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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트렌드] 천수답 경제의 슬픈 운명
[경제트렌드] 천수답 경제의 슬픈 운명
  • 투자팀 이용인 기자
  • 승인 2001.08.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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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손에 나의 운명을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서글프다.
그것이 유일한 호구지책이라면 슬픔은 더욱 깊다.
천수답 농민의 심정도 마찬가지일 게다.
행여 모내기를 앞두고 며칠 동안 뙤약볕이라도 내리쬐면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심정이 된다.
불행히도 천수답은 ‘자연’의 영원한 ‘종속 변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는 흔히 ‘천수답 경제’로 비유된다.
어찌됐든 수출에 목을 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지역적으로는 미국, 업종별로는 반도체가 수출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때문에 미국과 반도체 산업의 경기회복만 기대하며 기도를 올리는 정부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경기 저점기마다 나오는 정부의 간절한 기도는 왠지 게으른 농부의 변명처럼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연초부터 끊임없이 수출에 대한 경고음이 울렸다.
특히 7월 수출은 최악의 성적표를 기록했다.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7월 수출은 115억7천만달러에 그쳤다.
지난해 같은 달보다 20% 줄어든 수치다.
‘20%’라는 감소율은 월별 무역통계가 남아 있는 1967년 1월 이후 가장 큰 폭의 감소율이다.
비관적인 수치는 이뿐만 아니다.
한국은행은 2분기 순상품 교역지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6%나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수출해 받은 돈으로 사들일 수 있는 수입상품의 양이 훨씬 더 적어졌다는 얘기다.
교역조건이 이처럼 나빠진 것은 지난 2분기 동안 수출단가 하락률이 13.9%로, 수입단가의 하락폭인 4.8%를 훨씬 앞질렀기 때문이다.
수출단가의 하락은 원가절감 덕분이 아니라 국제시장의 수요위축 때문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통계수치를 신앙처럼 받드는 정부가 다급해졌다.
정부는 당정회의와 경제장관간담회를 잇따라 열고 수출촉진 방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예컨대 정부는 중소기업에 모두 1조원 규모의 수출지원책을 펴기로 했다고 한다.
업체당 10억원의 범위 안에서 수출신용장만 있으면 생산자금을 전액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종합상사와 대기업의 구매확인서도 수출실적에 포함시켜 수출신용보증을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부가 내놓은 정책들은 어딘가 부족한 구석이 있다.
수출 부진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이 없는, 즉자적인 대응이라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수출이나 교역조건이 악화된 것은 반도체와 정보통신기기(정확히는 휴대전화)의 수출부진과 단가하락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도체와 정보통신기기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진 탓에 경제 전체가 큰 충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 한 품목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만 해도 15% 정도에 이르며, 정보통신기기 수출 가운데 휴대전화 비중은 60%를 넘는다.
그렇다면 정부는 전반적인 수출구조 개선을 위한 액션플랜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축구팀이 스트라이커의 부상에 대비해 미리 선수층을 두텁게 해둬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 경제의 스트라이커는 과거에도 큰 부상을 입은 적이 있다.
95년에 한국은 축제의 한복판에 있었다.
치르는 경기마다 승승장구였다.
스트라이커인 삼성전자는 단연 화제였다.
94년 D램 시장이 폭발하자 95년에 삼성전자는 세금을 줄이려고 종업원들에게 특별보너스를 지급한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덩달아 한국 경제도 들떴다.
하지만 96년은 최악의 해였다.
세계 반도체 시장이 꽁꽁 얼어붙으면서 반도체 수출이 19%나 줄어들었다.
전체 수출증가율도 95년 30%에서 96년에는 3.7%에 그쳤다.
이 해 206억달러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적자를 기록했던 것은 반도체 수출이 급감한 데 원인이 있었다.
당시 반도체의 급격한 몰락은 97년 말 불어닥친 IMF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꼽힐 정도였다.
정부가 과거의 교훈을 잘 활용하는 훌륭한 감독이었다면, 99년과 2000년의 반도체 호황기에는 또다른 스트라이커를 배출하기 위해 노력했어야 옳다.
우리가 크게 의존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 전반적인 경기와 정보기술(IT) 산업이 부진했음에도 디지털카메라나 MP3플레이어 따위의 디지털 상품들과 거기에 들어가는 주문형 반도체 부문은 계속 성장을 해왔다.
하지만 정부는 반도체와 휴대전화가 주는 달콤함에 너무 빠져 있었다.
시험을 앞두고 벼락치기를 즐겨하는 수험생처럼 정부의 정책들은 게으르고 졸속인 것처럼 보인다.
정부나 기업이 수출 선수층을 두텁게 할 수 있는 해결책은 딱 한가지다.
IMF 위기 이후 구조조정이라는 이름 아래 줄여왔던 연구개발 분야에 대한 투자를 다시 확대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만 쳐다보며 기우제를 지내거나, 스트라이커가 부상을 입지 않기를 기도하는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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