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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투자가 먼저냐, 수익모델이 먼저냐
[포커스] 투자가 먼저냐, 수익모델이 먼저냐
  • 임채훈
  • 승인 2000.07.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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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기업 CEO와 벤처투자가의 냉랭한 만남…서로의 입장만 확인한 4시간
“올 가을 인터넷 기업들이 줄초상을 치르고 나면 거기서 나온 중고 서버를 처리하는 ‘땡시장’이 열린다.
신품이나 다름없는 물건을 많이 건질 수 있을 것이다.
” 요즘 테헤란로를 유령처럼 떠도는 괴담이다.


닷컴이라면 절반은 먹고들어가던 시절이 언제였냐는 듯 세상이 돌변했다.
“수익모델이 시원찮은 닷컴에 투자했다간 깡통차기 십상”이라며 투자자들이 등을 돌렸다.
여전히 투자가 필요한 닷컴들은 “돌에 짓눌린 옥을 구해달라”며 냉철한 투자분석을 호소하지만, 한번 떠난 투자자들의 마음은 쉬 돌아오지 않는다.
인터넷 기업과 벤처캐피털 사이에 흐르는 이러한 난기류를 확인할 수 있는 마당이 지난 19일 열렸다.
'우선 자성하자’ 처음엔 한목소리 서울 역삼동 LG강남타워 25층 강당에 40여개 인터넷 기업과 8개 벤처캐피털 관계자들이 모였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회장 이금룡)가 주최한 ‘인터넷 기업 최고경영자(CEO)와 벤처캐피털리스트의 만남’의 자리였다.
며칠 전부터 난상토론이 벌어질 것이라며 눈길을 모았던 이날 모임은 자성의 목소리로 시작됐다.
발제를 맡은 YES24의 이강인 대표는 “벤처기업들이 다시 ‘헝그리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자성의 테이프를 끊었다.
아파치커뮤니케이션의 이종구 대표는 “벤처기업이 작전세력과 연합해 주가 올리기와 마케팅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도덕성을 회복해야 한다”며 한술 더 떴다.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을 대표해 발제를 맡은 다산벤처 서창수 부사장도 “그동안 ‘묻지 마’식의 투자행태를 보인 투자자들도 많은 책임이 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다시 화두는 수익모델로 그러나 이런 자성의 목소리는 오래 가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벤처기업들은 인터넷 기업이라는 이유로 투자를 하지 않는 벤처캐피털리스트들에게 강한 불만을 쏟아냈다.
‘일단 투자를 해서 기업부터 살리라’는 CEO들에 맞서 ‘먼저 명확한 수익모델을 제시하라’는 캐피털리스트들의 대립이 시작됐다.
케이원시스템의 정태원 대표는 “벤처캐피털들이 인터넷기업에는 되도록 투자하지 말라는 내부지침을 마련했다는 말을 들었다”며 “옥석을 가린다고 하면서 무조건 투자를 하지 않아 지금 대부분의 벤처가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이금룡 회장도 기업에는 ‘시장창출형’과 ‘납품형’이 있다며 “시장창출형 기업은 납품형 기업과 달리 수익이 당장 나기 어렵다.
수익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투자를 하지 않으면 시장창출형 기업은 다 망하고 납품형 기업만 남는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시장창출형 기업이 다 망하고 있는데, 벤처캐피털들이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해 솔루션 업체나 장비 업체에만 투자하면 결국은 다 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수익모델을 강조하는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의 목소리는 한치도 흔들림이 없었다.
코리아인터넷홀딩스 강성구 이사는 “명확한 수익모델만 갖추고 있다면 인터넷 기업이라고 해서 투자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
팬텍여신투자금융의 오경준 대표도 “예전처럼 쉽게 인터넷 기업에 투자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수익모델과 명확한 사업계획서를 제시한다면 투자를 피하지 않는다”고 응수했다.
