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7-16 15:55 (화)
‘피리의 여사제’ 태평소에 날개를 달다!
‘피리의 여사제’ 태평소에 날개를 달다!
  • 이재식 기자
  • 승인 2023.01.10 14: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3 때 ‘동아음악콩쿠르’에서 입상
2000년 ‘KBS국악관현악단’ 공채 합격
’00년 9월 ‘전국국악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
‘김경아의 피리세계’라는 장기 프로젝트 시작
“김경아류 태평소와 피리 산조 만들고 싶어”
김경아피리 오매사복 포스터
김경아피리 오매사복 포스터

[이코노미21 이재식] 서울대학교 국악과 김경아 교수(이하 ‘김경아’)는 국립국악고등학교에서 처음 피리를 불었다. 저돌적인 무모함! 김경아의 시작은 그랬다. 김경아는 초등학생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육성회비가 밀려 늘 선생님께 혼났던 것이 싫었기에, 다양한 지원과 장학금 제도가 있는 국립국악고등학교에 무작정 지원했다. 그 흔한 예체능계 학원 한 번 다녀본 적이 없었던 김경아는 연합고사 점수와 청음, 시창 세 가지를 합산해 선발하는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어떻게 합격했을까?

입학 담당 선생님들의 입장에서 보자. 음악적 기초교육이 전혀 안되어 있는 입시생이 떡 하니 나타났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어렵게 왔으니 노래나 한 곡 불러 보라고 했더니 김경아는 면접관들 앞에서 유행가를 통성으로 쩌렁쩌렁 불렀다.

예술을 전공하려면 재력이 뒷받침 돼야 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합격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부모님께도 말씀 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면접관들은 김경아를 합격시켰다. 정말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었던 김경아의 싹수를 알아 봤던 것일까? 국악에 대해 이해도가 낮았던 어머니는 합격을 기뻐하기보다 국립국악고등학교를 왜 가냐고 반대했지만, 중학교 담임선생님의 설득으로 간신히 입학할 수 있었다.

생뚱맞게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입학한 김경아는 또 다른 선택 앞에 놓였다. 악기를 선택할 차례가 되자 그 당시 음악주임 선생님께서 피리를 권했다. 관악기 중에 가장 힘든 피리는 그 당시 인기 있는 악기도 아니고, 본 적도 없어 머뭇거리다가 가장 싼 악기라는 말에 입을 닫았다. 그러던 중 신입생 환영 연주회에서 처음으로 듣게 된 피리 독주곡 ‘상령산’에 반해 난생 처음 보는 악기를 전공으로 선택하게 된다.

‘너는 고집에 세게 생겨서 피리를 해야 한다’고 선생님은 말씀 하셨지만 김경아의 입장을 잘 아는 선생님의 배려였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피리는 초기 자본이 적게 드는 악기였지 결코 싸기만 한 악기는 아니었다. 피리를 권했던 선생님이 보는 눈이 있었던 걸까? 김경아는 고등학교부터 전공실기를 잘한다고 유명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고, 그것을 스스로 선택했을 때는 본인이 책임을 져야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영향을 받아 다른 공부 다 제쳐 두고 전공만 공부하며 꼴통 소리 깨나 들었다고 한다. 졸업 성적도 전공만 좋았다.

시는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이 없을 때라 실기로 특화된 한양대학교를 목표로 입시준비를 했다. 전 학년 장학금을 주겠다는 입학 제의를 받을 정도로 전공 관련 선생님들에게 실기를 잘한다고 알려졌던 것은, 당시 최고의 대회로 통했던 ‘동아음악콩쿠르’에서 입상한 것이 계기가 되었던 거 같다, 대학생들도 참가한 학생부 대회에서 고등학교 3학년이 입상을 했으니 주목받는 건 당연했다.

김경아는 대학 졸업 후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최초의 좌절을 맛보게 된다. 처음으로 ‘이 바닥을 떠나야 하는가?’라고 일주일 동안 고민을 했다. 고민 끝에 다시 한 번 시작해 보자고 마음을 다잡고 당시 민속음악 뿐 아니라 나훈아, 김수철 등 대중가수들과 함께 활동하는 김성운 선생님을 만나 굿판, 무용과 민요반주, 탈춤, 영산제 등 다양한 장르를 처음 접하고 배우며 실전형이자 생계형 연주자로 변화하게 된다.

첫 시작은 졸업식도 하지 않은 1월이었다. 부산 동래에 있는 유명한 굿당의 3일 진적굿이었는데 무당은 자신의 신이 영검하다는 걸 보여줘야 하는 자리였고, 김경아도 확실한 실력을 보여줘야만 하는 자리였다. 대학을 갓 졸업한 애송이였지만 기본기도 있고, 악보도 볼 줄 알며, 듣는 귀도 정확하고 빨라 대충 어영부영 시작은 할 수 있었다. 굿당은 일반 거주지와 떨어져 있기 때문에 숙박시설은 물론 편의시설이 전혀 없는 곳이 많다. 무녀들과 같이 자고, 먹고, 연주하고 했더니 3일굿을 마치고 몸무게가 3킬로그램이나 빠졌다.

