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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새천년의 화두 인터넷, 그러나…”
[포커스] “새천년의 화두 인터넷, 그러나…”
  • 박종생
  • 승인 2001.03.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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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지난해 온라인 신문사 기고문에서 밝혀
“한강의 기적 속에 ‘기적’은 없다.
다만 성실하고 지혜로운 노동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 땅에 태어나서 한사람의 기업인이자 성실한 노동자로서 이 나라의 비약적 발전에 한몫을 다한 것에 대해 무한한 긍지를 가지고 있다.


3월21일 타계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지난 98년 펴낸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 후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정 명예회장의 말에는 자신에 대한 자랑이 은연중 배어 있다.
그는 사실 그렇게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다.
한국 현대경제사에 그만큼 커다란 족적을 남긴 기업인도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정 명예회장의 인생 역정은 정주영 개인의 것을 넘어 한국 현대경제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60~80년대 건설, 자동차, 조선 등 중공업 분야의 세계적인 기업들을 일궈냄으로써 개발연대 한국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렇지만 그는 90년대 이후 정보기술과 금융산업이 발달하면서 시작된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에는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오너 중심의 경영을 지속함으로써 시장 주도의 경제 패러다임에 적응하지 못했으며,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떠오른 디지털 산업을 껴안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재계의 맞수인 삼성이 IMF 이후 ‘삼성 독주체제’라고 할 만큼 성장을 구가하는 것과 대조된다.
또 현대와 개발연대를 같이해온 LG와 SK가 지금도 견고한 것과도 비교된다.
디지털 경쟁력 다른 그룹 비해 떨어져 정 명예회장은 6·25전쟁 뒤 전후 복구사업과 60년대 사회기반시설 건설에 참여하면서 현대건설의 토대를 닦았지만 본격적인 성장은 70년대 이후 시작됐다.
당시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은 현대그룹이 도약하는 데 큰 계기가 됐다.
건설, 자동차, 조선을 모태로 다각화를 시작했다.
현대그룹은 70년대에 이미 자동차, 조선, 선박엔진, 산업플랜트, 발전설비, 해양설비, 중전기기, 중장비 등 중공업의 핵심분야를 망라한 중공업 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해외시장에도 눈을 돌려 70년대 중반 중동에 진출해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였다.
또 자동차산업에 진출한 뒤 76년 처음으로 국산 고유모델 포니를 개발했고 86년 미국 시장에 수출을 시작했다.
이른바 ‘포니신화’를 만든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한국 경제는 경공업 중심의 경제에서 중화학 중심의 경제로 발돋움했고, 정 명예회장은 그 선두에서 이를 실현시킨 경영인으로 평가받았다.
정부의 도움도 적지 않았지만 이런 성공은 정 명예회장 특유의 돌파력과 기업가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소 착공과 동시에 26만t급 유조선 2척을 수주한 일이다.
그는 지난 71년 배 한척 만들어본 경험이 없는데도 조선소 사업계획서와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 한장을 들고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얻어냈고 유조선을 수주하는 데도 성공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에 시작한 사업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든든한 후원자를 잃은 탓도 있다.
83년 현대전자를 설립했으나 현재 7조원에 이르는 부채로 허덕이고 있다.
91년 공급과잉 논란 속에 설립한 현대석유화학도 실패작으로 끝났다.
97년 IMF 이후 현대그룹이 보인 행보도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과는 다른 길이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유동성 위기를 겪으며 기존의 외형 성장 중심에서 수익 창출 중심으로 바꾸는 구조조정에 들어갔으나 현대는 달랐다.
현대는 기아자동차, LG반도체, 국민투신, 울산종금 등을 인수하면서 외형을 계속 키워나갔다.
그룹 전체적으로 뚜렷한 ‘캐시 카우’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외형 키우기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여기에다 그룹 후계구도를 명확히 하지 않아 지난해 ‘왕자의 난’(정몽구·몽헌 회장간 경영권 다툼)이 일어나면서 현대그룹은 좌초의 길을 걷게 된다.
유능한 전문경영인 체제를 확립해놓지 못한 것도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여러가지 요인들이 겹쳐 있지만 현대그룹이 휘청거린 데는 현대가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떠오른 IT산업쪽에 관심을 두지 않은 탓이 크다.
대우그룹이 무너졌을 때도 현대는 자동차, 조선, 건설 등 업계에서 1위를 하는 탄탄한 전통 제조기업들로 구성됐기 때문에 끄떡없을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하지만 경제의 중심축으로 떠오른 금융시장은 냉혹했다.
고부가가치를 내는 지식산업 중심으로 산업이 재편되면서 전통 제조업체들은 금융시장으로부터 홀대를 받았다.
