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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올 가을, 디지털 상업영화 "큐"
[문화] 올 가을, 디지털 상업영화 "큐"
  • 이경숙
  • 승인 2000.07.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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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5일 오후 4시, 영화진흥위원회 시사실에 불이 꺼지고 맥주캔 하나가 스크린에 나타났다.
물방울들이 캔 표면을 미끄러져 내리며 자잘하게 인쇄된 글자들의 형상을 뒤틀었다.
어둠 속에서 한 여인이 뛰쳐나왔다.


건물의 기둥들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강렬한 빛이 복도에 명과 암의 경계를 명확히 그었다.
여인의 모습은 교차하는 빛과 그림자 속에서 명멸하며 다가왔다.
그녀가 빛 속에 드러나는 순간은 아주 짧았다.
그럼에도 무언가에 놀란 듯한 여인의 표정은 눈앞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화면의 섬세함이 35㎜ 영화필름으로 찍은 듯했다.
그러나 이 소품들은 소니 ‘24P’라는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다.
시사실에 불이 켜지자 주최 측인 소니코리아에 영화·방송 제작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색 보정은? 키네코(디지털 부호를 필름으로 옮기는 작업) 이후 화면손실은? 화소 수는? 제작비는?’ 제작자들의 질문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들에게 디지털은 마치 풀리지 않는 화두처럼 보였다.
영화에 디지털 내림굿? 요즘 우리 영화인들은 두가지 의문 사이를 오가고 있다.
무성영화가 유성영화에 그랬듯, 흑백영화가 총천연색영화에 그랬듯, 필름영화는 디지털영화에게 제왕의 자리를 내줄 것인가. 아니면 TV 보급 이후의 극장처럼 새로운 권위를 갖게 될 것인가. 생각 많은 영화제작자 몇몇은 이미 ‘디지털의 내림굿’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도 아직 새로운 신의 효험에는 반신반의하고 있긴 하지만…. 지난 4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박광수, 김윤태 감독이 ‘디지털 삼인삼색’을 연출해 디지털의 가능성을 실험했다.
올 가을께는 한국 최초의 상업적 디지털 장편영화가 탄생할 예정이다.
임상수 감독의 <눈물>, 박철수 감독의 <봉자>, 이지상 감독의 <돈오> 등 세편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밖에 강제규필름과 우노필름, 이광모 감독의 백두대간도 디지털영화 제작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방송은 <꽃을 든 남자>(감독 황인뢰) 이후 3년 만에 다시 영화제작에 뛰어들었다.
이번엔 디지털이다.
현재 시나리오 공모중인 이 영화는 내년 상반기 개봉을 목표로 두고 있다.
또한 매년 디지털영화 시나리오를 공모하고 2~3편을 제작해 인터넷과 극장에서 개봉할 방침이다.
올 가을쯤엔 영화 사이트도 열 예정이다.
가장 참신한 ‘신인’은 뭐니뭐니해도 기존 영상산업계에 도전장을 던지고 나선 디지털 솔루션, 콘텐츠 업체들이다.
디지털영상 솔루션 업체인 ‘RMJC’ www.rmjc.co.kr는 지난 3일 <마고>(감독 강현일)의 제작발표회를 열었다.
한국 최초의 DVD롬 전용영화로 제작되는 이 영화는 극장용으로도 제작돼 개봉될 예정이다.
제작진은 우리 민족이 1만4천년 전 파미르고원에서 시작됐다는 ‘마고(파미르의 지명) 신화’를 누드 퍼포먼스 등 실험적 형식으로 표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일본의 전자업체 도시바는 <마고>의 일본 개봉과 DVD롬 출시를 계획하고 있다.
도시바는 최근 RMJC와 전략적 제휴를 맺은 바 있다.
디지털 콘텐츠 업체인 ‘디지털네가’ www.dnega.com는 한-일-홍콩 3국의 공동제작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
이 프로젝트에는 <여고괴담>의 박기형(한국), <메이드 인 홍콩>의 프루트 챈(홍콩), <링>의 나카타 히데오 감독(일본) 등 3국의 쟁쟁한 감독 3인이 참여한다.
박 감독은 엘리베이터에 갇힌 두 남녀의 이야기 <유혹>을 9월에 크랭크인해 내년 1월에 완성할 계획이다.
챈 감독은 한국 일본 홍콩 미국 중국의 화장실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 <퍼블릭 토일레트 W.C>를, 히데오 감독은 팬터지 호러 <라스트 신>을 올 가을에 내놓는다.
이 프로젝트의 예산은 30억원. ‘디지털영화는 저예산영화’라는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깬다.
충분히 돈을 들여 필름영화보다 완성도와 상업성이 높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욕심이다.
이 두 업체 외에도 인터넷 상영용으로 디지털영화를 제작하는 닷컴 기업들은 부지기수다.
이들의 의욕은 당장이라도 올드미디어를 삼킬 듯 만만찮다.