KTB네트워크의 변준석 부장은 “현재 인터넷 기업에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은 벤처기업들이 그동안 투자받은 자금을 투명하게 운용하지 않고, 수익도 내지 못함으로써 투자자들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분명한 수익모델’과 ‘명확한 사업계획서’라는 말에 일부 인터넷 기업 CEO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업계획서 작성에도 꽤 많은 돈이 드는데 벤처캐피털쪽에서 컨설턴트 역할을 해줘야 하지 않느냐” “사업계획서를 검토하겠다는 말만 하고 전혀 응답이 없다” “명확한 사업계획서를 가져오라는 말만 하지 말고 사업계획서에 담을 수 없는 무한한 벤처의 창의성을 벤처캐피털쪽에서 끌어내려는 노력을 보여달라”는 등의 항의와 요구가 빗발쳤다.
벤처 옥석의 기준이 뭔가 ‘옥석의 기준’도 뜨거운 논란거리였다.
업계에서 보기에는 벤처캐피털의 투자기준이 영 명확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수 벤처의 선정기준이 벤처캐피털 업체별로, 또 정부 부처별로 제각각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인맥과 뒷돈에 의해 투자가 이뤄진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그러나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은 ‘벤처캐피털 나름대로의 색깔과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서로의 입장이 그렇다면 옥석의 기준을 함께 만들어가자는 주장도 나왔다.
투자의 시점과 시기에 대해서는 벤처캐피털리스트들 사이에서도 다소 의견이 엇갈렸다.
호서벤처투자 서범석 대표는 “1, 2년 안에 수익을 보겠다는 것은 무리다.
최소한 10년은 바라보고 투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해 벤처업계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다.
드림벤처캐피털의 이재은 수석심사역도 “지금이 가장 싸게 인터넷 기업에 투자할 수 있는 기회다.
업계에서는 현실을 너무 비관적으로 바라보지 마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대다수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은 자금회수 이후에 재투자가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수익이 나지 않는 기업에 지속적으로 투자하기는 어렵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인터넷기업협회 이금룡 회장은 “손익분기점 직전의 벤처기업에는 투자를 해줘야 한다.
지금 당장은 적자지만 손익분기점이 10억이면서 매출액이 8억인 회사라면 투자를 해줘야 한다”며 가능성은 있지만 수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벤처캐피털이 투자를 거부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래도 벤처가 희망이다.
현재의 상황을 벤처의 몰락으로 인식해서는 안된다는 데는 일치된 모습을 보였다.
호서벤처투자 서범석 대표는 “미국의 경우 전체 소매시장에서 인터넷을 통해 거래되는 비율은 0.7~1.4%밖에 되지 않는다.
이 정도면 무한한 성장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며 인터넷 사업의 성장가능성을 높이 샀다.
다산벤처 서창수 부사장도 “인터넷 산업은 이제 막 시작이다.
금융시장의 혼란으로 인한 부침은 있을지라도 대세는 성장”이라고 말했다.
벤처기업과 투자사 사이에 브로커가 활개를 치고 있다는 얘기나, 일부 부도덕한 기업과 벤처캐피털리스트에 대한 성토는 조용히 지나치긴 했지만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4시간 가까이 진행된 모임이 끝날 무렵 벤처업계에서는 참석자 전원이 자리를 지켰지만, 벤처캐피털쪽 참석자는 절반이나 자리를 비워 벤처인들의 빈축을 샀다.
그러나 모임이 끝나자 벤처기업 CEO들은 벤처캐피털리스트들에게 명함을 돌리느라 분주했다.
만남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간 것이다.
KTB네트워크 변준석 부장은 “대화의 초점이 흐려 특별한 성과는 없었다고 본다.
다만 벤처업체들이 회원수 늘리기나 페이지뷰에 의존하는 시기가 지나고 이제는 명확한 수익모델을 제시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파치커뮤니케이션 이종구 대표는 “벤처업체들끼리 활로를 모색할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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