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금리 신화가 흔들리고 있다.
지난 6월 초 발표된 경제지표들이 경기둔화 조짐을 시사함에 따라 연방기금 금리를 6.5%선에서 동결시킨 미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경기가 회복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경제지표들이 속속 발표되면서 금리인상 가능성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10년 가까이 지속된 0%대 금리가 고개를 쳐들려 하는 것이다.
0% 금리의 신화가 흔들린다 현재 일본의 은행간 자금거래에 적용되는 익일물 콜금리는 0.02% 수준이다.
자금거래에 따른 수수료를 제외한다면 실질 금리수준은 0%. 일본은행은 80년대 후반 거품경제가 붕괴되면서 91년부터 금융완화정책을 실시해, 95년 9월 재할인율을 사상최저치인 0.5%까지 낮추는 전대미문의 ‘초저금리 정책’을 폈다.
지난해 2월에는 당시 장기금리의 상승추세와 그에 따른 엔화강세의 움직임을 차단하고 경기회복을 촉진하기 위해 익일물 콜금리의 목표수준을 ‘0.25% 전후’에서 ‘0.15% 전후’로 하향조정했으며, 이후 목표수준을 0%로 재차 낮췄다.
일본은행의 이같은 금리정책에 힘입어 일본 금융권은 자금조달 비용을 대폭 낮추면서 부실채권을 처리하고 금융 시스템 불안을 해소했다.
낮은 금리 탓에 운용처를 찾지 못하던 부동자금이 증시로 흘러들면서 주가도 상승세를 탔다.
그러나 하야미 마사루 일본은행 총재는 일본 경제가 장기침체에서 벗어나고 있고, 이로 인해 디플레이션 압력이 약화되고 있다며 지난 4월부터 제로금리정책의 해제 가능성을 시사해왔다.
일본의 유력 일간지들과 지난 4일 발표된 일본은행의 2분기 기업단기경제관측조사(단칸)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도 제로금리정책의 해제 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러나 제로금리정책 7월 해제설에 대해선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사카이야 다이치 일본 경제기획청 장관은 단칸 발표 직후, “단칸 내용이 분명히 좋아졌으나 경제가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개선이 이루어졌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며 “제로금리정책 철회를 위해서는 단칸 외에 다른 지표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고 하지만 전체 GDP(국내총생산)의 60%를 차지하고 있 는 개인소비가 여전히 부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2000년 2분기 GDP가 발표되는 9월경에야 본격적인 경기회복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외압도 상당하다.
서머스 재무장관 등 미국의 고위관리들도 공개석상에서 “제로금리정책을 유지하라”고 번번이 강조하고 있다.
쟈딘 플레밍의 수석 경제학자인 크리스 콜더우드는 오는 21~23일 오키나와에서 열리는 G8 정상회담에서 회담 참석자 대부분이 제로금리정책을 계속 고수하라고 일본은행을 압박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 IT업계, 금리인상에서 자유로울까 일본의 금리인상이 끼칠 영향에 대해서도 분석가들의 전망은 엇갈리고 있다.
일본은행의 금리인상 가능성은 이미 시장에 충분히 반영돼 있으므로 단행되더라도 그 영향은 극히 제한적일 것이라는 의견과, 일본의 금리인상은 미국 경제의 연착륙 성공 여부와 더불어 향후 국제 금융시장의 추이를 전망하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진단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우선 그간 일본 시장에서 투자가들의 인기를 모아왔던 중저가 종목들에는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된다.
중저가 종목 업체들은 제로금리라는 우호적 환경 속에서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해 구조조정과 신규사업을 추진해왔으나, 금리가 인상된다면 이들 업체의 수익과 주가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금리인상과 그로 인한 경기둔화에서 일본 IT업계의 수익과 주가도 자유로울 수 없다.
IT 관련 대형 우량주들은 여전히 대량의 미수금 잔고라는 부담으로 인해 대장주 역할을 못해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금리인상으로 본격적인 경기회복이 지연된다면 IT 관련 종목들은 투자가들의 유동성 확보를 위한 매물 압력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모리 요시로 총리의 2차 내각이 지난주 IT 사업부문을 중시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했으나 구체적 대안은 아직 마련하지 못한 상황이어서 관련 종목의 시세가 회복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금리인상→경기둔화→IT업계를 비롯한 기업 전반의 수익(전망)악화’라는 구도를 우리는 미국 시장에서 목도한 바 있다.
연준의 지속적인 금리인상으로 미국 경제가 둔화조짐을 나타내면서 이른바 ‘신경제주’들의 수익 전망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들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은 이제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 지난 5일 뉴욕 증시에서는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미국의 경기둔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를 경우 기업 수익이 나빠질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면서 반도체, 소프트웨어, 컴퓨터, 에너지, 네트워킹, 인터넷 업종이 대거 하락해 나스닥지수가 폭락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나스닥재팬의 부진으로 인해 이 시장의 설립 주체이며 일본의 대표적 IT업체인 소프트방크의 주가가 연일 급락을 면치 못하고 있다.
국제 시장의 반도체 수요 증가 전망에 힘입어 6월 들어 주가가 급등하고 있는 NEC, 도시바, 후지쓰 등 일본 증시의 반도체주들도 미국 시장의 흔들림에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신경제주들은 이제 더이상 세계 증시의 ‘구세주’가 아닌 듯하다.
국제 금융위기 재발 가능성 배제할 수 없어 일본은행의 금리인상에 따른 엔화강세는 국내 ‘굴뚝종목’에 일단은 호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로이터통신은 일본은행의 금리인상 가능성이 이미 시장에 반영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단기적으로는 엔/달러 환율이 95~100엔까지 떨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내다봤다.
7월7일 현재 107엔선에 걸쳐 있는 엔/달러 환율이 이처럼 급락한다면, 국내 증시에는 상당한 호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통상 엔화가치가 급등함에 따라 전체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한 전자, 반도체, 자동차, 조선업종 관련 종목들이 강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특히 대표적인 엔고 수혜주로 꼽히는 삼성전자, 포항제철, LG전자,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삼보컴퓨터, 현대자동차, 한진중공업 등의 상승이 예상된다.
중장기적으로는 세계 금융시장에 끼칠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통계에 따르면, 현재 일본 국내 투자가의 미국 국채 보유규모는 전체의 25%에 이른다.
미국이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에도 불구하고 장기호황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해외자금의 유입에 힘입은 바 컸다.
특히 일본의 자금은 미국 경상수지 적자를 보전하는 중요한 원천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행이 금리인상을 단행한다면 일본의 대미 투자자금이 상당 부분 본국으로 회귀할 수 있으며, 일본의 미국 국채 보유규모로 볼 때 미국 금융시장에 끼칠 영향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은행이 금리인상을 단행하더라도 통화정책 자체를 긴축기조로 가져가지 않는다면 일본과 세계 경제에 미칠 충격은 제한적이겠지만, 일본의 금리인상 문제를 미국 경제의 연착륙 여부와 결부시켜 생각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미국이 연착륙에 실패하고 엔화가치가 큰 폭으로 상승하는 경우에는 세계 금융시장이 또다시 위기를 맞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의 금리인상이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것인지, 국제 금융시장에 일파만파의 태풍을 몰고올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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