디지털 기술이 영화, 방송, 인터넷, 비디오(혹은 DVD) 콘텐츠 사이의 호환성을 높일수록 이들이 진출할 시장은 넓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영상산업 시장만 다 합쳐도 규모는 3조4천억원이 넘어간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만남 병존? 전복? 변화의 중심에 뛰어든 이들의 생각은 어떨까. 먼저 ‘디지털 삼인삼색의’ <빤쯔 벗고 덤벼라>(소니 PD-100 DV6mm 카메라)의 박광수 감독. 그는 필름영화를 전복시킬 만한 큰 변화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디지털이 카메라 운용과 특수효과가 쉽다는 장점은 있어도 섬세한 영화적 효과에선 효과가 떨어지죠. 인물을 멀리에서 찍으면 초점이 나가버려요. 제작비도 필름보다 별로 싸게 들지 않아요. 제작진에게 인건비 한푼 안 줬는데도 30분짜리 영화를 찍는 데 5천만원이 들었으니까요. 디지털도 돈 들인 만큼 잘 나오는 것은 필름영화나 마찬가지예요. HD(고화질)로 찍으면 필름보다 더 듭니다.
디지털이 필름을 대체할 거라고 생각지는 않아요. 현재처럼 서로 상호보완하는 관계가 되겠죠. 사운드나 후반작업은 지금도 완전히 디지털화되어 있습니다.
” 지난달 문화방송 베스트극장 <창포 필 무렵>(HD카메라)을 연출한 황인뢰 감독(JRN 대표)은 디지털 기술이 TV영상물에 영화적 미학을 접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HD는 해상도가 굉장히 높아요. 또 화면의 가로세로 비율이 16대 9로 기존 TV의 4대 3보다 넓죠. HD로 제작하는 환경이 되면 많은 것이 바뀔 겁니다.
미술부터 연출방식까지. TV 감독들은 싫든 좋든 변화해야 할 거예요. 시청자들은 미학적 완성도가 높고 다양한 작품들을 TV로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영화감독 쪽에선 디지털로 찍어도 아직 디지털 상영관이 거의 없어서 당장 큰 변화는 없을 것 같고….” 당장 올해 9월부터 디지털방송 시험방송을 시작하는 방송사들과, 기술 발달의 최첨단에 서 있는 인터넷 기업들은 누구보다 민감하게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문화방송 프로덕션 최종수 영화기획실장의 말이다.
“디지털의 장점은 한번 찍어 방송, 영화, 인터넷 등 여러가지 매체에 써도 질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겁니다.
물론 필름은 필름의 고유영역이 있겠지요. 그러나 대종은 바뀔 겁니다.
PC가 나왔을 때 누가 인터넷이 이렇게 빨리 확산되리라고 예상이나 했나요. 디지털이 더 저렴해지고 더 필름과 흡사해지면 분명히 주류를 이룰 겁니다.
” 디지털네가의 조성규 사장의 의견은 좀더 급진적이었다.
“올해 칸느에서 소니 24P를 보고 확신을 느꼈습니다.
디지털화는 흑백필름이 천연색필름으로 넘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적어도 5년 안에 제작자는 물론 극장들도 디지털 방식으로 바꿀 수밖에 없을 겁니다.
비디오 시장이 죽고 DVD 시장이 뜨는 것처럼요.” “결정적 변수는 자본” 영화진흥위원회 정책연구원 황동미 연구원은 “아직은 극장의 박스오피스가 영상산업의 최전선이다”라며 극장이 어느 정도 디지털 영사 시스템을 받아들이는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극장 관객수가 비디오와 TV판권료 등 2차 시장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황 연구원은 “<스타워즈 에피소드1>이 영화상영을 조건으로 디지털 사운드 시스템을 극장에 반강제적으로 보급시켰듯 우리 극장의 변화도 제작자들이 강력하게 이끌어야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그가 보기엔 디지털로 저예산 독립영화를 찍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 같은 도그마 진영이든, 디지털에 고예산을 들여 영화기술의 진보를 가져오는 조지 루카스 진영이든 모두 긍정적인 변혁의 씨앗을 품고 있다.
문제는 한국엔 도그마도, 루카스도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국의 영화인들에게 디지털 기술은 화두라기보다는 신열 같은 존재다.
무당이 제 의지로 신내림을 받는 게 아니듯 한국 영화의 디지털화엔 한국 영화인의 의지보다는 기술 발달, 정부 정책 같은 외부요인의 영향이 더 크게 작용한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김국진 박사(방송학)는 “결정적인 변화 요인은 재원”이라고 말했다.
“가전사가 변화의 주축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디지털을 지향하는 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야 하는 전자산업계거든요. 미국에서도 소니, 필립스, 삼성 같은 업체들이 디지털 영상물 제작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디지털(가전·IT산업)이 아날로그(영상산업)를 얼마나 강하게 미느냐가 가장 중요한 변수입니다.
소니 24P 카메라
본명은 소니 HDW-F900. HD(고화질) 카메라 가운데 하나다.
영화필름처럼 24프레임으로 구성되었다고 해서 본명보다 24P로 더 많이 불린다.
올해 칸느에서 시험용 24P로 찍은 짧은 영화가 공개됐을 때 많은 영화인들은 탄성을 올렸다.
“이건 필름과 거의 똑같잖아.” 24P로 그의 근작 <백만달러 호텔> 뮤직비디오를 촬영해본 빔 벤더스 감독은 “놀랐다”며 감탄했다.
“나는 24P로 아주 복잡한 장면을 손쉽게 찍을 수 있었어요. 화질도 아주 좋았고 35㎜에 끼워넣어도 잘 조화되더라구요.” 간편함도 장점이다.
필름 1천피트는 11분 분량밖엔 찍을 수 없지만 디지털 테이프 하나는 50분 분량을 담는다.
조지 루카스는 아예 24P로 <스타워즈 에피소드2>를 촬영하기로 하고 지난달부터 작업에 들어갔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두고 “디지털 제다이 전사들이 필름에 죽음을 가져올 것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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