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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도트프린터 "나 아직 안 죽었어요"
[포커스] 도트프린터 "나 아직 안 죽었어요"
  • 유춘희
  • 승인 2000.08.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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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와 복사 출력 등 특정 용도에서 맹활약…연 3만~4만대 꾸준히 판매
“끼익 끼기기익….”
불과 3~4년 전만 해도 도트프린터는 사무실의 소음덩어리였다.
쇠줄로 유리창을 긁는 듯한 소리를 내며 사람들의 귀를 성가시게 했다.
잉크젯프린터와 레이저프린터에 자리를 내주고 사무실에서 쫓겨났을 때 이를 아쉬워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도트프린터는 프린터의 원형으로, 80년대 후반까지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저소음과 빠른 출력을 특징으로 하는 잉크젯과 레이저 프린터가등장하면서 주류 시장에서 빠르게 밀려났다.
컬러 옵션을 추가하는 등 재기의 몸부림을 쳐봤지만 화질 좋고 성능 좋은 잉크젯과 레이저의 추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도트프린터가 사용자들에게 외면받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곳은 당연히 프린터 개발·공급업체들이다.
이 시장에서 전통적으로 강했던 삼성전자는 요즘엔 레이저프린터에만 힘을 쏟고 있다.
LG전자, 삼보컴퓨터, 현대전자 등은 2~3년 전부터 생산을 중단했거나 아예 프린터 사업 자체를 포기했다.
도트프린터 시장에서 늘 선두권을 유지하던 태일정밀과 큐닉스컴퓨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전체 시장의 1.4%, 지난해보다 29% 성장 현재 도트프린터 시장을 고수하고 있는 국내 업체는 제일정밀과 태흥아이에스 두곳에 불과하다.
외국계 업체로는 한국엡손과 브라더상사가 있다.
이들이 아직도 제품개발과 판매에 나름대로 정성을 쏟고 있는 것을 보면 도트프린터를 필요로 하는 시장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컴퓨터 전문지 <컴퓨터월드>의 집계에 따르면, 지난 한해 동안 국내에서 판매된 도트프린터는 모두 2만9천여대로, 193억원 규모의 시장을 형성했다.
이는 98년의 2만2천대보다 29% 가량 성장한 수치다.
시장규모가 전년보다 상당히 커진 셈이다.
판매대수를 기준으로 한 업체별 시장점유율은 한국엡손이 전체의 54%, 그리고 태흥아이에스와 제일정밀이 각각 24%와 20%를 차지하고 있다.
또다른 컴퓨터 전문지 <시사컴퓨터>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엡손, 태흥, 제일 3개 회사가 올 1분기에만 9600여대의 제품을 판매했다.
이같은 성장속도를 단순 계산하면 올해 시장규모는 지난해보다 50% 가까이 커지게 된다.
이 잡지가 집계한 프린터별 시장점유율은, 판매대수 기준으로 잉크젯이 83%로 압도적이었고, 레이저가 15%로 뒤를 이었다.
도트프린터는 1.4%에 불과했다.
지난해 판매된 프린터 1천대 가운데 14대가 도트프린터였다는 계산이다.
거친 화질이 문제되지 않는 곳이라면 그렇다면 도트프린터를 ‘쓸 수밖에 없는’ 곳은 대체 어디일까. 도트프린터는 고속으로 많은 양의 데이터를 찍어내야 하는 곳에서 지금도 굳게 버티고 있다.
많은 고객명단과 주소를 관리해야 하는 DM 발송업체나 백화점, 택배회사, 신용카드사를 비롯해 프로그램 리스트를 출력하는 기업 전산실, 대량의 티켓을 발행하는 철도·고속버스·항공사들이 주요 손님이다.
고급 프린터를 사용할 환경이 안되는 생산공장도 빠지지 않는다.
이들은 출력물을 한번 보고 버리거나 전달하는 용도로 쓰기 때문에 도트의 단점인 거친 화질이 문제되지 않는다.
독일산 도트프린터를 수입 판매하고 있는 경인정보통신의 이문호 사장은 “사무용으로 써왔던 24핀짜리 제품이 프린트물을 2~3장 복사해야 하는 곳에서 대부분 쓰이고 있다”며 “복사 기능은 도트프린터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기능”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구매자에게 원본을 주고 판매자가 복사본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경우 도트프린터는 필수적이다.
현재 나와 있는 제품 가운데 최대 복사 능력은 8페이지까지다.
도트프린터는 핀의 충격으로 인쇄하기 때문에 여러 장을 복사할 수 있다.
먹지를 대고 타자를 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소형 도트프린터에 속하는 신용카드 영수증 발행기가 그런 경우다.
이런 특징 때문에 최근 각광받고 있는 시장 가운데 하나가 병원이다.
처방전 한장은 환자에게 줘서 약국에 전달하고, 원본은 병원에서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도트프린터 업체들은 병원을 떠오르는 대형 수요처로 주목하고 있다.
‘꼭’ 도트프린터여야 하는 이유가 있다 유지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도트프린터를 쓸 수밖에 없는 경우도 많다.
경찰공제회 전산실의 정광덕 실장은 “매달 전국 경찰의 회비납부 리스트를 출력해야 하는데, 이를 레이저프린터로 할 경우 잉크와 종이값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한다.
도트프린터의 소모품은 기껏해야 까만 ‘리본’ 하나. 게다가 용지값도 레이저나 잉크젯에 쓰는 백상지보다 20~30% 가량 싸다.
레이저프린터의 토너나 잉크젯의 잉크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할 정도로 유지비용이 많이 든다.
요즘 흔히 얘기되는 총소유비용(TCO) 측면에서 이로울 게 하나도 없는 셈이다.
이 때문에 IMF 초기에 도트프린터가 반짝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도트프린터가 좋은 이유는 또 있다.
정 실장은 “특히 많은 양을 찍어야 할 때 접이 용지를 끼운 뒤 프린팅 명령만 내리고 퇴근해도 결과물을 잘 정리해주어 여유를 갖고 일할 수 있다”고 말한다.
레이저나 잉크젯은 카트리지에 한번에 넣을 수 있는 종이량에 한계가 있고, 잼(용지가 롤러 사이에 끼는 것)이 잘 걸리는 게 항상 문제로 지적된다.
도트 용지는 2천장까지 쉬지 않고 프린트할 수 있다.
현재 국내 도트프린터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한국엡손의 손현진 마케팅부장은 “도트프린터는 시장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더 크게 성장하지는 않겠지만 연 3만~4만대 시장은 유지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제까지 단점으로 지적됐던 소음 문제도 많이 개선돼 50dB 아래로 떨어졌고, 용지 자동절단 기능이나 네트워크를 통한 다중사용자 기능을 더해 까다로운 사용자 요구도 웬만큼 충족했다고 한다.
도트프린터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새로운 프린터 제품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나오지만,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프린터 원조’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도트프린터의 건재는 단순하게 ‘옛것이 좋다’는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잉크젯과 레이저가 커버하지 못하는 틈새에 주로 공급되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꼭 있어야 할 곳에 있음’으로써 생명력을 얻는 상품의 미덕을 새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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