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8 15:06 (목)
[비즈니스] 한국판 ‘슈렉’꿈꾸며
[비즈니스] 한국판 ‘슈렉’꿈꾸며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1.08.0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자금력 갖춘 애니메이션에 조직적 마케팅 기법 도입… ‘마리이야기’ 등 대박 기대
바다 건너에서 온 시퍼런 괴물 한마리가 한국 영화시장을 뒤집어놨다.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 <슈렉>은 개봉 한달 만에 서울관객 100만명의 벽을 깼다.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는 서울에서 130만명, 전국에서 300만명이 이 영화를 볼 것이라고 전망한다.
개봉 9주 동안 92만명을 모은 <라이온킹>의 성적을, 그 절반도 안 되는 기간에 가뿐하게 뛰어넘은 셈이다.
게다가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이 서울관객 100만명을 넘은 것은 영화사상 이번이 처음이다.


올해와 내년 초 개봉을 앞두고 있는 한국의 애니메이션 제작자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슈렉>은 두가지 측면에서 한국 영화시장의 판도를 바꿨다.
첫째 ‘애니메이션은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한국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깼다.
<슈렉> 상영관에서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른들의 웃음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상영관 안을 눈대중으로 가늠해봐도 어린이보다는 어른 관객의 수가 더 많다.


<슈렉>은 ‘3D 애니메이션은 부자연스럽다, 차갑다’는 거부감도 싹 쓸어냈다.
초록괴물 슈렉과 피오나 공주가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면서도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대목에서, 이 디지털 배우들의 눈빛은 한석규, 심은하 못잖게 애절하다.
상대방한테 호감을 느낄 때 나타나는 눈동자 동공 변화를 재현한 3D 기술력 덕분이다.
자연스러운 묘사를 위해 PDI/드림웍스는 ‘쉐이퍼스’와 ‘FUI’를 개발했다.
쉐이퍼스는 뼈, 근육, 지방, 피부, 머리카락, 옷자락들이 서로 반응하는 모습을 대입한 장치이고, FUI는 움직이는 옷자락이나 불, 기름과 물 등 서로 다른 성질의 물질을 표현하는 액체 애니메이션 시스템이다.
내년 3월 3D 애니메이션 <아크>를 개봉할 예정인 디지털드림스튜디오 정광철 제작총괄 이사는 <슈렉>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3D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단점을 최대한 줄인 훌륭한 작품입니다.
” 실사영화에선 만날 수 없는 귀여운 만화적 캐릭터를 도입해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했고,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색감과 분위기를 통해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을 살려 ‘차갑다’는 3D의 콤플렉스를 극복했다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강점은 어른들의 굳은 감성도 자극하는 이야기 구성과 캐릭터이다.
어린 시절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고정된 성 역할, 착한 아이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란 어른 관객들은 <슈렉>의 ‘디즈니 비틀기’에서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독일어로 ‘끔찍한’이란 뜻인 주인공 슈렉은 큰 녹색 괴물인데다 지저분한 진흙 샤워와 도마뱀 요리를 즐기고 심지어는 방귀도 뿡뿡 마구 뀐다.
여기 등장하는 동화 주인공들도 디즈니 이미지와는 딴판이다.
피노키오를 지극히 사랑한다던 할아버지는 단돈 몇푼에 나무 인형을 팔아버리고, 의적 로빈 후드는 숲속을 지나가는 여자한테 수작걸기를 즐기며, 왕자의 키스를 기다리던 숲속의 공주는 떼로 덤벼드는 도둑들을 영화 <매트릭스>식 발차기로 가뿐히 퇴치한다.
영화의 결말 역시 디즈니식 고정관념을 뒤집는다.
밤마다 괴물이 되는 피오나 공주는 슈렉과 진정한 사랑의 키스를 나눈 뒤 마법에서 풀려난다.
그런데 그 모습이 뜻밖에도 아름다운 공주의 모습이 아니라 괴물이다! 정 이사는 <슈렉>의 ‘디즈니 비틀기’, 풍자와 해학 정신이 어른 관객을 끌어들였으며, 마케팅 측면에서도 관객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냈다고 분석한다.
3D 애니메이션에서 상당한 기술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우리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슈렉> 같은 스타가 나올 수 있을까? 현업인들은 기술력 면에선 자신감을 나타내지만 기획력 면에선 고개를 젓는다.
기술은 셀(그림) 애니메이션이든 3D 애니메이션이든 세계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세련되지만, 스토리 구성과 기획은 여전히 어설프단다.
일본, 미국 애니메이션의 하청 제작으로 키워진 시장이라 기획력 있는 인재가 자라지 못한 탓이다.
애니메이션에 투자할 자본도 별로 형성되어 있지 않다.
한신코퍼레이션 사업부 최병윤 과장은 8월 개봉 예정인 <별주부 해로>의 구성도를 높이기 위해 외국의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들을 찾아다녔다고 전한다.
국내 기획력만으로는 세계시장에서 매력을 발휘할 만한 기획이나 시나리오가 나오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애니메이션 판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 바람은 제작 시스템부터 서서히 바꾸어놓고 있다.
실사영화 판의 기획제작력과 투자력이 이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충무로식 영화 구성과 제작기법, 시나리오 기획, 테헤란밸리식 자금 조달, 할리우드식의 조직적 마케팅과 홍보를 애니메이션 제작 시스템에 도입하면서 실험적 시도들을 펼치고 있다.
<마리이야기>를 제작하고 있는 씨즈엔터테인먼트는 박철수필름, 일신창투, 금강기획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디지털드림스튜디오(DDS)의 <아크>는 <미션임파서블2>의 오우삼 감독이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양철집의 <원더풀데이즈>는 삼성벤처투자에서 150억원의 지원자금을 받았다.
씨즈엔터테인먼트 마케팅팀 최은화 과장은 한국 애니메이션도 할리우드처럼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춰 나가고 있다고 전한다.
제작할 땐 기획기간과 제작기간을 충분히 설정한다.
배급할 땐 전처럼 전국 방방곡곡의 시민회관들을 전전하지 않고 영화 배급망을 통해 전국 극장에 당당히 올린다.
마케팅은 영화전문 마케팅 회사에 맡겨 전문성을 높인다.
이런 시스템이 제작진에게 상품의 질을 높일 여력을 준다.
올해 크리스마스에 개봉 예정인 <마리이야기>는 3D 애니메이션으로 그린 바탕에 2D로 살을 입히고 동화 그림을 합성하면서 여러 차례 리터치 작업을 거쳤다.
기존 애니메이션 작업에선 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작품의 판타스틱한 분위기를 잘 살린 데모 필름이 공개된 이후 <마리이야기>는 전문가들 사이에 성공 예감이 높은 우리 애니메이션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
<아크>와 <원더풀데이즈>도 데모필름으로 국내외에서 높은 기대를 얻고 있다.
이들 중 미래의 <슈렉>이 있을지도 모른다.
<쉬리>와 <친구>가 한국 영화를 외면하던 장년층을 끌어들여 한국 영화시장을 넓힌 것처럼,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을 키우는 데는 <슈렉> 같은 ‘대박’이 필요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