바다에 산 채로 던져진 노예들(그림 오른쪽 아래)과 그들을 버리고 저만치 멀어지는 노예선(왼쪽 위) 그리고 그 누구도 이들을 구하러 오지 않을 무심한 망망대해가 오롯이 담겨있다. 강렬한 색채의 대비를 통해 주체할 수 없는 혼란과 절망적인 무력감을 그대로 드러내는 이 작품은 그림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노예제가 보여주는 물질만능주의의 그 끝이 어떤 모습인지를 고발하고 있다.

노예 무역의 금지 (The Abolition of the Slave Trade) (1792), Isaac Cruikshank
노예 무역의 금지 (The Abolition of the Slave Trade) (1792), Isaac Cruikshank

영국의 노예선 리커버리(Recovery)호의 선장 존 킴버는 1791년 아프리카에서 300여명의 노예들을 싣고 바다를 건넌다. 선장은 노예가 죽을수록 그만큼 손해가 크기 때문에 가능한 많은 사람을 산 채로 옮기는 것을 원했다. 하지만 노예들이 생활하는 공간에는 언제나 구토와 배설물이 끊이질 않았고 이로 인해 노예들의 건강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그래서 선장은 노예들은 갑판 위로 나오게 해서 바람을 쐬게 했다. 이때 그는 질병을 막는 방법의 일환으로 그들에게 옷을 벗고 춤을 추라고 명령한다.

이에 어린 여자 노예 두 명이 이를 거부하자 선장은 그들의 발목을 줄로 묶어 거꾸로 매달아 놓은 뒤 사정없이 채찍질을 했다. 결국 온몸에 멍이 들고 살가죽이 부르튼 채 피범벅이 된 두 명의 여성은 배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이때 배에 탔던 외과 의사 토마스 다울링은 영국 노예제 폐지론자 윌버포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한다. 윌버포스는 이를 하원에서 연설하며 선장을 살인 혐의로 고발하지만 결국 희생자들은 학대가 아닌 질병으로 사망한 것이라며 선장의 무죄판결이 이루어진다.

이 재판은 언론에서 큰 주목을 받게 된다. 때문에 이 사건은 노예 선원들이 노예를 살해하면 죄를 물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사회와 정치 풍자 미술가인 아이작 크뤽생크가 그린 위 그림은 채찍을 들고 있는 선장과 거꾸로 매달려 있는 15세 소녀의 모습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보는 이에게 경악과 침묵을 안겨주는 이 그림은 당시 소녀가 느꼈을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과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1792년 영국 런던에서 출판된 이 판화는 노예제 폐지를 위한 대중 운동의 핵심적인 이미지가 된다.

미국으로 도착한 아프리카인들, 노예의 삶을 살다

기나긴 시간 동안 죽음의 바다인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아프리카인들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온다. 그들은 미국 남부 농장 주인들에게 팔려 본격적인 농장 노예로서의 삶을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적응하기 힘든 기후, 가족과의 분리, 밤낮없이 일해야 하는 하루 일과. 그들은 상상할 수 있었을까. 자신의 삶이 듣도 보도 못한 낯선 곳에 송두리째 묶여 고통 받으며 살아야 하는 이러한 앞날을.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일해야 했지만 합당한 보수를 받을 수 없었으며 게으름을 피운다고 여겨지면 노예 감독관에게 사정없이 채찍을 맞아야 했다. 그렇게 그들은 삶의 자유를 잃고 한 개인이 아닌 농장의 재산이 되어 기나긴 시대 동안 노동력을 착취당하게 된다.

목화의 비극

18세기 중엽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인해 기계를 통한 면직물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다. 양모 대신 면직물에 대한 전 세계의 요구가 높아지면서 그것의 재료가 되는 목화는 매우 큰돈이 되는 자원이 되었다. 이때 땅 넓고 적당한 강우량을 가진 미국 남부는 목화를 키우기에 더없이 알맞은 곳이었다. 따라서 남부는 담배 경작지에서 목화 재배의 중심 무대로 거듭 재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노동의 당사자들은 어디까지나 노예들이었다.

무엇보다 목화는 사람을 참으로 고달프게 하는 작물이었다. 목화송이를 손으로 하나하나 따야 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목화솜에서 씨를 일일이 빼내는 작업은 매우 수고로운 노동 강도를 요구했다. 목화농사는 이처럼 사람손이 참 많이 가는 일이지만 그 고됨은 응당 노예들이 견뎌내야 할 몫이었다.