정 명예회장은 IT산업쪽에는 그리 인연이 깊지 못하다.
반도체 사업도 신통치 않았고, 93년 설립한 시스템통합 업체 현대정보기술도 경쟁사들에 견주어 경쟁력이 처진다.
그렇다고 현대그룹이 전통 제조업에 IT를 접목해 효율성을 높이는 데 성공한 것도 아니다.
삼성 등 선대회장들, 신경제 적응력 싹 틔워 정 명예회장의 ‘황혼의 위기’는 삼성, LG, SK 등 다른 주요 그룹과 견주어보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에 적응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다.
이들 그룹들은 선대 회장이 이미 싹을 심어놓았거나, 후계자가 새로운 패러다임에 적응함으로써 생존에 성공했다.
현대의 맞수인 삼성은 변신을 거듭했다.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은 정 명예회장과는 달리 섬유, 가전, 반도체, 금융 등 경박단소한 분야에 주력했다.
48년 삼성물산을 세운 이 회장은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을 잇따라 설립하고, 69년 삼성전자를 설립해 금성사와 경쟁하면서 전자산업의 발전을 선도했다.
80년대 들어서는 일본, 미국 기업들의 비웃음을 사면서 반도체 산업을 일으켜 삼성전자를 D램 분야의 세계 1위 기업으로 키워냈다.
그가 일으킨 삼성그룹은 지난해 그룹 순이익 8조원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며 한국 경제를 선도하고 있다.
이 회장의 후계자인 이건희 회장은 90년대 이후 산업의 중심으로 등장한 전자와 금융을 그룹의 주력으로 키워나갔다.
물론 자동차 사업 진출이라는 중대한 실수도 저질렀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은 93년 질경영을 선언하면서 계열사들의 경영혁신에 진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IMF 이후에도 자동차 사업을 매각하는 등 수익 중심 경영이라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에 적응함으로써 재계에 삼성의 독주 시대를 열었다.
SK의 고 최종현 회장은 정보화라는 시대흐름에 일찍부터 눈을 떴다.
최 회장은 주로 공기업 인수를 통해 그룹을 성장시켰다는 비판도 받지만 어찌됐든 그는 지금의 SK텔레콤을 있게 한 장본인이다.
그는 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 인수에 성공해 파란을 일으켰으며 이후 유공해운, 유공가스, 선경화학 등을 잇따라 설립해 석유화학·에너지 전문기업군을 만들었다.
이어 84년에는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해 석유화학과 정보통신이라는 그룹의 양대축을 만들며 한국 최고의 통신기업을 키워냈다.
또 아들인 최태원 회장의 경영능력이 무르익을 때까지 과도기에 손길승 회장이라는 유능한 전문경영인을 그룹 총수 자리에 앉힘으로써 그룹 경영 의 안정을 꾀했다.
LG 창업주인 고 구인회 명예회장은 화학과 전자쪽에 매진한 인물이다.
그는 45년 그룹의 모체인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해 비누, 치약 등의 생필품을 만들며 국내 화학공업의 기반을 닦았다.
58년 전자쪽으로 눈을 돌려 금성사를 세운 구 회장은 라디오, 냉장고, 흑백TV를 국내 최초로 생산했다.
70년 타계한 구인회 회장의 자리를 물려받은 구자경 회장은 선친이 일군 사업을 중심으로 경영을 했다.
95년 경영권을 물려받은 구본무 회장은 그룹의 주력사업에 유무선통신 사업을 추가하면서 변신을 꾀했다.
96년 PCS 사업권을 따낸 뒤 지난해에는 데이콤까지 인수했다.
물론 현재는 IMT-2000 사업권을 따내지 못함으로써 통신왕국 건설의 꿈이 좌초될 위기에 처한 상태다.
그러나 LG는 LG전자를 중심으로 디지털가전, LCD 등 첨단전자산업을 주력으로 갖고 있어 미래는 밝다.
정 명예회장은 지난해 초 인터넷 경제뉴스 사이트인 머니투데이에 보낸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인터넷을 직접 다루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시대흐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최근의 ‘인터넷 소용돌이’가 세상의 변화과정에서 커다란 전환점에 해당한다는 점을 평생 쌓아온 사업가적 안목으로 분명히 인식한다.
천부적인 사냥꾼은 큰 짐승이 다니는 길목을 알고 훌륭한 어부는 물고기떼의 흐름을 잡아내듯이, 뛰어난 사업가라면 새천년의 화두를 인터넷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그러나 그가 이런 시대인식을 갖고 경영을 하기에는 이미 그의 몸은 노쇠하고 말았다.
그의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의 후기는 이렇게 계속된다.
