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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프로] 에스쁘아 퍼퓨머 송명철
[나는프로] 에스쁘아 퍼퓨머 송명철
  • 이미경 기자
  • 승인 2001.08.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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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에 ‘세상’을 담는 디자이너
향수 전문회사 에스쁘아에 가면 퍼퓨머 송명철(35)씨가 날마다 향기로 도 닦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웬만한 사람들은 회사 전체에 스며 있는 온갖 향 때문에 30분만 앉아 있어도 코가 마비되고 그 향이 그 향 같아 어질어질하지만, 그는 하루에 백여가지 향을 디자인하고 음미하고 미묘한 차이를 분석해 최상의 향을 완성하는 일을 벌써 10년째 하고 있다.


“향을 사랑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저는 이 일이 운명 같아요.” 이 기구한 운명은 1992년, 그가 다니던 대학의 학과 사무실 앞에서 시작됐다.
게시판에 화장품 전문업체인 태평양이 조향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내붙인 것이다.
당시 화학공학과 졸업반이던 송씨는 석유화학이나 중장비와 같은, 자기 전공과 관련된 사회 진출이 어쩐지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 것 같아 고민하던 참이었다.
조향사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몰랐지만, 어쩐지 ‘예감’이 심상치 않았다.

향기 디자인, 어쩌면 철학 서둘러 필요한 서류를 챙기고 자료를 뒤적이며 면접을 준비했지만 정작 면접관들은 이력서를 눈여겨보지도,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다.
대뜸 가늘고 흰 종이 석장을 내밀더니 향을 맡아보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트라이앵글 테스트였어요. 두장에는 똑같은 향을, 다른 한장에는 그것과 90% 정도 성분이 같은 향을 뿌린 다음, 그 중에서 다른 향을 골라내는 거죠. 처음엔 전혀 구별이 안 되더라구요.” 대대로 탁월한 후각을 자랑으로 삼았던 집안의 후손이거나 초등학교 때부터 별명이 ‘개코’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대여섯차례 같은 테스트를 반복하면서 경쟁자들이 한사람씩 탈락할 때마다 그의 심장은 마냥 오그라들었다.
이 기이한 테스트가 어찌나 충격적이었던지, 송씨는 최종 합격통보를 받고도 자신의 행운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나이 스물다섯에 처음으로 자신이 ‘개코’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퍼퓨머가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먼저 향수 개발과정을 알아야 한다.
새로운 향수를 만들기 위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컨셉’ 정하기다.
컨셉은 소비자들의 요구와 시장의 흐름을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결정되는데 젊음이나 희망, 용기와 같이 포괄적이고 피상적인 경우가 많다.
일단 컨셉이 정해지면 퍼퓨머의 ‘철학적인 고민’이 시작된다.
식물의 꽃과 열매 등 자연에서 추출한 1500여가지 천연향료와 인위적인 공정을 거쳐 탄생한 수천가지의 화학향료 중에서 컨셉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향료를 선택하고 이를 배합해 ‘처방전’을 만드는 것이다.
처방전은 화가의 팔레트와 같다.
화가가 갖가지 색을 섞어 원하는 색을 만들어내듯 퍼퓨머들은 수십가지 향료를 섞어 컨셉에 맞는 향을 디자인한다.
어떤 향료를 몇 퍼센트씩 넣어야 할지, 가장 먼저 휘발되는 향과 마지막까지 남는 향이 어떤 것인지 한눈에 볼 수 있는 그림이 바로 처방전이다.
따라서 퍼퓨머의 머릿속에는 수백가지 향료의 독특한 향과 특징, 그리고 그것들을 배합할 때 생기는 효과가 컴퓨터 데이터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어야 한다.
처방전에 따라 향수 원액이 만들어지면, 그 다음엔 그것을 다듬는 과정을 수없이 되풀이해 몇개의 샘플을 만든다.
최종 처방전은 그 기업의 일급 기밀이고 이를 누설하는 자는 ‘산업스파이’에 해당되지만, 다른 회사에서 막 개발된 향수를 몇번 뿌려본 뒤 그 향수의 처방전을 귀신같이 알아맞히는 것 또한 퍼퓨머들의 놀라운 능력이다.