굿판은 무당의 몸짓, 사설, 눈빛과 호흡, 그리고 순간순간의 반응에 따라 즉흥적인 연주를 해야 하는 초집중의 한판 승부처다. 춤, 연희(극적인 것을 의미함), 노래가 즉흥적으로 합을 이루고 무아지경의 절정이 신을 만나 그 수위가 높아질수록 굿 순서 중 가장 하이라이트인 작두타기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다.

굿판은 보통 밤늦게 시작해서 새벽까지 이어지는 힘든 작업이다.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현장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경제적인 도움은 컸지만 아침형 인간인 김경아는 다른 사람보다 그것이 더 힘들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금연에 대한 이해가 낮은 사회적 분위기라 담배연기와 먼지로 가득한 좁은 공간에서의 연주는 관악기 전공자인 김경아를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 어떤 때는 밤새워 12시간을 연주한 적도 있었다니 열악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겠다.

김경아는 굿판은 물론 씨름대회에서 천하장사가 황소 타고 다닐 때 태평소 연주도 했고 추석, 설날, 백중 등 민속행사에 여기저기 많이도 불려 다녔다. 용인 민속촌에서 하루 온종일 송파 산대놀이 반주며, 줄타기 반주며, 민요 반주까지…화랭이패 생활과 다름없었다.

1년 반쯤 되니까 실력도 좋아져 돈이라는 것을 만지게 됐다. 돈보다 자존심 문제가 더 컸던 젊은 시절이라 선배들과 같은 등급의 연주료를 받게 되는 것이 좋았다고 한다. 어떤 날은 아주 세련된 젊은 여자 무당이 시나위 연주를 잘 들었다고 1996년 당시 30만원을 호가로 준 날도 있었다니 돈을 좀 만지게 됐다는 것이 과장은 아니다.

그 무렵 ‘경기도립국악단’이 창단되자 은사님들이 시험을 보라고 권했고, 김경아는 깊은 고민 끝에 결국 단원 오디션에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다양한 현장 활동은 폭넓은 음악 공부와 경제적인 여유는 주었지만 밤을 새는 연주 환경도, 특정 관객만 상대해야 하는 것도 김경아의 취향과는 맞지 않았다. 당시 유명한 굿판 연주자 선생님이 ‘조금 있으면 빌딩도 살 건데 왜 이리 멍청한 짓을 하냐’고 안타까워했지만 김경아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김경아는 본의 아니게 그 바닥을 2~3년 더 불려 다니게 된다. 여자 악사는 거의 없어 희소가치가 높은 데다, 연주 잘 하고 한복 입으면 잘 어울리니 찾는 사람이 많았고, 거절하기 어려운 자리도 있었기 때문이다. 삼현육각 구성으로 영산제도 다니며 3인조 또는 5인조 연주를 구성해 요청하는 대로 다 연주했다고 한다.

그러던 김경아에게 새로운 기회가 왔다. ‘KBS국악관현악단’ 공채에 합격해 2000년 6월부터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해 9월 ‘전국국악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과 더불어 경북대, 전주우석대, 단국대, 중앙대, 추계예대, 이화여대, 한예종, 한양대 등 전국 국악과에서 후학들을 지도할 기회를 얻었다.

2005년에는 수석 단원으로 승급해 영화 음악 ‘산체스의 아이들’(유튜브 참고)을 고(故) 이준호 편곡, 태평소 협주곡으로 새롭게 만들어 ‘KBS국악관현악단’ 창단 20주년 기념 연주회에서 초연하는 영광도 얻게 된다.

‘산체스의 아이들’ 태평소 협주곡은 대중음악으로의 접근성을 높여준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고 기억한다. 이후 수많은 독주회, 다양한 장르와 작업한 협연, 독일 월드뮤직 페스티벌에서의 개인 독주회, 석‧박사 교육과정을 통한 전통음악의 깊이 있는 연구와 활동이 이루어졌고, 그것에 대한 결과물도 많이 쌓여갔다.

2012년부터는 ‘김경아의 피리세계’라는 10년 장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를 통해 피리 연주자로서 음악적 성장, 도약과 동시에 집중적이고 계획적인 피리음악 발전을 도모했으며, 전통음악 교육자료 작업에도 심혈을 기울인 결과 민요연주 기초교본을 출판하게 된다.

