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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의 역설…금융시장 안정 위해 도입한 규제가 불안정 심화시켜
규제의 역설…금융시장 안정 위해 도입한 규제가 불안정 심화시켜
  • 양영빈 기자
  • 승인 2022.10.18 17: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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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 규제와 연기금의 파생상품 보유 포지션에 대한 강제청산 규제가 대표적
SLR 규제는 초대형 은행의 자기자본/자산 비율이 6%를 초과해야 하는 규제
과도한 SLR 규제는 미국 국채시장의 유동성에 안 좋은 영향을 주고 있어
장외 파생상품에 대해 장내처럼 증거금 받는 규제 만든 게 강제청산 제도
강제청산 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증거금을 현금으로만 내야 한다는 것
최근 영국 연기금의 위기는 지불불능 아닌 강제청산이 야기한 유동성 문제

[이코노미21 양영빈] 정부 감독기관에 의해 금융시장에 부여되는 규제들은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특히 요즘처럼 기준금리가 빠른 속도로 인상되는 시기에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질 수밖에 없는데 적절한 규제는 금리인상, 양적긴축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금융시장의 안정을 위해 도입한 규제가 오히려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심화시키는 경우가 발생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은행의 부채비율을 관리하는 SLR 규제와 연기금의 파생상품 보유 포지션에 대한 강제청산(mandatory clearing) 규제를 들 수 있다.

SLR 규제는 초대형 은행의 자기자본/자산 비율이 6%를 초과해야 하는 규제다. 미국에서 초대형 은행은 보통 재무부가 국채를 발행할 때 가장 최전선에 나서서 국채를 먼저 인수하는 프라이머리 딜러(Primary Dealer, PD)를 자회사로 해서 참여한다. 단기적으로 증자나 감자가 없다면 은행의 자기자본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자회사인 딜러가 국채 경매에 참여하면 전체 회사의 통합 대차대조표는 확대된다.

이는 회사 전체의 자산이 늘어나기 때문인데 SLR 비율이 감소하게 된다. 원래 SLR 비율 규제는 은행이 경영 활동을 할 때 위험 자산을 너무 많이 보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만든 규제였다. 그러나 자기자산에 가장 건전한 지급준비금, 미국 국채를 포함시키다 보니 프라이머리 딜러의 역할이 매우 축소되었다. 결국 과도한 SLR 규제는 미국 국채시장의 유동성에 안 좋은 영향을 주게 된다. 은행의 안정성을 제고하기 위해 만든 규제였지만 미국 국채시장이 유탄을 맞는 형국이다. 어느 한 쪽의 과도한 규제가 다른 한 쪽으로 이전되어 새로운 문제를 만드는 이른바 규제 풍선효과가 나타난다.

아직까지 문제 해결이 안된 영국의 연기금은 강제청산(mandatory clearing) 규제가 있다. 금융위기 이후 본격적으로 도입된 바젤3 협약에서는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파생상품이 아닌 장외(Over-The-Counter, OTC) 파생상품에 대한 강한 규제를 만들었다. 금융위기의 도화선이 된 리만브라더즈의 사례 연구를 통해 내린 결론이었다. 리만브라더즈의 어마어마한 레버리지가 장외 파생상품을 무분별하게 사용한 것에서 연유했다고 판단했기에 장외 파생상품에 대한 규제가 도입됐다.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장내 파생상품은 거래가 진행되면 거래 당사자로부터 증거금을 받는다. 증거금은 시장의 변동에 대해 거래 당사자가 거래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보증하는 도구이다. 금융위기 이전까지 장외 파생상품은 거래소가 따로 없이 거래 당사자들끼리 서로의 신용과 평판을 담보로 1:1 거래를 진행했다. 작은 문제는 언제든지 해결할 수 있지만 시스템 전체의 문제가 발생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문제가 커지고 급기야는 금융 시스템 전체의 안정성에 심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전세계 규제 당국은 중요한 장외 파생상품에 대해서도 장내 거래소처럼 증거금을 받는 규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강제청산(mandatory clearing) 제도이다. 보유한 파생상품 포지션을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의 청산시스템(Central Counterparty Clearing House, CCP)을 통해 증거금을 납부하고 CCP가 이를 관리하는 형태의 규제가 도입됐다. 강제청산 규제의 핵심은 거래 당사자가 충분한 증거금을 유지해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어렵지 않게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하자는 것이었다.

이 규제는 최근까지는 별 문제없이 잘 작동했다. 이 규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증거금을 반드시 현금으로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국 연금은 미래에 퇴직연금을 지급하기 위해 이자율 스왑이라는 파생상품을 매입했다. 이자율 스왑을 매수하면 연기금은 상대방으로부터 고정금리로 수익을 받게 되고 상대방은 변동금리로 수익을 받게 된다. 연기금이 미래의 퇴직자에게 약속한 수익률이 6%이고 이자율 스왑으로 받는 고정금리가 3%라면 연기금은 이자율 스왑을 2배로 하면 된다.