“장강후랑추전랑(장강은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듯 나아간다)이라 하지 않는가. 내 후대는 앞으로 나보다 더 나아질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 내 간절한 희망이다.
” ‘기업가 정주영’이 이 땅을 떠나면서 후세들에게 남기는 말이다.
"정주영 전 회장도 벤처인"
벤처CEO들, 도전정신 높이 평가… 경영인 점수는 ‘글쎄’ 재벌과 벤처, 극과 극이다.
오프라인과 온라인, 구경제와 신경제, 굴뚝과 닷컴도 극단적 비교의 양축을 이룬다.
하지만 재벌도 시작은 벤처였고 벤처 역시 또다른 의미의 재벌을 꿈꾼다.
재벌이 품고 있는 얼룩만 제거한다면 벤처가 그리는 재벌의 꿈은 아름다운 도전이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대해 테헤란밸리의 벤처 CEO들은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정 회장을 벤처인의 대열에 올려놓는 평가가 많다.
정 회장의 기업 경영 스타일이 워낙 무모하리만큼 도전적이었다는 데서 기인하는 모양이다.
“정 회장이야 말로 진짜 벤처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시장이 성숙되기도 전에 중화학공업을 시작했고 500원짜리 지폐로 대형 선박을 수주했다.
미래나 장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다.
” 옥션 이금룡 사장은 서슴없이 정 회장을 벤처인 대열 첫줄에 올려놓는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거대한 구조물을 완성한 정 회장의 유명한 일화들도 벤처인들의 마음을 잡아끈다.
야후코리아 염진섭 사장도 그에게서 벤처정신을 배운다고 한다.
“현대조선소를 만들 때 그것이 바로 벤처였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 그것이 바로 벤처정신이다.
” 전자상거래 분야의 벤처기업 파이언소프트 이상성 사장 역시 정 회장의 도전정신을 높이 샀다.
“정 회장의 삶이야말로 벤처정신 그 자체이다.
그의 삶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 평가가 다를 수 있으나, 오기와 뚝심 그리고 도전으로 일관된 삶은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 씽크풀 김동진 사장도 벤처정신의 큰별이 진 것을 아쉬워했다.
“현재 우리가 벤처라고 하는 것들도 시대가 지나면 정신이 흐려지게 마련이다.
그때가 되면 새로운 벤처 개념이 나올 것이다.
정 회장은 그 시대의 벤처를 상징하는 큰별이다.
” 안철수연구소 안철수 소장은 또다른 측면에서 정 회장을 평가한다.
“5명도 안되는 회사에서 시작해 얼마 전 한시큐어를 인수하면서 180명이나 되는 식구를 거느린 회사가 됐다.
CEO 입장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사람을 관리한다는 것이었다.
초라한 쌀가게에서 시작한 그가 수만명의 직원을 거느린 거대한 기업의 조직관리를 어떻게 했는지 경이롭다.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정 회장이 걸어온 그의 삶에 대한 평가는 제각각이지만 기업인 정 회장에 대해서 지금 벤처인들의 평가는 상당히 호의적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따끔한 지적도 있다.
“정 회장이 우리 사회에 끼친 기여도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경영자로서 사원복지나 처우 개선에는 지나칠 정도로 인색했던 것 같다.
그가 요즘 시대에 태어나 벤처기업가로 활동했으면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그의 강한 카리스마와 탁월한 사업감각은 초창기 현대가 성장하는 데 강한 추진력으로 작용했지만, 많은 정보를 분석하고 직원들을 다독거려야 하는 벤처기업가로 태어났다면 강점과 함께 약점이 됐을 수도 있을 것이다.
” 다모임 이규웅 사장의 조심스런 비판이다.
옥션 이금룡 사장도 “벤처라는 것이 투명하고, 나누고, 업종끼리 네트워크를 해야 하는 그런 분야인데 아무래도 오프라인과는 다르기 때문에 그런 점만 보강이 된다면”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파텍21 김재하 사장은 조금 더 날을 세운다.
“정 회장은 닷컴기업 CEO로는 맞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
그가 벤처기업인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예전에는 적합한 사람이었겠지만 정보화 사회에 발맞춰가는 데는 실패한 것 아니냐.” 김 사장은 또 “그는 인풋과 아웃풋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다”며 “자기 돈을 쓰기보다는 정부 돈으로 행동하려는 구시대 인물이었다”고 깎아내렸다.
벤처에 거는 기대가 큰 것은 무엇보다 구경제의 단절이 아닌 극복을 통해 신경제를 세우라는 시대적 요청 때문이다.
정 회장을 단절하느냐, 극복하느냐. 아마도 모든 벤처인의 과제일 것이다.
김상범 기자 ksb2004@dot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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