이후 김경아에게 교수가 될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서울대 국악과에 피리 전임교수를 처음 뽑는 공채가 나왔던 거다. 김경아는 그동안의 연구와 활동을 인정받아 2015년 3월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교수로 발령받고 현재까지 재직하고 있다.

김경아는 ‘2022~2031 김경아의 피리세계’를 통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이번 ‘오매사복’이란 독주회를 통해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전통음악의 선율들을 기반으로 여러 곡들이 창작되었고, 그 중 서울, 경기 지역의 선율을 중심으로 창작된 태평소 산조는 태평소 음악 발전에 있어 중요한 계기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전석초대로 진행된 공연이지만 보람은 있었다.

마침 공연일이 이태원 참사가 있었던 다음 날이라 고민을 많이 했다. 지원을 일체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전액 자비를 들여서 했고, 재정을 포함한 모든 책임을 다 져야 하는 개인연구발표회라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기획사 대표와 관계자들이 모여 춤추고 박수 치는 느낌이 아니라, 추모의 느낌을 주는 공연으로 프로그램을 수정하기로 했다.

공연 올리기 전 악기를 준비하면서도 마음이 많이 아파서 감정 컨트롤이 어려웠다. 공연 마지막에 넋풀이로 진도씻김굿, 푸너리를 넣었더니 관객 중에 계속 우는 분들이 있었다. 그 분들이 공연을 마친 후 많은 위안이 되었다고 해서 음악이 주는 위로를 크게 깨달았고, 사회에 공헌하는 공연이 있을 수 있음을 느낀 소중한 기회였다고 한다.

요즘 김경아는 ‘연구년’을 맞아 휴식과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김경아는 “교수라는 직업은 학생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육행정과 더불어 연구, 연주, 학생 상담 등 다방면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입니다. 이러한 현실들은 깊이 있는 음악연구를 하는 것에 한계를 주게 되는데요, ‘연구년’이라는 제도를 통해 평소 생각해 왔던 어렵고도 중요한 연구 주제에 몰입할 수 있고, 지금까지 살펴보지 못한 음악의 큰 변곡점을 만들 수도 있어 연구년을 허락해 준 학교에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큽니다”라고 했다.

교수 생활은 훌륭한 제자와 동료를 만날 수 있는 직업이다. 김경아는 앞으로 14년 정도 교수직이 남아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장기 프로젝트를 통해 무엇이든 목표를 이루려면 최소 10년간 꾸준히 연구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전의 10년 연구는 연주에 집중했다면, 앞으로의 10년은 전통음악 연구과 더불어 교육자료 출간 및 음반작업을 통한 김경아류 태평소와 피리 산조를 만드는 것으로 연구 과제를 선정하고 거기에 맞는 준비를 하고 싶습니다”

이번 공연에서는 태평소가 산조라는 장르 안에서 음악적으로 얼마만큼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악기인지 제시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10년 후에 태평소와 산조의 다양성과 폭넓은 발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후학들의 연구 자료로 가치 있는 시작이 되는 것이 김경아의 목표다.

서울대 국악과의 교육 프로그램은 전국의 모든 국악 교육기관 및 대학에 크고 작은 영향을 주는 부분으로 그 역할과 위치가 설명될 수 있겠다. 김경아도 서울대 국악과는 국악의 최고 학부라 자부한다고 했다. 김경아의 다양한 행보는 미래의 한국음악을 이끌어갈 후학들에게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보여 진다.

김경아에게 인터뷰를 수락했던 이유를 물어 봤다.

“요즘은 예전보다 공연지원 사업의 오디션이나 국가지원 프로그램들이 잘 구성돼 있어 꿈을 갖고 최선을 다한다면 분명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후회는 없는 과정이 될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열심(熱心)’이란 단어의 뜻은 하나의 문제를 해결할 때 10가지 생각으로 10가지 방법을 통해 노력하는 十心 입니다. 피리는 서양의 오보에나 클라리넷과 다르게 개량이 되지 않고, 현재도 악학궤범에 나와 있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앞으로 어떤 무대로 관객과 소통할지는 모르나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모티브를 제공하고 싶습니다, 요즘은 내가 살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전통음악의 계승과 발전에 필요한 연결고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김경아 교수는 대단히 절제된 언어를 구사하고 표정도, 말하는 것도 거침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군더더기도 없다. 소위 말하는 ‘직진본능’이다.

김경아는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면서 자신이 그 유명한 퓨전국악단 ‘슬기둥’의 멤버였다고 가볍게 말했다. 무대에서 돌아다니며 태평소 부는 여자가 바로 자신이란다. 김경아로서는 음악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경험이었다. '슬기둥‘은 출범 당시 요즘의 ’이날치 밴드‘ 이상의 인기를 누렸던 악단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유튜브를 찾아보면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이코노미2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