이자율 스왑에서는 원금의 교환이 없고 이자율 차이만 주고 받으므로 증거금이 매우 작다. 증거금이 매우 작으면 필연적으로 레버리지를 사용하게 된다. 변동금리 위험은 이자율 스왑으로 인해 절약한 현금을 다양한 상품에 투자해서 극복할 수 있다. 영국 연기금이 처음 설정됐을 때의 대차대조표를 보면 구성은 다음과 같다.

연기금의 전형적인 대차대조표

연기금의 부채는 미래(20~30년 후)의 퇴직자들에게 지급해야 할 연금이다. 연기금의 목표는 그림에서의 적자를 어떻게 메꿀 것인가에 있다. 퇴직연금은 연금 가입액에 대해 고정금리로 지급하게 된다. 따라서 퇴직연금은 장기 채권을 파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지닌다. 2008년 이후 저금리 상황에서는 장기 국채 금리가 매우 낮았으므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이자율 스왑 상품을 레버리지를 써서 이용하는 것이었다.

연기금의 대차대조표 구성에서 핵심은 부채가 미래 퇴직연금 지급액의 ‘현재가치’라는 사실이다. 금리가 올라가면 부채의 현재가치는 감소한다. 금리가 오를 때 부채는 10%가 감소하지만 자산은 금리에 영향을 작게 받으므로 5% 감소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금리인상 시기에는 대체로 연기금의 대차대조표가 개선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반대로 금리하락 시기에는 적자가 증가하는 일이 발생한다. 다음은 파이낸셜 타임즈에서 계산한 영국 연기금의 자산과 부채의 추이다. 금리인상기의 막바지였던 2019년에 대차대조표가 호전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최근 금리인상에서는 오히려 흑자로 반전됐다.

영국 연기금 자산과 부채 추이

출처=파이낸셜 타임즈
출처=파이낸셜 타임즈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최근 영국 연기금의 위기는 지불불능(Insolvency)의 문제는 아니었다. 대차대조표로 본다면 흑자를 유지했지만 유동성 문제가 발목을 잡은 것이다. 유동성 문제는 이자율 스왑이라는 파생상품에 대한 강제청산(mandatory clearing)이 야기한 것이다.

급격한 금리인상으로 보유한 파생상품에 대한 추가 증거금 납입(margin call)이 연이어 발생했고 현금으로 증거금을 납부해야만 하는 규제가 보유 장기국채나 주식 등의 자산을 급매물로 처분하게 만들었다. 급매물은 장기국채나 주식의 가격을 더욱 떨어뜨렸고 추가 증거금 납입을 또 다시 필요하게 만드는 악순환이 시작됐다. 2008년 위기와 2020년 위기에도 잘 버텼던 영국 연기금이었지만 이번의 급격한 금리인상은 대차대조표가 호전되었음에도 위기를 겪게 됐다.

영국 중앙은행과 직접적으로 거래할 수 있는 중앙은행 계좌가 없는 연기금은 중앙은행의 유동성 지원을 받을 수 없었으며 영란은행이 장기국채의 안정을 위해 국채 매입이라는 초강수를 두었을 때 위기는 겨우 진정될 수 있었다.

강제청산은 지불능력(solvency)을 제고하기 위해 만든 규제였지만 유동성(liquidity)을 훼손해 지불능력을 다시 악화시키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규제는 본래 과거 회귀적(backward looking)이다. 규제는 보통 과거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 진다. 과거 회귀적인 규제는 미래에 발생할 위기에 대해서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

SLR 규제, 강제청산 규제 등은 최근 상황에서 유동성 위기를 가속화할 수 있는 중요한 두가지 핵심 규제이다. SLR 규제는 미국 국채시장의 유동성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37조달러 규모로 추산되는 연기금에 대한 강제청산 규제는 금융 시장 유동성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다.

규제 당국이나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보통 지불능력에만 초점을 맞춘 규제를 생각한다. 유동성은 시장이 무상으로 제공할 것이라는 관성적인 사고에 젖어 있는 경향이 농후하다. 금융시장에서 유동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보스턴 대학의 페리 멜링 교수는 “유동성은 당신을 빨리 죽인다(Liquidity kills you quick)”고 이야기한다. 지불능력이 부족하더라도 대개는 바로 망하지 않지만 영국 연기금 사례에서 보듯이 지불능력은 양호하지만 엉뚱하게도 유동성 문제가 발생해서 시스템 전체적인 위기로 바뀔 수 있다.

영국 연기금 사태에서 보듯이 지불능력만 강조하고 유동성을 외면하는 규제는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특히 요즘처럼 금융시장 변동성이 확대된 국면에서는 지불능력만 볼 것이 아니라 유동성에 대한 좀더 세심한 관찰과 주의가 필요하다. [이코노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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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진 2022-10-26 21:15:40
이사님 금리인상시 연기금들의 대차대조표 중 자산은 적게줄고 부채는 많이 주는 이유가 뭘까요?
자산은 국채 등이 있어서 금리 인상에 따라 축소가 될 것 같은대 부채는 연금가입자들의 현금 등이 주일것 같은대 금리인상으로 왜 줄어드는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