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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심한 남자, 터프한 여자
[영화] 소심한 남자, 터프한 여자
  • 이성욱 한겨레 문화부 기자
  • 승인 2001.07.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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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성가대 연습에 꼬박꼬박 나가길 정말 즐거워하는 ‘내’가 성심성의껏 성가곡 <파니스 안젤리쿠스(생명의 양식)>를 부르는데, 어떤 이성이 “페니스(남자 성기) 어쩌고저쩌고”라며 놀리듯 되풀이 말한다면 그를 좋아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가 한밤중에 ‘나’의 누이집에 숨어들어 약간의 물건을 훔치자고 조르기까지 한다면? 아무리 내 누이 부부가 생각하는 거나 생활하는 게 혐오스러울 정도로 속물적이고 보수적이라고 하더라도.

아일랜드의 더블린을 배경으로 한 <브랜단 앤 트루디>의 원제는 <브랜단이 트루디를 만났을 때>(When Brendan met Trudy)다.
맥 라이언 주연의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라는 세계적 히트 상품을 패러디한 제목이다.
같은 로맨틱 코미디 형식을 취했지만, 유쾌하고 발랄하다는 것만 빼놓고는 무척 다르다.
‘청출어람’이랄까, 우여곡절 끝에 이뤄지는 로맨스의 아스라한 여정을 지켜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건 물론이고, 풍자 어린 유머 정신까지 쏠쏠히 맛볼 수 있다.
소심한 남자 브랜단은 성가대 연습 말고 한가지 취미를 더 갖고 있다.
그는 영화를 광적으로 좋아하는데, 유독 작가주의 영화를 좋아한다.
어머니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장 뤽 고다르에 관한 책을 선물할 정도이고, 고다르의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의 포스터를 여기저기에 붙여놓고 산다.
술집에서 우연히 만나 좋아하게 된 트루디에게 수작을 걸 때도 영화를 보러가자고 했지만, 트루디는 그와 영 딴판이다.
영화라면 액션영화를 최고로 치는 다혈질이다.
게다가 이 여성의 직업은 도둑이어서, 샌님같은 교사 브랜단과는 도대체 어울릴 것 같지 않다.
그래도 이들은 정말 서로를 잘 이해하게 되고, 보기좋게 어울리는 커플이 된다.
순수하고 건강한 각자의 속내가 통했기 때문인데, 좌충우돌 소동 끝에 맺어지는 과정은 볼 때도 재미있지만 의미심장한 여운까지 남겨준다.
또 두 주인공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는 정치적 관점이나 테크놀로지와 교육방식에 대한 태도는 되씹어볼 구석이 있다.
시나리오를 쓴 로디 도일은 14년간의 교사생활 끝에 작가로 전업해 영미권의 권위있는 문학상인 부커상을 받은 영화광이다.
이 영화로 데뷔한 키에론 월쉬 감독은 작가의 영화광적 취미를 화면에 적절하게 옮겨놓는 데 성공했다.
브랜단이 장 폴 벨몽도나 존 웨인의 걸음걸이와 제스처를 흉내내는 것도 재미있지만, 빌리 와일러의 <선셋대로>, 세르지오 레오네의 <옛날옛적 서부에서>, 존 포드의 <수색자> 등 수많은 고전영화를 직간접으로 인용하는 방식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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