투수가 강한 어깨와 팔을 목숨처럼 여기듯, 퍼퓨머의 생명은 ‘코’에 달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퍼퓨머들이 ‘코 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축농증이나 비염에 시달리면서 0.1%의 장미와 0.2%의 자스민이 포함돼 있는 향수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송명철씨는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늘 신경을 쓰고, 중요한 시기에 감기에 걸렸다면 결정을 과감히 미룬다.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는 건 기본이고, 시간이 날 때마다 야외로 나가 좋은 공기를 힘껏 들이쉰다.
예민한 후각을 유지하기 위해 담배는 절대 금물이다.
퍼퓨머,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태평양에서 사내 벤처 형식으로 신설한 향수 전문회사 에스쁘아에 합류한 뒤로 송씨는 삶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그는 2년여에 걸친 향수 개발 프로젝트의 전 과정에 참여했고, ‘즐거움과 희망’이라는 화두를 붙들고 1년여의 산고를 치른 끝에 지금의 에스쁘아 향수를 만들어냈다.
요즘은 그 경험을 토대로 업무영역을 더욱 넓혀 신상품 기획부터 향기 디자인, 마케팅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총괄하는 중책을 맡고 있다.
“처음 에스쁘아 제품이 나왔을 때 제가 디자인한 향수가 공장에서 생산되는 걸 보면서 눈물을 흘렸어요. 시장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직접 판매하러 나갔다가 ‘이 향수 좋더라’고 말하는 고객 때문에 또 한번 울컥 했고요. ‘이게 제가 디자인한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참느라 혼이 났죠.” 퍼퓨머의 가장 큰 기쁨은 길을 걷다가 자신이 디자인한 향수를 뿌린 사람과 마주치는 것이다.
그럴 때면 머릿속에서 수천가지 향료를 섞고 덜어내기를 반복하며 불면을 밤을 보내야 했던 ‘창작의 괴로움’ 따위는 까마득한 옛일이 되고 만다.
“세상에 향으로 표현할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끊임없이 새롭고 독특한 향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퍼퓨머도 일종의 예술가라고 할 수 있겠죠. 예술은 상상력 없이는 불가능해요. 퍼퓨머가 가져야 할 가장 큰 자질은 기술이 아니라 생각의 자유로움입니다.
” 한번 뿜어내면 순식간에 흩어져 구석구석 퍼지는 향처럼 퍼퓨머의 생각도 막힘없이 흘러야 한다는 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그의 믿음이다.
퍼퓨머가 되는 길
국내에서 활동중인 퍼퓨머 중에는 화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많다.
천연향료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수천가지에 달하는 화학향료의 성분을 이해하고 적절히 활용하려면 화학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추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향수 관련 업종이니 여성 퍼퓨머가 많을 것’이라는 추측이 들어맞지 않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국내에는 퍼퓨머를 양성하는 사설 교육기관이 없으므로 퍼퓨머가 되는 길은 오직 향료회사나 화장품 회사에 입사하는 방법뿐이다.
현장에서 경험을 쌓으며 퍼퓨머로 성장하는 것이다.
외국 유학을 생각한다면 스위스 향료회사인 ‘지부당’처럼 회사 안에 교육기관을 마련해 자사 직원들을 가르치고 일반인에게도 문을 열어놓은 업체를 찾는 방법이 있다.
공식적인 퍼퓨머 전문학교로는 프랑스의 ISIPA가 세계적으로 유일한데, 이 학교는 전설적인 퍼퓨머 장 자크 겔랑이 설립해 고급 인력들을 다수 배출하고 있다.
최근 일본 도쿄에도 사설 교육기관이 생겨 관심을 모으고 있다.
퍼퓨머가 되려면 무엇보다 후각이 중요하다.
뛰어난 후각을 지녔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보통 사람도 일을 하면서 꾸준히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후각을 발달시킬 수 있다고 한다.
퍼퓨머는 향료에 대한 이해와 기술적 지식 못지않게 예술적 감각이나 안목도 갖춰야 한다.
컨셉에 맞춰 늘 새로운 향을 만들기 위해서는 화학적 지식보다 끼와 상상력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다.
긴 수련과정을 자신에 대한 투자라고 여기고, 섬세하고 예민한 작업을 지치지 않고 해내는 사람만이 퍼퓨머로 성공할 수 있다.
‘내가 있는 곳에 늘 향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향’ 대해 남다른 애정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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