후에 목화솜에서 씨앗을 빼내는 기계가 발명되지만 이는 더욱더 많은 목화 생산량을 가져와 결국 남부 목화밭은 무서운 속도로 늘어나게 된다. 이에 밭에서 일할 더 많은 인력을 필요해지며 더 많은 노예들이 목화밭에 투입되어 강제 노동을 당하게 된다. 이로서 미국 남부의 농장들과 노예제도는 더욱더 긴밀한 실타래로 묶여 면 산업의 견고한 뼈대를 지탱하게 된다. 이러한 성공적인 의류 혁명은 목화밭에서 비참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노예들의 강제 노동이 있기에 가능했다.

823, 노예 혁명을 기념하며

매년 823일은 유네스코가 정한 국제 노예무역 철폐 기념의 날이다. 이는 노예무역의 잔혹한 역사를 환기시키고 노예해방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1997년에 제정되었다. 이 기념일이 만들어지게 된 뿌리는 프랑스의 식민지 생도맹그(Saint Domingue)에서 일어난 노예 혁명에 있다. 1791823일 생도맹그 사탕수수 농장의 노예들은 백인 주인들에 맞서 봉기를 일으킨다. 그리고 12년 동안의 기나긴 투쟁 뒤 세계 최초로 흑인들이 세운 아이티 공화국이 탄생한다. 아이티 혁명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대서양 노예무역 폐지의 부싯돌이 되어 다른 지역의 노예 봉기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206년이 지난 후, 혁명이 일어난 823일과 같은 날짜를 통해 국제 노예무역 철폐 기념의 날로 다시 태어난다.

이처럼 미국에서 매년 2월에 돌아오는 흑인 역사의 달과 세계적으로 기념되는 노예무역 철폐 기념의 날모두 인류 역사에서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노예제도의 비극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

노예제도는 과연 사라졌는가

우리가 노예제도를 떠올릴 때 기분을 찡그리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그 노예가 만약 나였다면.”이라고 상상할 때 느껴지는 고통의 공감 때문일 것이다.

현재 노예 제도는 지구상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여기서 우리에게 질문은 시작된다. 노예제도는 과연 끝이 났을까? 노예제도는 인류역사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부끄러운 과거였지만 현재 그것은 여전히 다른 형태로 우리 사회 저변에 깔려 수많은 사람들을 다양한 위계 구조 아래 희생시키고 있다. 개인과 집단을 힘으로 눌러 갈취한 약자의 권리를 자신의 이익에 보태는 현상 역시 또 다른 현대식 노예제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노예의 또 다른 사전적 의미는 인간의 존엄성마저 버리면서 어떤 목적에 얽매인 사람이다. 이는 비단 노예란 물리적인 힘에 지배당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타자를 억압하면서까지 그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의 존엄성마저 버리면서’. 과연 우리에게 내다 버릴 존엄성이 있을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은 과연 높고 엄숙한 존재였을까. 위에서 누군가가 누르는 위계의 힘만큼 나 역시 또 다른 누군가를 밟고 훼손하며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노예제도에 반대한다는 것은 현대 사회 속에서 인간이 겪는 다양한 착취를 문제 삼을 수 있는 또 다른 계기가 될 수 있다. 동시에 노예제도의 불합리함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은 우리가 파괴하고 있는 존재에 대한 성찰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물음들은 더 나아가 인간의 또 다른 노예로서 공장식 축산을 통해 대량 사육 당하는 수많은 동물들을 위한 질문으로도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식의 방향 속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또 다른 노예뿐이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는 평등한 사회를 위해 차별에 저항했던 의지와 연결이 끊임없이 존재해왔다. 과거에도 그러했듯 이 시대에 존재하는 현대판 노예제도의 악습을 바로잡아 나갈 수 있는 고민과 힘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스스로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Slavery fetters your progress, it is the enemy of improvement; the deadly foe of education; it fosters pride; it breeds indolence; it promotes vice; it shelters crime; it is a curse of the earth that supports it, and yet you cling to it as if it were the sheet anchor of all your hopes.”

노예제도는 여러분의 진보를 훼손합니다그것은 발전의 적입니다교육의 치명적인 적입니다그것은 오만을 만듭니다그것은 나태를 낳습니다그것은 사악함을 장려합니다그것은 범죄를 숨겨 줍니다노예제도를 지지하는 땅에서 그것은 하나의 저주입니다그러나 아직도 당신들은 마치 그것이 당신들이 가진 모든 희망을 이루게 해줄 최후의 수단인 양 그것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미국 노예 해방 운동가 프레더릭의 연설 <칼 세이건 & 앤 드류안의악령이 출몰하는 세상’(The Demon-Haunted World)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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