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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여자)는 어떻게 서로를 애정하는가” [헤어질 결심]
“남자(여자)는 어떻게 서로를 애정하는가” [헤어질 결심]
  • 박수영 영화평론가
  • 승인 2022.07.08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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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코노미21] [박수영] 산 정상에서 추락한 남자의 변사 사건을 담당하게 된 해준(박해일 분)은 중국에서 온 이주민인 남자의 아내 서래(탕웨이 분)와 인터뷰하는 중 서래의 침착한 태도와 정확한 단어 구사에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매일 밤 이어지는 잠복과 탐문수사를 거치며 해준의 감정은 점차 애정으로 변하게 되고, 때마침 남자의 죽음이 자살일 수 있다는 증거들이 하나씩 나오게 된다. 직속 부하인 수완(고경표 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살로 수사를 종결한 해준은 서래를 집에 초대하여 직접 만든 식사를 대접하며 오랜 숙원인 미결 살인사건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서래로부터 사건을 해결할 결정적 단서를 얻게 된다. 두 사람은 ’현대인’답지 않은 품위와 침착함으로 더욱 친밀해지지만, 해준은 우연한 계기로 자신의 자살 판단을 뒤집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지난 75회 칸 영화제 최고의 화재작인 ‘헤어질 결심’은 2003년 ‘올드보이’, 2009년 ‘박쥐’로 두 차례 수상한 바 있는 ‘칸느 박’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다. 영화는 크게 위에 소개한 전반부와 거울처럼 반전된 상황이 진행되는 후반부로 이루어져 있다. 전반부는 “남자는 어떻게 애정하는가”, 후반부를 “여자는 어떻게 애정하는가”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물론 박찬욱의 영화답게, 이 애정은 지극히 모호하며 결코 일반적이지는 않다.)

해준은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단정하고 예의바른 사람이다. 동시에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못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20여개가 넘는 주머니가 달려 있는 특수한 맞춤옷을 입고, 각각의 주머니에는 정해진 물건들만 넣어두며, 자신을 동경하여 근무지까지 변경하며 따라온 후배 수완과 팀을 이루고는 있지만 그에게는 기초적인 조사만 맡길 뿐, 수사에 관한 주요한 정보는 공유하고 있지 않는 듯하다. (전반부에서는 현장에 관한 메모를 자신의 스마트워치로만 진행하는데, 후반부에서는 파트너인 여연수 (김신영 분) 형사에게 내용을 받아 적게 한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일하는 주말부부인 아내 정안 (이정현 분)은 자신이 이과라서 매사 정확하고 딱 떨어지게 정리해야 한다고 해준에게 말하지만, 사실 이 말은 정확하게 해준을 지칭하는 말이다. (특히 후반부에서는 ‘이과’인 정안이 사실은 전혀 ‘이과적’이지 않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렇게 모든 면에서 단정하고 정리된 해준이 서래에게 끌리는 이유는 그녀가 보여주는 모습이야말로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한, 자신과 같은 종류의 ‘꼿꼿한’ 사람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해준은 거의 스토킹에 다름아닌 잠복근무를 통하여 그녀가 그 꼿꼿함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내면의 아픔을 숨기고 있는지도 알게 된다(고 생각한다). 해준도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부분을 희생하고 있었던 만큼 (안구건조증, 불면증 등) 서래의 아픔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고, 그래서 이 여자라면 자신의 아픔을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한 듯하다. 그리고 실제로, 서래는 오랜 불면증에 시달리던 해준에게 꿀 같은 잠을 선사해 주기도 한다.

즉, 해준이라는 ‘남자’는 자신에 대한 이해를 애정했고, 그 이해가 진정한 이해가 아닌 “이용”이라는 의심이 생긴 순간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만 본다고 믿었던” 자신의 자부심이 붕괴하게 된다. 자아가 붕괴한 해준은 서래와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되는데, 이 때 해준은 자신의 의심을 확신하게 해 준 가장 중요한 물증을 서래에게 넘기며 아무도 찾지 못하게 폐기하라고 한다. 이것은 서래에 대한 마지막 애정이라기보다는 붕괴되어 버린 자신의 자아에 대한 마지막 자존심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이 마지막 “애정” 또는 “자존심”은 서래에게는 해준의 자신에 대한 애정의 증명임과 동시에 자신의 해준에 대한 애정의 시작이 된다. 서래 자신의 표현대로 ‘품위 있는’ 해준 또는 자신의 ‘꼿꼿한’ 모습과 ‘헤어질 결심’을 한 서래는 해준과 거의 정반대의 자리에 위치해 있는, 가볍고 경박스러운 사기꾼 임호신(박용우 분)과 결혼하고 함께 사기행각을 벌인다. 하지만 서래는 과거의 품위 있는 해준, 또는 꼿꼿한 자신의 모습과 헤어지지 못하고 그리움을 참지 못해 다시 해준을 찾아간다. 해준이 더 이상 품위 있지 않으며, 그래서 자신을 다시 애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서래는 다시 해준을 품위 있게 만들기 위해, 그래서 자신을 다시 애정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형사 해준과 피의자 서래”의 관계로 돌아가기 위한 선택을 하게 된다.

즉 서래라는 여자의 애정은 대상이 자신을 애정해 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며, 이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음을 깨달은 순간 그야말로 불가역적으로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새롭게 만들어진 형사-피의자 관계를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증거를 해준의 마지막 충고대로 ‘아무도 찾지 못하게 폐기한’ 서래는, 그 증거가 발견되었음을 알게 되자 마지막 선택을 위해 바닷가로 향한다.

자신의 산 같은 꼿꼿함을 있는 그대로 감싸 줄 수 있는 대상을 애정한 남자 해준과 자신의 파도 같은 변화무쌍함을 단단히 지탱해 줄 수 있는 대상을 원했던 여자 서래는 가장 잘 어울릴 듯 보이지만 산과 바다의 사이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안개로 둘러싸여 있다. 치명적인 곰팡이의 원인이기도 한 이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간 품위 있으면서도 꼿꼿한 이 두 사람은, 결코 이전의 품위와 꼿꼿함을 회복하지 못하고 자멸하게 된다. 완벽할 것 같으면서도 결코 만날 수 없는 이들의 관계는 “한국인 형사”와 “한국말이 서툰 이주민 피의자”의 관계처럼 영원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빛바랜 듯한 색감과 고풍스러운 화면 구도, 상상과 현실, 전후관계의 구분을 의미없게 만드는 편집 등은 이 특이하면서도 전형적인 애정 이야기에 고전의 품위를 더해준다. 서사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그야말로 박찬욱스러운 “영화적인” 작품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이코노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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